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시원한, 너무나 시원한 군복 '킬트(Kilt)' (상)

Jimie 2024. 5. 15. 04:57

시원한, 너무나 시원한 군복 '킬트(Kilt)' (상)

남보람입력 2019. 8. 20. 15:03

[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106] 1.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된 부대 '검은 정찰대(Black Watch)'

 

17세기에 창설된 영국 제42보병연대는 스코틀랜드 동북부 고지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로 '검은 정찰대(Black Watch)'란 별칭을 갖고 있었다. 검은 정찰대는 1881년 영국군 구조개혁 때 스코틀랜드 왕실 연대 제1대대로 재편되었다. 1931년에는 연대로 증편되었고 현재는 단독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여단 규모(연대전투단)로 운용되고 있다.

 

검은 정찰대는 두 가지로 유명하다. 하나는 전투력이다. 이들은 영국이 참전했던 전쟁에서 주로 선봉에 서왔으며 현대에도 1998년 코소보 분쟁, 2003년 이라크전쟁에서 큰 전과를 세웠다.

 

다른 하나는 제식 복장이다. 검은 정찰대는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인 킬트(Kilt)를 입었다. 킬트를 입은 이유는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킬트는 전투에 부적합한 옷이었다. 18세기의 기록을 보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킬트를 벗었다'고 적혀 있다.

18세기 중반의 검은 정찰대를 묘사한 작자, 시기 미상의 삽화/출처=ⓒgenuinearmysurplus.co.uk

 

 

2. 대(大)킬트와 소(小)킬트

전투 전에 벗어야 했던 킬트는 '대킬트(great kilt)'다. 격자 무늬의 큰 천을 몸에 통째로 두른 후 두꺼운 벨트로 묶어 고정하는 방식으로 입었다.

존 라이트의 1683년 작, "뭉고 머레이 경의 초상". 그림 속 인물이 입고 있는 대 킬트는 특별히 길이를 5미터 정도로 늘려 맞춘 것이었다./출처=ⓒnationalgalleries.org
18세기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롭 로이(1995)"에서 '대 킬트'를 입고 있는 리암 니슨(롭 로이 역)의 모습/출처=ⓒIMDb

 

그런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형태의 킬트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킬트는 소위 여학교 교복 치마 같은 것이다. 이를 '소킬트(small kilt)'라고 한다. 18세기 초반 한 사업가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전한다. 소킬트는 몸 전체에 감는 형태의 긴 천을 짧게 잘라내어 허리 아래에 한 번만 두를 수 있게 한 것이다. 나중에는 두르고 고정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기성복처럼 치마 형태로 재단하여 편의성을 증대시켰다. 일설에 '소킬트'의 아이디어가 검은 정찰대로부터 왔다는 의견도 있다. 17세기 말부터 이미 검은 정찰대가 전투에 적합하게 옷감을 짧게 잘라낸 킬트를 입었고, 이것이 민간 복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3. 스코틀랜드 저항의 상징이 된 킬트

영국은 1746년 '복식법(Dress Act)'이란 것을 만들었다. 주요 내용 중 하나는 킬트를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전통 복장 착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1716년부터 스코틀랜드 부족에 강제된 '무장해제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법에는 킬트를 입다 발각되면 6개월을 구형하고 재차 위반하면 해외로 추방하겠다고 명시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바로 '자코바이트 봉기(Jacobite Risings)'이다. 자코바이트 봉기는 스코틀랜드의 왕권 탈환 전쟁이었다. 실각한 스코틀랜드계 왕 제임스 2세의 복권을 주장하는 일련의 무리가 1696년 윌리엄 3세 암살을 기도한 것을 시작으로 장장 50여 년에 걸쳐 크고 작은 분쟁을 벌였다. 자코바이트는 무력집단을 형성하여 1716년 잉글랜드를 공격했고 1722년에는 잉글랜드 은행을 점거하여 내부 붕괴를 획책했다. 1745~1746년에 프랑스를 끌어들여 잉글랜드를 공격한 것이 분수령이자 마지막 대규모 활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무력집단은 킬트를 입고 투쟁했다. 킬트 착용은 가톨릭과 스코틀랜드에 대한 충성,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다.

 

<데이비드 모리에의 1746년 작, "컬로든 전투(1745)". 좌측 진영이 재커바이트 군대로, 킬트를 입고 싸우고 있다./출처=ⓒwww.rct.uk

 

 

자코바이트 봉기가 실패한 후 잉글랜드 왕실은 스코틀랜드에 대한 징벌적 조치를 내렸고 그중 하나가 '복식법'이었다. 스코틀랜드 고유의 역사와 정체성을 아예 드러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복식법은 스코틀랜드인의 격렬한 반대, 역효과라는 자체 평가에 의해 1782년 철회되었다).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elyzcam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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