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2편

Jimie 2024. 5. 16. 04:23

[박종평 기자의 서울탐방기]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2편

2023. 11. 11. 19:01

 

김수영 종로6가 옛 집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2편

영웅 중의 영웅, 김상옥 의사

박종평 기자

동대문역에서 미아리고개까지 길을 이어 걷는다. 1편에서는 동대문역에서 김수영 시인 집터, 여진족이 머무는 북평관, 남이장군과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의 집터,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출판한 매문사 터까지였다. 지난주 답사를 보완하기 위해 1편 구간을 2차례에 걸쳐 다시 다녀왔다.

2편 구간은 1편 답사 당시 몰라서 넘어갔던 곳들을 재확인한 내용을 포함해 동대문역에서 혜화동로터리까지이다. 여러 중요한 장소들이 많다. 그러나 이번 2편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간담을 떨어뜨린 김상옥 의사(金相玉 義士, 1889.1.5.~1923.1.22.)를 소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김 의사의 삶을 돌아보니, 그는 우리 5천년 역사 속 영웅 중의 영웅, 전사(戰士) 중의 전사였다. 필자는 지난 10여 년 이순신 장군에 몰입했었다. 살면서 장군만큼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장군과 관련한 다양한 책을 썼고, 장군의 일기와 장계(보고서) 번역을 위해 7년 동안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번역본이 나온 뒤로 더는 세상 사람이나 세상일에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서울탐방기를 연재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이번에 김상옥 의사를 알게 되었다. 다시 가슴이 뛴다. 짧게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이토록 설례여 보기는 장군을 알게 된 이래 처음이다. 출발지는 1편과 같이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10번 출구이다.

김수영 시인의 집터와 동부학당(東部學堂) 터

김수영 문학관에 확인했던 종로6가 김수영 시인 집터로 다시 갔다. 동대문역 10번 출구에서 종로5가 쪽으로 40미터 걸어가면, 큰길 옆에 시골밥상, 동대문가발, 경인의료기 가게가 있는 2층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이 김 시인이 12살 때까지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이다. 1945년 해방 후 김 시인이 만주에서 돌아와 그 집 뒤편에 있던 고모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 시기에 박인환 시인과 인연을 맺었다.

다시 살펴본 김 시인의 옛집 터에 있는 건물은 서울 한가운데, 종로 큰길에 있는 건물치고는 아주 낡았다. 도시 변두리의 낡은 옛 건물이나, 지방 소도시의 낡은 건물과 같다. 김 시인의 고모가 살았던 집터에는 작은 빌딩이 들어서 있다. 네이버지도 주소로는 은명빌딩, 카카오지도에서는 ‘대명빌딩’으로 되어 있다. 건물에는 ‘은영빌딩’이라는 빌딩 이름이 붙어있다.

건물을 세웠을 때 붙여놓은 ‘은영빌딩’으로 검색하면 찾아갈 수 없다. 은명빌딩이나, 주소를 검색해야 찾아갈 수 있다. 은영빌딩을 등기할 때 은명빌딩으로 이름이 바뀐 듯하다.

출생신고 때 관공서의 착오로 엉뚱한 이름이 새로 지어지는 사례들이 있듯 이 건물도 처음 지은 이름이 등기할 때 이름이 바뀌었고, 등기한 사람도 오류를 놓치고 지내며 그냥 굳어진 듯하다.

이름이 뭐 그리 대수랴. 이름 따라 건물의 운명이 정해지는 것도 아닐 테고. 물론 성명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벌컥 화를 낼 일이겠지만, 최소한 건물 이름이야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듯하다.

전에 답사 때도 김수영 시인의 흔적은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큰길가 김수영 옛 집터와 그의 고모집 터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 기억하려고 할 때 의미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의 삶도 마찬가지다. 잊지 않고 기억해 줄 때 그 인물이 살아난다.

이 공간 역시 김수영을 만든 공간의 하나이다. 꿈을 꾸던 소년 김수영, 청년 김수영과 박인환의 삶이 얽힌 공간이다. 어느 분께서 종로 6가의 이곳, 김수영에 대한 1편 글을 읽고 “김수영! 위대한 자유여!”라고 감상평을 보내 주셨다. 종로 6가 김수영 옛집 터는 자유의 시인 김수영이 영원한 자유를 꿈꾼 곳이다. 작은 안내판 하나라도 세워 놓았으면 좋겠다.

다시 동대문역 사거리로 가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지난 답사 때 주소 오류로 확인치 못했던 ‘동부학당 터’를 찾아가기 위함이다. 동대문 옆 흥인지문공원(동대문성곽공원) 정자 앞 큰길 보도에 ‘동부학당 터’ 표석이 있다. 2016년에 세워진 것이다. 김수영 집터 근처에 있던 표석이 위치 오류로 철거되고 새로이 설치된 표석인 듯하다. 바로 위는 ‘서울한양도성 성곽길’이다. 동대문에서 출발하면 낙산길을 거쳐 가까이는 혜화문, 조금 멀리는 숙정문, 더 멀리는 창의문까지 이어진다. 그 길도 운치가 있고, 경치도 좋다. 그러나 이번 답사의 목표는 성곽길이 아니다. 성곽 안에 살았던 인물과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다. 성곽길은 과감히 제외했다.

이 글의 역사 이야기나 인물 이야기가 재미없고, 가벼운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성곽길로 가길 권한다. 삶에 정답이 어디 있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동부학당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반도 5000년 역사 중 최고의 영웅 중 영웅

지난 1차 답사 때, 어의궁터를 찾아가는 길에 김수영 시인이 다녔던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지났었다. 그 앞길 명칭은 ‘김상옥로’였다. 또 마로니에 공원에 세워져 있는 ‘김상옥 열사의 상’도 보았다. 그때는 이 지역과 김상옥 의사(金相玉 義士, 1889.1.5.~1923.1.22)가 어떤 관계가 있나 보다 하는 정도였다. 깊이 알지 못했다.

김 의사는 1923년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일제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일제 군경과 2차례에 걸친 총격전을 했다. 그의 영웅적 전투는 일제의 간담을 떨어뜨렸다. 그의 삶이 너무 궁금해 일제강점기 각종 신문 속 기사로 조사했다. 검열된 기사였으나,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급히 이정은 선생이 쓴 『김상옥 평전』(민속원, 2014년)를 구해 읽었다.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는 영웅 중의 영웅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순신 장군을 공부했다.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었기에, 장군을 공부한 이래 그 누구의 삶도 마음을 흔들거나, 그 누구에게도 끌리지 않았다. 어떤 역사책 속의 사람이든, 현실의 그 누구든 다들 고만고만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김상옥 의사를 알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살면서 한번도 누군가의 삶 때문에 설레여 본 적이 없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를 찾아간다.

일제강점기 우리 한반도 안에서 김 의사처럼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치열한 전투를 한 사례는 없다. 그럼에도 김 의사는 아는 사람만 아는 독립운동가이다.

다행히도 두 편의 영화가 그를 우리 시대로 불러냈다. 영화 밀정(김지운 감독, 2016년)의 ‘김장옥(박희순 분)’과 암살(최동훈 감독, 2015년)의 ‘피스톨(하정우 분)’이 김 의사의 삶과 활약과 아주 닮았다. 어느 보도에서는 김 의사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영화 속 총격전은 실제 김 의사가 했던 총격전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두 감독에게 뒤늦게나마 마음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이번 설은 코로나로 멀리 갈수도 없고, 또 친인척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독자들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이번 설에는 그 두 편의 영화를 집에서 편히 보시고 김 의사의 삶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셨으면 한다.

1차 답사 때는 그 동네와 김 의사와의 관계에 대해 답사 후 다시 확인해 보기로 하고 대략 지나갔다. 답사에서 돌아온 뒤에 김 의사의 삶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았다.

종각역부터 동대문역까지, 북쪽으로 ‘김상옥로’까지의 공간에는 김 의사의 거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그 동네에서 살았고, 그 동네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독립운동을 했고, 그 동네에서 공부를 했고,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끝내는 그 동네에서 불과 34세에 순명(順命)했다. 천명(天命)을 따라 산 26년을 마감했다.

효제동 김상옥 생가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가난한 소년 노동자 김상옥

김 의사는 8살 때부터 노동을 했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말단 하급 군인이다, 구한국 군인으로 영문(營門) 포수(砲手)였다. 구한말의 저명인사들 대부분이 명망가 집안 출신이거나 부유한 사람들, 한다하는 관료출신, 지식인 출신이다. 그런 점에 그는 아주 특별하다. 양반 출신으로 보기도 어려울 만큼 평범한 집안 출신이다.

그 때문인지 이정은 선생은 그의 삶에 대해 “대한민국 건국사에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특성인, 비(非)노블레스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또 그 때문에 이정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년 노동자이어야 했던 빈곤한 가정 출신의 김상옥 의사가 어떻게 민족과 국가를 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어떻게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비천하다 할 수 있었던 김상옥 의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숭고한 이상을 품고 행동하며, 번창하던 사업을 버려두고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걸게 되었는지 하는, ‘김상옥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한 사람 김상옥 의사의 위대성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건국으로 나아온 항일독립운동사, 한국근대사의 미스테리인, 놀랍도록 숭고하고도 엄숙한,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비범한 자기희생 현상’을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낡은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때, 어떤 사람의 이름을 넣어 “○○○현상”이란 것이 있었다. 이정은 선생이 말하는 ‘김상옥 현상’과 비교해 보면, 그 “○○○현상”은 참으로 낯부끄러운 현상이다.

김상옥로 이정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상옥 현상’의 주인공 김상옥을 찾아가자.

김 의사는 효제동 72번지에서 태어났다. 73번지에는 어릴 때 친구이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이혜수 의사(李惠受 義士, 1891~1961)가 살았다. 그 지역에는 당시 그 두 집 외에 74번지, 75번지, 76-2번지의 세 집이 더 있었다. 그 5채의 집들이 1923년 1월 조선을 뒤흔든 김 의사의 일제 군경과의 전투 공간이다.

지금은 그때의 집들은 아니겠지만, 아주 낡은 1층 집들이 연이어 붙어있다. 그 뒤 그의 집은 몇차례 그 인근 일대에서 이사다녔다.

아버지는 하급 군관 생활에서 물러난 뒤에 말총으로 체를 만드는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8살 김상옥은 아버지의 공장에서 체를 만드는 노동자가 되었다. 생존을 위한 일이라 학교 근처도 갈 수 없었다. 14세 때부터는 대장간에서 소나 말의 발굽을 갈거나 새로 박아주는 일을 했다. 그즈음 배움에 목말랐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동대문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결혼식도 동대문교회에서 했다.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표석 종각역 8번 출구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청년 노동자, 독립운동에 눈을 뜨다

낮에는 대장간 노동자로, 밤에는 각종 학교의 야학(夜學)에 다녔다. 일부 야학은 그가 주도해 만들기도 했다. 22세에는 YMCA 청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훗날 3‧1운동 때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와 인연을 맺었다.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목사와도 인연을 맺었다.

22세에는 동대문 근처에서 기독교서점을 차렸렸고, 23세 때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을 돌며 약과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행상을 했다. 그 해 가을 자신이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열었다.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립, 다른 한 편으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다.

24세에는 결혼을 했고, 한편으로는 사업을 확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북 풍기에서 서울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비밀결사 대한광복단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했다. 27세 때에는 사업하면서도 전남 보성군 조성면에 있던 조성헌병대를 기습하고, 반민족자 2명을 처단했다.

28세에는 자본가로서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항해 국산품 장려운동과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했다. 말총모자를 개발해 사업가로도 성공했다.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과도 자본가‧경영자 김상옥이 아닌 그 이상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자신은 자본가이고 경영자였으나 자신의 공장 노동자를 위해 직공조합을 만들어 권익을 보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30세이던 1919년에는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자본가, 경영자가 아닌 민족독립운동가로 완전히 변모했다. 3.1운동 때는 일제 경찰에게 쫓기며 칼에 찔리려던 여학생을 구출하고, 일본도를 빼앗기도 했다. 그가 빼앗은 일본도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4월 1일에는, 그가 다녔던 동대문교회 안에 있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해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간행하고, 항일전단지를 제작‧배포했다.

매일신보 1919년 11월 5일 체를 만드는 노동자 김상옥의 독립운동 기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그는 지하신문과 각종 독립운동관련 문서 발행을 위한 재정 지원을 물론 배포를 지휘했다. 9월에 체포되어 40여 일 동안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 뒤 평화적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9월, 65세의 강우규 의사(姜宇奎, 1855~1920)의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척살을 위한 폭탄 투척 의거가 일어났다.

그에 영향을 받은 김 의사는 1920년 5월 무장투쟁을 위한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했다. 실행을 위해 6월 하순부터 사격 연습을 했다. 7월 하순에는 5발 중 3발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더 나아가 10발 중 9발을 명중시키는 수준이 되었다. ‘암살단’ 운영과 실행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김 의사는 친일파 박영효(朴泳孝, 1861~1939)를 찾아가 설득해 두 차례에 걸쳐 자금을 얻어내기도 했다. 또 훗날 두산그룹의 창업자가 된 박승직(朴承稷, 1864~1950)에게도 자금을 융통하기도 했다. 박승직은 김 의사가 장렬히 전사한 뒤에도 경찰 몰래 김 의사의 유족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총독과 관료를 제거할 준비를 하던 중에 몇몇 동료가 체포되면서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이후 2차례의 망명을 하게 된다. 1920년부터 1921년 7월까지 모두 3차례의 망명과 귀환 과정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상해에서 같은 방식의 무장투쟁을 하고 있던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에 참여했다. 상해 망명시절에는 사격 연습을 했다. 이때는 5발 중 5발을 명중시켰는데, 3발은 사격지 흑점 중앙에, 2발은 흑점에 맞았다. 백발 백중의 특등사수가 되어 있었다. 또 상해에서는 사랑하는 동지 장규동의 시신을 안치할 관 대신, 동지를 죽게 만든 일제에 복수를 하기 위해 권총을 사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천명(天命)을 따라 산 하늘의 사자(使者)

34세인 1922년 12월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뇌부(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과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척살을 협의했다. 그는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그 직후 동지 안홍한과 함께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에게 받은 권총 3자루, 신익희(申翼熙, 1894~1956)에게 받은 권총 1자루, 임시정부에서 얻은 대형폭탄 2발, 소형폭탄 2발, 탄약 8백발을 갖고 서울로 몰래 들어왔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의 핵심 기관인 종로경찰서 폭파와 일제 수괴인 조선 총독을 제거할 계획이었다. 상해에서 돌아올 때, 동지들에게 “실패하면 다음 세상에서 봅시다.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포로는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 첫 계획을 실행했다. 종로경찰서 서편 창문에 폭탄을 던졌다. 일제는 3‧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라는 간교한 위장술을 펼치고 있었다. 민족정신을 훼손하고, 독립운동을 무력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때 그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오랜 폭압과 절망, 생활고 속에서 침략자의 실체를 잊고 있던 민족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침략자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조선인이, 조선인의 마음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 투척으로 일제 경찰과 친일신문 일제경찰과 매일신보사의 사원 등 10여 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 직후 그는 용산 후암동에 있던 매부 고봉근의 집에 다시 몸을 숨겼다. 다음 목표물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척살 때문이다. 사이토가 17일 일본제국의회 참석을 위해 서울역에서 동경으로 출발할 때, 저격하기 위해서 서울역에 가까운 후암동 매부집을 선택했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매부집이 일제 경찰 17명에 의해 기습‧포위되었다. 김 의사는 일제 경찰 4명을 사살했다. 포위망을 뚫고 맨발로 탈출했다. 그는 이태원을 거쳐 남산에 올라 석호정을 거쳐 장충단으로 내렸다. 이 때 권총 2자루를 장충단 다리 옆 축제 밑에 숨겨놓았다. 다시 하왕십리 안장사(安藏寺)에서 양말과 짚신, 승복을 얻어 입고 왕십리, 마장동 개천, 청량리, 영도사(永道寺) 뒷고개, 수유리 이모집으로 들어갔다. 해질 무렵 다시 동소문을 겨쳐,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 충신동을 지나 효제동 자신의 생가 옆집인 동지 이혜수의 집으로 숨었다.

일제 경찰은 다시 김 의사가 은신하고 있던 이혜수의 집을 알아냈고, 1월 22일 새벽 경찰과 헌병 1천여 명이 4중 포위를 시작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 김상옥 종로 효제동 전투 기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1대 1000, 서울 한복판의 총격전, 쌍권총 김상옥 의사

김 의사는 홀로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이혜수의 집과 자신의 집 등 이웃집 몇 집을 넘어 다니며, 3시간 반에 걸쳐 1대 1천의 시가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제 경찰은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 의사는 탄환을 다 소모하고, 오전 7시 무렵 마지막 1발의 탄환으로 천명(天命)을 선택했다. 그의 죽음은 일반적인 자결이 아니다. 그의 선택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살았던 삶의 결과이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자살’은 아예 논외다. 훨씬 더 고결한 죽임은 ‘자결’과 같은 표현도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면서 조국과 민족, 자신의 신앙에 목숨을 걸고 살았던 김 의사이다. 천 개의 목숨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천 개의 목숨을 똑같이 썼을 사람이다. 천 번의 죽음 앞에서도 똑같은 죽음을 선택했을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스스로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 자체가 불의한 세력에 대한 저항이며 응징이다. 그는 하늘이 이 땅에 내려 보낸 사자(使者)이다.

35살의 청년, 김 의사의 시신에는 11발의 총상이 있었다. 10발은 일제의 총알, 1발은 자신의 하늘이 준 총알이다.

김 의사가 서울과 상해에서 긴밀하게 인연을 맺었던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선생은 1925년 상해에서 의사 김상옥전을 저술해 그의 업적을 알리고, 혼령을 위로했다. 또 1949년에 간행된 김상옥열사의 항일투쟁실기 서문에 다음과 같이 김상옥 의사를 평가했다.

“김선생(김상옥)은 한 사람의 노동자였다. 한 사람의 사랑하는 자였다. 한 사람의 장군이었다. 한 사람의 의협사(義俠士)였다. 한 사람의 혁명가였다. 한 사람의 신자(信者)였다. 또 한 사람의 영웅이었다.”

그는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쉬고 계신다,

하늘의 아들 김상옥 의사와 그의 동지 이혜수

김상옥 의사와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늘 주연만, 주인공만 기억한다. 그러나 조연과 엑스트라 없이 주연이 주인공이 빛날 수는 없다. 또 전체를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연처럼, 스쳐가는 엑스트라처럼 보일지라도 그들 모두가 주연이고 주인공이다.

그 중 한 분인 이혜수 의사(李惠受 義士, 1891~1961)에 대해서 간략히 그녀의 삶을 전한다. 총격전 자체만으로 보면 김 의사가 주인공이나, 그녀의 삶을 보면, 그녀 역시 김 의사만큼, 다른 면에서는 김 의사 그 이상의 위대한 영웅이다.

한성고등여학교(경성제일여자보통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 김 의사의 효제동 생가 옆집에 살았다. 김 의사와는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동지가 되었다. 1919년에는 김마리아(1892~1944), 신의경(辛義敬, 1898~1988) 등과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게 보냈다. 또 애국지사들과의 비밀연락을 담당했다.

1921년, 김 의사가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할 때 그들의 숙소, 회의장소, 의복, 자금을 제공했다. 김 의사가 상해에 두 번이나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를 숨겨주고 비밀 연락 등 뒷바라지를 했다.

1923년 1월 17일, 김 의사가 후암동에서 기습당하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자 1월 22일 일제 경찰이 공격해 왔을 때까지 숨겨주었다. 또 김 의사가 후암동에서 탈출하면서 장충단 다리 축대 곁에 권총 2자루를 숨겨놓은 것을 찾아다 김 의사에게 전달했다. 그 총으로 인해 김 의사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전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김 의사가 전사하자 이혜수 의사의 가족들은 김 의사를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모두 붙잡혀 갔다. 그녀의 가족은 석방되었으나, 그녀는 경찰서에 갇혀 고문을 당했고 그로 인해 누운채 재판을 받았다. 고문으로 다리가 불구가 되어 1년 동안 보석 치료를 받고, 그 뒤 다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을 해야 했다.

화가 구본웅이 목격한 김 의사의 전투

일제강점기, 시 오감도(烏瞰圖)와 소설 날개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의 단짝이었던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김 의사의 효제동 총격전을 직접 목격했다. 그의 유화집인 허둔기에는 그가 17살 때 목격했던 김 의사의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과 글이 들어있다. 그 펜화에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아침 7시. 찬바람. 섣달이 다가도 볼 수 없던 눈이 정월들자 나리니 눈바람 차갑던 중학시절이 생각이 난다. 아침 7시 찬바람, 눈싸힌 덜판, 새로진 외딴집 세 채를 에워싸고 두 겹 세 겹 느러슨 왜적의 경관들. 우리의 의열 김상옥 의사를 노리네. 슬프다 우리의 김 의사는 양손에 육혈포를 꽉 잡은 채. 그만-- 아침 7시, 제비(김 의사의 별명을 제비라 하여 불렀섰음) 길을 떠낫더이다. 새봄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서.”

종로경찰서 미와 형사부장의 참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 가장 악명높았던 일본인 고등계 형사부장 미와 사부로(三輪和三郞, 1884)는 김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종로경찰서 소속이었다. 그는 폭탄 투척 사건을 수사하는 특별수사대의 대장이었다.

김 의사가 은신한 용산 후암동을 찾아내 습격한 것도 그였고, 김 의사의 동료 독립운동가 전우진을 고문해 김 의사가 숨어 있던 효제동 이혜수 집을 찾아낸 것도 그였다.

그런 그가 2년 뒤인 1925년 김 의사 3주기에 당시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된 김 의사의 묘소를 찾아가 명복을 기원했다. 일제의 신문이었던 조선신문(朝鮮新聞)(1925.1.24.)에는 정화(淨化)된 영혼을 위로하는 한 무리. 김상옥의 3주기에. 미와 경부(警部) 등이 기도하다란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김 의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종로경찰서 미와 사부로 형사부장 등이 회기리 공동묘지에 있던 김 의사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는 내용이다. 기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3년 전 1월 22일 오전 7시 반, 경찰 무리에 포위되어 총격전을 하다가 총탄에 맞아 죽은 의열단의 우두머리 김상옥이 죽은지 3년을 맞았다. 묘 앞에서 예배하는 인연이 있는 사람은 그 당시 책임을 지고 담당해 수사를 했던 민첩하고 번개 같았던 명성을 지닌 종로경찰서 고등 주임 미우라 경부와 당시 팔다리 같이 일했던 쿠로메마(黑沼), 요시노(吉野), 시나가와(品川) 같은 저명한 형사들이 있었다. 4평 정도의 구역 가운데 흙을 둥글게 만들어 놓았다. (김 의사의) 아들 태용이 심어 놓은 청자색의 묘표(墓標)에는 ‘김해 김공 상옥지묘(金海金公金相玉之墓)’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는 ‘1922년 임술 음(陰) 12월 초6일 망(亡, 사망)’으로 적혀 있다. 맹호(猛虎)같이 두려움 없이 신출귀몰했던 김상옥도 죽으니 역시 부처의 자비에 의지하는 선례이다. 반역의 피를 불태워 음모를 기획해 폭탄을 던져 다무라(田村) 부장을 사살(射殺)했던 김상옥도 죽었으니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그를 조문하는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비치었다. 서로 싸웠던 것은 과거의 꿈 같았다. 한 쪽(김 의사)은 민족정신에 맹목적으로 나아갔고, 다른 한쪽은 국가정책(일제)의 대방침에 따라 싸워야 했다. 죽음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낸다.”

일제 경찰, 그것도 김 의사와 싸웠던 그들이 김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묘소에 갔다. 김 의사의 전투를 그들은 비방하지 않았다. 기사에서는 김 의사의 전투를 “민족정신” 때문으로 긍정하고 있다. 일본인, 특히 그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들도 김 의사에 감동한 결과이다. 처음에 이 기사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또 번역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도 의심했다. 그러나 이 기사와 번역 모두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김 의사처럼 평가한 독립운동가는 안중근 의사 정도일 듯하다. 그만큼 김 의사의 전투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재 그가 태어났고, 전투했던 현장에는 아무것도 없다. ‘김상옥길’이란 명칭과 인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세워진 동상만이 있을 뿐이다.

2년 뒤인 2023년이면 김상옥 의사의 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김상옥 의사가 태어난 곳, 활동한 곳, 마지막 전투를 했던 효제동 일대에 김 의사를 널리 알리는 표석은 물론이고, 기념관이 세워졌으면 한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안에서. 특히 서울 안에서 김상옥 의사의 전투만큼 엄청난 전투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평범했으나, 가장 비범한 영웅으로 거듭 태어난 인물이다. 누구라도 김 의사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김상옥 의사의 삶을 더 깊이 알고 싶은 분은 김상옥 평전(이정은, 민속원, 2014년)을 참고하면 된다.

* 동부학당 터 표석 : 종로구 종로6가 70. 정자 앞 율곡로 옆 보도

* 김수영 종로 6가 옛집 : 종로6가 116. 그의 고모집은 117번지

* 북평관 터 표석 : 종로6가 20-2

* 김상옥 의사 영덕철물상회 터 : 동대문구 창신동 487번지

* 김상옥 의사 탄생지 : 효제동 72번지

* 김상옥 의사 효제동 항거 터(동지 이혜수의 집) : 효제동 72, 73, 74, 75, 76-2번지

* 김상옥 의사 전사 터 : 효제동 72번지와 76-2번지 사이

*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표석 : 종로구 종로 65. 종각역 8번 출구 앞 보도

* 김상옥 의사 폭탄 투척 일제 종로경찰서 터 : 종로구 종로 65 장안빌딩

* 김상옥 의사 용산 항거 터 : 용산구 후암동 304

* 김상옥 의사 동상 : 동숭동 1-124 마로니에공원 안

박종평 기자

[출처] 일요서울 2021.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