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Armenian genocide

Jimie 2024. 5. 13. 04:05

류지미 2023. 9. 29. 14:40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Հայոց ցեղասպանություն
Armenian genocide

 

The Armenian genocide was the systematic destruction of the Armenian people and identity in the Ottoman Empire during World War I. Spearheaded by the ruling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 (CUP), it was implemented primarily through the mass murder of around one million Armenians during death marches to the Syrian Desert and the forced Islamization of others, primarily women and children.

 

Before World War I, Armenians occupied a somewhat protected, but subordinate, place in Ottoman society. Large-scale massacres of Armenians had occurred in the 1890s and 1909. The Ottoman Empire suffered a series of military defeats and territorial losses—especially during the 1912–1913 Balkan Wars—leading to fear among CUP leaders that the Armenians would seek independence. During their invasion of Russian and Persian territory in 1914, Ottoman paramilitaries massacred local Armenians. Ottoman leaders took isolated instances of Armenian resistance as evidence of a widespread rebellion, though no such rebellion existed. Mass deportation was intended to permanently forestall the possibility of Armenian autonomy or independence.

 

 

On 24 April 1915, the Ottoman authorities arrested and deported hundreds of Armenian intellectuals and leaders from Constantinople. At the orders of Talaat Pasha, an estimated 800,000 to 1.2 million Armenians were sent on death marches to the Syrian Desert in 1915 and 1916. Driven forward by paramilitary escorts, the deportees were deprived of food and water and subjected to robbery, rape, and massacres. In the Syrian Desert, the survivors were dispersed into concentration camps. In 1916, another wave of massacres was ordered, leaving about 200,000 deportees alive by the end of the year. Around 100,000 to 200,000 Armenian women and children were forcibly converted to Islam and integrated into Muslim households. Massacres and ethnic cleansing of Armenian survivors continued through the Turkish War of Independence after World War I, carried out by Turkish nationalists.

 

This genocide put an end to more than two thousand years of Armenian civilization in eastern Anatolia. Together with the mass murder and expulsion of Assyrian/Syriac and Greek Orthodox Christians, it enabled the creation of an ethnonationalist 종족민족주의자 Turkish state, the Republic of Turkey. The Turkish government maintains that the deportation of Armenians was a legitimate action that cannot be described as genocide. As of 2023, 34 countries have recognized the events as genocide, concurring with the academic consensus.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20세기의 최대도살중 하나인 아르메니아대학살은 150만명을 도살한 사건으로 세계를 경악시킨다.

유럽의회는 후에 이도살을 인성에 위배된 만행으로 규정한바 있으며 유엔은 종족멸절행위로 규정하였다.

이사건은 20세기 3대학살로 이 대학살의 괴수를 찾을수 없고 누구도 승인하지 않아 나치의 대학살에 비견되는 것이나 이제는 잊혀진 대사건이다.

 

아르메니아는 외코카서스남부의 내륙국가(터키의 동부) 로 2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세월이 타민족에 의해 점령된 역사로 15세기중엽에는 오스만투르크제국에 탄병된다.

오스만제국은 터키의 돌궐인들이 세운 다민족복합국가로 줄곳 아르메니아는 제국내에서  피압박상태에 놓였다.

 

아르메니아는 애초 기독교국가로 오스만제국은 무슬림국가로서 종교신앙이 서로 달라 대도살의 화근이 생긴 것이다.

 

16세기 오스만제국은 페르시아와 교전으로 아르메니아는 동서로 분리점령되고 동부는 이란이, 서부는 오스만제국이 점령한다.

19세기에 이르러는 러시아가 페르시아의 수중에서 동부아르메니아를 탈취하여 오스만제국과 대치한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에 의해 분할되는데 1914년 오스만제국은 제1차대전에 참가하여 아르메니아인들도 압박에서 벗어나 민족해방투쟁을 시작한다.

아르메니아는 소련이 자신들의 자치를 이루게 하도록 희망하여 1차대전중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제국에 대패하는데 오스만의 국방장관이 아르메니아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협조를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그는 아르메니아인 때문에 패전한 것이라 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무기를 모두 회수하고 모두 노동영으로 수용한다.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의 비극이 시작되는데 1915년 4월 19일 터키의 총독이 징병을 이유로 아르메니아인 4000명을 징집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거부하자 반란이라 규정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기 시작한다.

다음날부터 무장충돌이 벌어져 아르메니아인들이 1500명이 학살당하고 아르메니아인들도 무장하여 3만명이 참여하고 난민 15000명이 생겨난다.

결국 러시아군이 간섭하여 구해주는데 충돌은 끝나지만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와 결탁한 아르메니아에 대한 분노로 더욱 잔인한 대학살극을 시작한다.

 

4월 2일 밤 오스만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의 정치문화정영층을 650명이나 체포하여 즉결처분한다.

 

 

이후 오스만군의 아르메니아장교와 사병들도 참살하고 오스만의회도 임시구축법을 제정하여 정부나 군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죽여 국가안전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는 합법적인 도살의 빌미를 주어 5월말 100만명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의 메소포타미아사막으로 압송하여 버리고 만다.

이들은 아무런 물자보급도 없어 질병과 기아로 사막에서 죽어가고 부녀들은 사방으로 팔려간다.

 

더구나 나머지인원들을 총살 소사등으로 시체와 피가 강을 이루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압송한 오스만군대는 총살 소살 강간등으로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이는 인성을 포기한 만행으로 오스만정부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25개의 수용소를 세우고 유배자들을 이전시켜 혹형과 치욕스런 행동을 하고 70만명은 행방불명이 된 것인데 이송후 종적이 사라진 것이다.

1916년 4월 나머지 수용소도 모두 청소하여 사료에는 1915-1916년사이에 오스만제국내 아르메니아인중 200만명이 수용되어 150만명이 학살된 것이다.

이후 수십만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탈출하여 외국으로 도주하여 각국인사들도 오스만의 학살에 아르메니아인들을 동정한다.

 

 

당시 유럽의 각국들은 세계대전에 몰입하여 큰 관심을 둘수 없어 대도살은 점차 확대된 것이다.

1차대전이 끝난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각국대표들은 아르메니아대학살의 죄상을 견책하게 된다.

이러한 국제압력과 기독교국가들의 항의로 오스만제국의 법원은 대도살의 책임자를 내각의 장관들과 정당영수들로 보고 궐석재판을 한다.

이들은 사형 혹은 무기징역에 처해지는데 이미 국외로 도주하고 말아 아무런 의미가 없게된다.

 

 

이대도살은 히틀러를 고무시켜서 2차대전시 유태인들을 600만명이나 학살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히틀러는 유태인에 대한 민족멸절시 아르메니아의 대학살을 강조하여 죄의식을 갖지 못한다.

1915년부터 시작되어 1923년사이에 오스만제국의 해체과정에서 신터키공화국이 들어서는데 역대의 터키정부는 이도살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사태를 인정하는 각국에 항의하고 국내에서도 도살에 대한 언급자는 형법상 제301조로 처벌한다.

이는 터키인에 대한 모욕죄규정으로 필수적으로 구속하는 조항으로 2011년 노벨문학상수상자인 오르한 파묵도 이조항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언론의 집중포화대상이 된다.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대학살은 1차대전으로 제국해체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터키인들의 정치수단이 된 것이다.

본질상 무자비한 민족멸절사건인 대학살은 원인도 다양하고 종교적인 갈등과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보복인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진압으로 러시아의 지원과 동종교인 그리스인들의 동조로 동유럽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동정하고 협력하자 이를 막으려 한 조치이기도 한다.

더구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통치구로 도주하는 것을 막으려 하여 전쟁에서 위기에 처한 오스만제국인들의 공포가 만든 참극이다.

 

 

지금 지구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수백만이 흩어져 살고있어 당시의 도주자들이며 고대부터 상업민족이어서 중동 유럽 인도등에도 고아르메니아인 후손들이 많다.

이제 2천년만에 복국이 되었는데 아제르바이잔과 끝없는대결로 전쟁상태이다.

 

아제르인들은 후에 이땅에 이주해온 돌궐족들로 중세의 대페르시아제국을 정복하여 사산조페르시아문화의 계승자가 된 이들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가해자; 통일진보위원회 및 오스만 제국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일련의 집단학살 사건을 말한다. 근대적 의미로서 최초의 '제노사이드'이자[4] 나치 독일 홀로코스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연구된 학살이지만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이유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건이기도 하다. 희생자 수는 주장하는 측마다 다르나 대략 48만에서 1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튀르키예 역사 위원회장 유수프 할라치오을루(Yusuf Halaçoğlu)의 2008년 공식 통계는 413,067명이며 아놀드 토인비는 100-120만, 미국정부의 통계로는 약 48만 6000명, 가톨릭 대백과사전은 약 6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듯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조사 주체에 따라 다르게 보고 있고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로는 테슈킬랴트 마흐수사(Teşkilât-ı Mahsusa)의 문서고가 1차 대전 및 독립전쟁 전후로 소실되어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구체적인 행정내용들이 문서상으로 보존되지 않음을 들 수 있다. 더욱이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방행정력은 부실하여 학살 사건 이전부터 이미 인구통계 등이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오스만 제국 중앙정부는 전쟁 직전까지 지방 인구과 징병 가능한 청년인구의 파악조차도 프랑스와 영국 통계기관의 도움을 받던 게 현실이었다. 두번째 문제로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범위와 성격 그리고 기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가령 학살로 인해 발생한 피난민이 피난길이나 수용소 등지에서 질병이나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하게 된 것을 아르메니아 학살의 범주 내로 보느냐 아니냐 등의 관점 차이로 학살의 규모가 더 커지거나 줄어들 수 있다.

후술하듯 아르메니아인들만 살해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 내의 여러 민족들이 서로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적으로 종교를 떠나 튀르크 민족주의에 반항하는 민족에게는 자비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아시리아인  아랍계 기독교인, 무슬림이라고 해도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희생자보다는 수가 적을지언정 수십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 그래서 아랍인들도 현재까지 튀르키예에 대한 감정이 영 좋지 않다. 이 학살 이후 흑해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로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홀로코스트 과정에서도 유대인 외에 많은 슬라브인, 집시, 장애인, 반정부 인사들이 학살당했으나 세간에는 유대인만 피해자로 알려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휘말려 무분별하게 피해를 입은 아랍권 나라들에서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나 대학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아르메니아인들만 피해자는 아니거늘 마치 아르메니아인만 죽었다는 듯이 영어로 쓰고 왜 이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면서 언짢게 여긴다. 영어 위키백과만 해도 아랍인·쿠르드인들에 대한 학살[5]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작 초루흐 강 계곡 학살(Massacres in the Çoruh River valley)이라고 표현하며 이조차 자세히 소개된 것도 아니라 이 글 제목으로만 두루뭉실하게 대충 언급하는 수준이다. 이 명칭을 아랍 측에서 무척 안 좋게 여기는데 이는 일개 한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로 이동하던 아랍계 무슬림들을 초루흐 강 계곡에서 쏴죽이거나 밀어 강물에 떨어뜨려 죽인 학살 사건 하나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관련 학계에선 근래 들어 아르메니아뿐만 아니라 오스만 붕괴기에 총체적이고도 다양한 집단을 휩쓸었던 국가폭력 전반을 통틀어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란 포괄적 개념을 밀어주는 편이다.# 비단 순수한 학술적 영역뿐만 아니라 이 참혹한 역사가 근현대 민족, 국가관 관계에 끼치는 역학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아르메니아-오스만 제국(現 튀르키예) 양자 간 관계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꼈던 알레비파 신자, 그리스인, 아랍인, 폰토스 그리스인, 쿠르드인, 아제르바이잔인, 조지아인 등 수많은 집단간 다각적 관계를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비극, 100년 전 희생자 기리는 아르메니아인들

 입력: 2023-04-24 17:43 이규화 기자
 

아르메니아인들이 지난 23일 수도 예레반에서 '아르메니아 학살 108주년'을 추념하는 횃불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AP 연합뉴스

 
4월 24일은 아르메니아 학살 10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날을 추념합니다. 100여 년 전 옛 오스만제국(현 튀르키예) 내 각지에서는 아르메니아인과 아랍계 무슬림, 쿠르드인, 그리스인 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집계와 추산이 다르지만 주로 아르메니아인을 중심으로 50만에서 최대 150만 명이 튀르키예 민간자경단과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튀르키예는 일방적 학살을 부인하고 희생자 규모도 축소합니다. 일본이 중국을 식민지배할 때인 1937년 남경(난징)에서 일어난 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것과 같은 입장이겠지요.

대학살 추념일 하루를 앞두고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AP통신에 따르면 23일 예레반에서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1915년부터 1917년 사이에 최대 150만 명이 살해된 제노사이드를 잊지 말자며 횃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아르메니아뿐 아니라 24일을 기해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사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아르메니아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특히 매년 이 즈음에는 제노사이드를 전후해 미국으로 이주해 주류 사회에 편입한 아르메니아 후손들을 중심으로 튀르키예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촉구합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기원을 파고 들면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스만-러시아 전쟁(1877년~1878년)에서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와 종교적으로 동질적인(러시아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제국에 등을 돌릴 것을 우려해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후 오스만제국의 주류인 투르크 무슬림은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 시기까지 40여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을 핍박하고 살해했습니다. 아르메니아 학살은 이렇게 뿌리가 깊은데 보통 아르메니아 학살이라고 하면 1915년부터 2년여간 이뤄진 20세기 초의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일련의 집단학살사건을 말합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20세기 들어 발생한 최초의 제노사이드였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에 대한 튀르키예 정부의 공식 입장은 계획적이거나 계획된 대량학살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세계 대전(1차대전)의 혼돈과 폭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제국의 쇠퇴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제국의 붕괴를 촉진하는 내부 반란을 획책해 그에 대한 대응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분리하려다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타 인종을 멸시하는 등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초한 성격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서방 국가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제사회는 이 사건을 집단 학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최근까지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21년 4월 24일이 되어서야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대량 학살로 인정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사회의 아르메니아인 커뮤니티의 힘이 작용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아르메니아계가 최소 50만명 이상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 외에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를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대량 학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에 대한 인식은 일부 국가와 튀르키예 관계를 긴장시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많은 튀르키예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이 사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정부에 책임을 묻기도 했습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묵도 그런 지식인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튀르키예 정부는 국가모독죄로 기소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아르메니아 학살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이규화 논설실장 [ 디지털타임스 ]




 
 
 

[월드리뷰 舊約 노아방주 기착한 ‘아르메니아 공화국’] “제2의 유대인…지구촌 디아스포라 민족”

남한면적 3분의 1 영토 ‘바다없는 내륙국가’
‘서방세계-러 균형외교’ 두루 국제기구 가입
“아르메니아 대학살…20세기 최초 인종청소”
‘세계 초유 기독교 국교공인’ 로마보다 앞서

  • 서울일보
  •  기자명소정현 기자
  • 입력 2023.07.06 11:30

◈ ‘코카서스 3국…산악국가’

(서울일보/소정현 기자) 국토 대부분인 86%가 산악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아르메니아 공화국’(Republic of Armenia)은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예레반’(Yerevan) 이다. 동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서쪽으로는 튀르키예, 북쪽으로는 조지아(Georgia), 남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국내에서 ‘코카서스(caucasus)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 국가는 소국이지만 인종·문화·종교적으로 차이가 크다. 한·중·일의 차이만큼이나 선명하다. 인종적으로 조지아는 코카시안 계통, 아제르바이잔은 투르크 계통, 아르메니아는 아리안 계통이다.

아르메니아의 영토는 남한 면적의 3분의 1 정도인 2만9743㎢이다. 인구는 279.1만(2021년 세계은행) 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966.51 USD(2021년 세계은행) 이다.

아르메니아인이 인구의 절대 다수인 97.9%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아르메니아어이다. 아르메니아어는 러시아, 튀르키예, 미국, 이란,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쓰는 경우도 많다.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통치를 200여 년간 받은 영향으로 러시아어도 널리 쓰이며 사실상 제2언어로 간주된다. 소수이지만 쿠르드(Kurd) 언어 사용자도 있다.

아르메니아는 평등·호혜·개방 등의 외교기본원칙에 따라 구(舊)소련의 여러 공화국은 물론 서방 각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소련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캐나다·중국 및 서유럽국가와의 경제·외교 관계를 중시한다. 국제연합(UN),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무역기구(ITO), IBRD(세계은행), 유럽안전보장회의(CSCE), 세계보건기구(WHO),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등의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있다.

한편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 아르메니아 안에는 러시아군 기지가 있다. 2002년 10월 7일에 창설된 옛 소련의 공화국 6개국의 집단안전보장 조직인 ‘CSTO’의 회원국이다. 2014년 10월 9일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에도 가입하였다. EAEU는 옛 소련 구성국 간의 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의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 5국’의 정치와 경제, 군사와 문화를 통합하는 국가연합이다.

지리적으로는 서아시아에 속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가깝고 각종 국제기구에서 유럽 소속 회원국으로 활약하고 있어 동유럽으로 보기도 한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아르메니아를 유럽으로 분류하여 아르메니아와의 관계는 유럽 부서(유럽국)에서 맡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1992년 2월 21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과는 같은 해 1992년 2월 13일 수교하였다.

정부 형태는 2015년 12월 개헌으로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다. 총리는 ‘니콜 파쉬냔’(Nikol Pashinyan) 이다. 입법기구는 임기 4년의 연임가능한 단원제로 의원 131명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바하근 하차투리안’(Vahagn Khachaturyan)이며, 국민투표에 의하여 선출되며 임기는 7년의 단임제이다.

 

◈ 비운의 ‘다이스포라 민족’

아르메니아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메디아(Media) 왕국, 페르시아 왕국, 오스만튀르크 제국 등 강성한 왕국들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만튀르크 제국 말기였던 1921년,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고, 그 이듬해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다가 소련 해체 후 1991년 9월 23일 독립국가인 아르메니아 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대다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피해 세계 각지로 흩어졌는데, 이것이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diaspora)’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튀르크의 집중 견제를 당한 것은 과거에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디아스포라’는 ‘흩어져 퍼트려진 상태’라는 뜻이다. 돌아갈 땅 하나 없이 세계 곳곳을 떠도는 상황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디아스포라’라고 하면 유대인을 연상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디아스포라 역시 그에 못지않다.

해외에는 아르메니아 인구의 2배 이상인 약 700만 명의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메니아의 인구는 300만 명 이하이지만 정작 미국과 프랑스, 이란,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미승인 아르차흐 공화국)과 러시아를 포함해 해외 70개국에 거주한다.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에 약 400만 명, 미국에 약 150만 명, 프랑스에 약 70만 명 정도가 거주한다. 이웃나라인 튀르키예와 이란에서도 여전히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아간다. 튀르키예는 5~7만, 이란 거주 아르메니아인은 10만~50만 정도이다.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다.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제국 내 모든 아르메니아 청년은 군대에 징집됐다. ‘붉은 일요일’로 명명된 1915년 4월 24일 오스만제국은 전시 상황 비상계엄령을 이용해 아르메니아 민족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 성직자, 경제인을 모아 모두 처형해 버린다.

이는 집단학살의 서막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메니아인 남자는 강제 징집돼 바로 총살되거나 징용을 당해 공사 현장에서 노동하다 집단 사살됐다. 남은 여성과 노인, 어린이는 척박한 시리아 사막으로 추방돼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오스만튀르크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와 가까워지자 당시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오스만튀르크 정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학살 희생자가 100만~15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를 악마시하고, 튀르키예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면서 양국 간 관계는 완전히 단절됐다. 두 나라는 외교 관계도 맺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튀르키예 강진으로 앙숙 관계인 아르메니아가 35년간 굳게 닫혀 있던 국경을 열고 구호 물품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5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대학살을 20세기 최초의 학살이라고 공언하였다. 이어 2019년 12월에는 미국 상원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미 민주당 ‘로버트 메넨데즈’(Robert Menedez) 의원은 “상원이 역사의 바른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며, 아직도 학살의 생존자가 있는 상황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해 사의를 표명하였다.

 

◈ ‘아제르바이잔’과 끊임없는 전쟁

아제르바이잔과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는 분쟁의 중핵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지역이 있다. 국제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인정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지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이 지역을 놓고 아제르바이잔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지만 인구의 대다수는 아르메니아인이다. 1980년대 소련이 붕괴한 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해 아르메니아의 일부가 되기로 표결했고 이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다.

 

1988년부터 아제르바이잔과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었고, 1994년까지 무력 충돌로 나타났다. 휴전을 선포하긴 했지만 두 나라는 결코 평화 협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남았으나 아르메니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분리주의파 아르메니아인들이 통제하고 있다.

또 다시 2020년 9월 27일부터 11월 10일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총알과 미사일이 오가는 전쟁은 44일이 지난 후에야 중단됐다.

최근에는 2022년 9월 12일 밤부터 13일 오전 사이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접경지역에서 대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은 양측 모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다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2018년 2월 9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아르메니아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세계 최초 ‘기독교 국교로 공인’

‘아라라트 산’(Mount Ararat)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란 및 아르메니아 국경에서 16km, 아제르바이잔 국경에서 32km 떨어진 국경지대에 위치한 활화산이다.

수도 예레반은 시내 어떤 곳에서라도 아르메니아인의 성산(聖山)인 아라라트 산(5137m)을 바라볼 수 있게 조망되어 있다. 아라라트 산은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으로 바이블에도 나와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성산(聖山)인 아라라트 산은, 성서에 따르면 대홍수가 끝났을 때 노아의 방주(方舟)가 기착한 곳이라고 한다. 이 산을 바라보는 ‘코르 비랍’(Khor Virap) 수도원은 7세기에 세워졌다.

하지만 소비에트연방 시절 스탈린이 이 산을 튀르키예에 넘겨주면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갈 수 없는 산이 되어버렸다. 튀르키예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학살의 가해국이기 때문이다.

 

첨언하면, 아르메니아의 국장은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시기에 사용된 국장을 차용한 것이다. 방패 가운데에는 아라라트 산과 그 위에 안착한 노아의 방주가 그려져 있다.

이와 함께 현재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전승을 지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司徒敎會: Armenian Apostolic Church) 이다. 인구의 92.5%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신자이다.

사도교회 일명 아르메니아 정교는 그리스 정교나 러시아 정교와 비슷하지만 역사는 더 깊다. 기원후 40년 예수의 제자 바돌로매(batholomew)와 다대오(thaddaeus)가 당시 유대(현 이스라엘) 지방을 떠나 이곳까지 와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믿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르메니아는 301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언한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313년에서야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것은 380년이니 79년이나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