“내가 정윤회와 호텔서 밀회?”…朴 직접 밝힌 ‘세월호 7시간’ [박근혜 회고록 10 - 세월호 (상)]
2023.10.24
세월호 참사는 내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먼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국민 여러분께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점에 대해 이 회고록을 빌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이 참사에 대해서는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랬기에 당시 세간에서 나와 관련해 제기됐던 온갖 의혹이나 추문에 대해서 일일이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그게 또다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려고 한다.
세월호 침몰사고 사흘째던 2014년 4월 18일 사고 해역에서 해경과 해군 등이 선체에 공기를 주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4년 3월 말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작은 3월 20일에 열린 규제개혁 장관회의였다. 대통령이 되고 규제개혁을 여러 번 강조해 왔기에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던 나는 당시 회의에서 “물건을 빼앗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라 일자리를 규제로 빼앗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강조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장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면서 회의가 무려 일곱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오후 2시 시작한 회의가 저녁도 거른 채 오후 9시에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이틀 뒤엔 3월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약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헤이그는 이미 밤이었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한·중 정상회담을 위해 곧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야 했다. 북한 핵 문제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문제 등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어 열린 핵안보 정상회담도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53개국 정상이 참석한 국제회의였다. 나는 24일 개막 세션에서 기조연설을 맡았고, 다음 날에는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강행군이 이어졌다. 한·미·일 정상회담은 몸이 너무 안 좋아 링거를 맞고서야 겨우 참석했는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한국말 인사를 제대로 듣지 못해 오해를 받았을 정도였다. 헤이그 일정을 마친 뒤엔 3일간의 독일 순방이 이어졌다.
2014년 3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네덜란드 핵안보정상회의와 독일 순방 등을 마치고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중앙포토
이렇게 5박7일간의 빡빡한 순방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엔 시차 적응까지 겹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일정이 연일 이어졌다. 3월 31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이 참석하는 행사인데, 나는 4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만찬을 주재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이들을 앉아서 맞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입구에 서서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고 각 나라의 상황도 물어보다 보니 선 채로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8일에는 방한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와 만나 한·호주 정상회담을 가졌고, 14일에는 21명의 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실상은 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이런 나의 상태가 주변에 아슬아슬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하루는 정호성 비서관이 나에게 “대통령님, 차라리 하루만 일정을 비우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 사실 나도 ‘이러다가 큰일나겠다’ 싶었던 차라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무리하게 몸을 축내는 것보다 관저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저라고 해도 서재나 책상 등이 있어 충분히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다. 그렇게 해서 쉬기로 한 날이 바로 운명의 날인 4월 16일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야당에선 내가 이날 왜 본관에 가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는지를 놓고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호성 비서관은 쉬기로 했던 4월 16일에 나의 연가 신청을 처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공식적인 자체 휴일 정도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날을 공식 휴가로 생각했던 나와 혼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날 무수히 벌어진 혼선의 예고편이었다.
박근혜대통령 [회고록 10편]
※※※박근혜대통령 세월호 7시간 의혹 제기와 관련 굿을 했고 호텔에서 정윤회씨와 밀회중이며 성형시술 및 프로포폴을 투여했다는것은 재판에서도 다뤄졌지만 박근혜대통령께서는 날조에 불과한 내용이다라고 회고록에 밝혔다
당시 4월16일 오전11시 YTN 전원구조 오보방송 및 경호문제로 인해 중대본 방문 늦어짐※※※
“내가 정윤회와 호텔서 밀회?”…朴 직접 밝힌 ‘세월호 7시간’
세월호 참사는 내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먼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국민 여러분께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점에 대해 이 회고록을 빌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이 참사에 대해서는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랬기에 당시 세간에서 나와 관련해 제기됐던 온갖 의혹이나 추문에 대해서 일일이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그게 또다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려고 한다.
2014년 3월 말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작은 3월 20일에 열린 규제개혁 장관회의였다. 대통령이 되고 규제개혁을 여러 번 강조해 왔기에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던 나는 당시 회의에서 “물건을 빼앗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라 일자리를 규제로 빼앗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강조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장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면서 회의가 무려 일곱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오후 2시 시작한 회의가 저녁도 거른 채 오후 9시에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이틀 뒤엔 3월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약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헤이그는 이미 밤이었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한·중 정상회담을 위해 곧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야 했다. 북한 핵 문제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문제 등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어 열린 핵안보 정상회담도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53개국 정상이 참석한 국제회의였다. 나는 24일 개막 세션에서 기조연설을 맡았고, 다음 날에는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강행군이 이어졌다. 한·미·일 정상회담은 몸이 너무 안 좋아 링거를 맞고서야 겨우 참석했는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한국말 인사를 제대로 듣지 못해 오해를 받았을 정도였다. 헤이그 일정을 마친 뒤엔 3일간의 독일 순방이 이어졌다.
이렇게 5박7일간의 빡빡한 순방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엔 시차 적응까지 겹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일정이 연일 이어졌다. 3월 31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이 참석하는 행사인데, 나는 4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만찬을 주재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이들을 앉아서 맞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입구에 서서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고 각 나라의 상황도 물어보다 보니 선 채로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8일에는 방한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와 만나 한·호주 정상회담을 가졌고, 14일에는 21명의 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실상은 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이런 나의 상태가 주변에 아슬아슬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하루는 정호성 비서관이 나에게 “대통령님, 차라리 하루만 일정을 비우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 사실 나도 ‘이러다가 큰일나겠다’ 싶었던 차라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무리하게 몸을 축내는 것보다 관저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저라고 해도 서재나 책상 등이 있어 충분히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다. 그렇게 해서 쉬기로 한 날이 바로 운명의 날인 4월 16일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야당에선 내가 이날 왜 본관에 가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는지를 놓고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호성 비서관은 쉬기로 했던 4월 16일에 나의 연가 신청을 처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공식적인 자체 휴일 정도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날을 공식 휴가로 생각했던 나와 혼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날 무수히 벌어진 혼선의 예고편이었다.( 강행군 뒤 관저서 휴식… 첫 보고 7~8분 늦어 )
4월 16일 오전은 당연히 공식 일정이 없었지만 일상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관에는 가지 않는 대신 관저에서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보고서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세월호가 기울어진다는 신고가 119에 처음 접수된 것은 이날 오전 8시 54분이다. 김장수 안보실장이 사고 발생을 인지한 것은 9시30분, 상황보고서 초안을 받고 나에게 직통전화를 걸었던 때가 오전 10시 12~13분이었다.
이때까지 사고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나는 보고서를 읽다가 참고할 자료를 찾느라 휴대전화를 놔둔 채 다른 방에 가 있었다.
보고서를 받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배 안에 수 백 명이나 탑승하고 있다고 하니 무엇보다 이들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곧바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객실 곳곳을 다 찾아서 누락 인원이 없도록 하세요”라고 지시했다(오전 10시22분).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배 곳곳을 샅샅이 다 뒤져야 합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해경특공대라도 투입해 여객선의 객실과 엔진실까지 철저하게 확인해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세요”라고 주문했다(오전 10시 30분).
이것이 세월호 사고 발생을 인지한 직후 청와대의 첫 대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30분쯤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울어져 복원력을 상실했고, 1시간 뒤에는 거의 침몰한 상태였다(오전 10시 30분).
하지만 당시엔 아직 현장 화면이 확보되지 않았고, 침몰 사실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구조 장비를 총동원하고 해경이 투입되면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와대의 대체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이후 국가안보실을 통해 두 차례(오전 10시40분, 오전 11시20분) 상황보고서가 도착했지만, 배가 침몰했다거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하는 내용은 없었다.
( ‘전원 구조’ 보도에 안도… 확실히 안 따진 것 안이했다 )
오전 11시쯤 관저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당시 YTN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나는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언론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안보실은 해경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올라온 보고들을 취합해서 가져오기 때문에 이런 급박한 사고 때는 오히려 보고가 언론 보도보다 늦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전 11시20분 안보실에서 보낸 세 번째 상황보고서에 구조된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을 때도 나는 다음 보고에는 추가 구조 인원이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 언론 보도와 안보실에서 파악한 숫자가 다른 이유를 더 따져 물었어야 했다. 나는 언론에서 그런 중대한 일을 잘못 보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고, 약간의 보고 지연이 생긴 것으로 짐작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은 4월 16일 오전 10시부터 내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방문한 오후 5시까지를 ‘잃어버린 7시간’, 또는 ‘세월호 7시간’이라고 명명하며 의혹을 제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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