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자코바이트 운동

Jimie 2024. 5. 15. 05:02

자코바이트(영어Jacobite 재커바이트 / 자코바이트)는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의 반혁명 세력의 통칭이다. 그들은 추방된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2세와 그 직계 남손을 정통 국왕이기 때문에 복위를 지지하며 정권을 동요시켰다. 자코바이트의 어원은 ‘제임스’(James)의 라틴어 이름인 야코부스(Jacobus)에서 나온 것이다.

 

개요

록 내란이 끝났지만 17세기 후반은 여전히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왕국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혼란의시기였다. 잉글랜드 연방은 찰스 2세의 왕정복고와 함께 끝났다. 그의 치하에서 잉글랜드 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성공회가 재정비되었다.

1685년 찰스 2세가 고지혈증 의심과 노년이 되어 결국 사망을 하였다. 후임은 동생 제임스 2세가 우선적으로 왕으로 부임하였다.

 

1688년 명예혁명과 그 체제는 제임스 2세를 프랑스로 추방했다.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남편이었던 네덜란드 총독 빌렘 3세(제임스 2세의 조카)가 네덜란드로 초빙해 메리 2세를 윌리엄 3세와 결혼시켜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의회가 왕위 계승권을 1701년 왕위계승법에 의해 규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인 의회가 왕위 계승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제도였으며,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의회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주류인 개신교 국가였지만, 제임스 2세는 가톨릭 교도였다는 것, 또한 당시 비 국교회 신도가 정부 관직에 진출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 왕의 국외 추방과 의회가 왕위 통제를 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풍조도 있었다.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온도차는 있었지만, 특히 제임스 2세와 그의 적자(남계 후손)를 영국 왕으로 복위시켜야 한다고 제임스를 지지한 사람들을 자코바이트라고 불렀다. 또한 그들이 취한 정치적, 군사적 행동은 자코바이트 운동이라고 불렸다.

코바이트는 명예혁명 이후 반세기 동안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이나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운동은 명예혁명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때로는 정권을 동요시켰다. 그러나 운동은 점차 용두사미가 되어 갔고, 로버트 월폴 등 휘그당의 정략으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자코바이트의 지원 세력

 

 

윌리엄 3세 메리 2세

 

명예혁명 후 왕위 계승은 세습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며, 의회가 왕위 계승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뿌리깊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영국 내외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었고, 제임스 2세와 그의 후손이 핵이 되었다. 자코바이트는 특히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강한 잉글랜드를 외부에서 엿보는 형태가 많았다. 여기에서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그리고 영국 이외의 자코바이트와 지원 세력의 이데올로기 등에 대해 언급한다.

잉글랜드 자코바이트

잉글랜드 내에서 자코바이트가 고도로 조직화된 적은 별로 없었지만, 윌리엄 3세나 메리 2세 두 군주보다 제임스 2세를 여전히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특히 보수파인 토리당에 많았다고 하는데 그들 중에서도 공공연히 자코바이트라고 천명하는 사람, 틈새에 끼어서 고민하는 사람, 명예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으로 엇갈렸다.

이것은 토리가 세습 군주 정부의 원칙을 존중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적자 상속을 주장하는 자코바이트의 입장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편 토리는 국교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성격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를 왕으로 모시는 것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그러나 의회의 반대 세력인 휘그당의 로버트 월폴이 추진한 ‘자코바이트는 위험 분자’라는 캠페인으로 국제 정세에서 공공연히 자코바이트라고 칭하는 것은 점차 정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가 되었다.

또한 이들과는 별개로 그때그때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자와 실지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 휘그당, 토리당에 관계없이 망명한 스튜어트 가문에 희망을 걸고 자코바이트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자코바이트

자코바이트의 최대 지지 기반은 스코틀랜드, 특히 스코틀랜드 고지였다. 원래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뿌리 깊은 대립 의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도 스코틀랜드인이 제임스에게 공감했다. 특히 1707년에 비준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법은 역사적, 종교적 갈등을 억제하고,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 한 것이지만, 곧 스코틀랜드 측이 기대한 만큼의 이익을 나지 않자 잉글랜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1715년의 반란에서 존 어스킨 백작이라는 지도자를 얻어 스코틀랜드의 대부분이 반란군의 손에 떨어졌다.

한편 아일랜드에서는 종교적 측면에서 제임스를 지지했다. 청교도 혁명 이후, 아일랜드는 소수의 국교회 신자가 다수의 가톨릭 신자를 지배하는 구도가 성립되었고,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며 자코바이트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제임스 2세로부터 아일랜드의 통치를 위임받은 코넬 백작 리처드 탈보트는 가톨릭 지배의 침투와 자코바이트의 확산에 힘쓰며 아일랜드의 대부분을 제압하고, 아일랜드를 자코바이트의 거점으로 바꾸어 갔다.

해외 지원

제임스 2세는 가톨릭 교도였다. 따라서 카톨릭 국가이자, 9년 전쟁에서 영국의 적대국이기도 했던 프랑스는 자코바이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루이 14세는 이 지원에 열성적이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자코바이트 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루이 14세 사후에는 자코바이트는 스튜어트가에 냉담해진 프랑스를 대신하여 이탈리아 여러 도시와 스웨덴스페인 등이 뒷받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