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 백두인가, 장백인가?
2012. 7. 11.
[SBS 스페셜]
역사전쟁, 백두인가, 장백인가?
1677年, 병사만 2백 명이 넘는 대규모 무리가 그들이 장백산이라 부리는 산을 향하고 있었다. 1684年, 지방 현령 늑초 일행이 만주 일대에서 지형조사를 겸한 지도 작성을 하고 있었다. 1712年,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조선 조정에 백두산 일대 사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공통점은 이들 모두 청 강희제의 명을 받았으며 현 백두산과 관련된 일이었다는 점이다. 청나라 강희제. 그가 젊었을 때부터 만주 특히 자신들의 발상지와 백두산 일대의 지리 정보에 보인 관심은 남달랐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 집요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1677년에 무묵놀(武默訥) 일행은 청조의 발상지 장백산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문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장백산 등정기를 남겼다. 늑초 일행의 활동은 이처럼 성경통지에 글과 함께 최초의 장백산도로 남았다. 목극등은 지금은 백두산정계비로 불리는 강의 원류를 기록한 감은비를 세웠다. 그 내용의 비 서쪽으로 압록이요, 동쪽으로 토문이라 하였으며, 두 강을 경계로 하여 조선과 청의 국경이 획정된다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 비의 위치와 그 내용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조청간의 국경문제가 시작됐다. 논란의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태 소장 / 한국고지도연구소
“서로 간 공식적으로 공문이 오고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는 전혀 문제를 제시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목극등이를 만났을 때 문제점이 생깁니다.”
공식적인 정계도 아니었으며 정계비 논의도 사전에 없었다. 더구나 조선 측 대표 접반사 박권을 연로하다는 이유로 백두산에 오르지도 못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그 통역관과 군관 이름만 나오는 거지 우리나라 대표였던 박권과 이선부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거는 외교문서의 기본도 완 되어 있는 거죠.”
299년 전 그 때, 목극등은 정계문제를 조선 측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진행된 정계였지만 당시 이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목극등이 두만강의 수원지라고 믿고 건립한 정계비의 위치가 송화강 상류에 발원지로 드러난 것이다. 현재 중국 측의 입장은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에 의해 대변된다. 최근 관련 책을 펴낸 한 학자는 제작진의 공식적인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며 자신의 출판물을 참조하라고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목극등에게 토문강은 두만강이었다. 그러나 땅 속으로 복류하는 하천의 특징으로 인해 착오가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이 착오를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다. 시간이 흐르자, 역사관이 바뀌어 토문강을 송화강이라는 주장을 폈다.'
앞에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나 그러나 마지막 말은 문제가 있다. 목극등 당시 조선의 시각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의 역사관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관, 국경관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1885년과 87년 감계 담판 당시 정계비 위치가 불리하자 청측의 대표들은 조선이 몰래 백두산의 동남쪽으로 정계비를 옮겼다는 억지 주장을 펴기도 했다.
신영길 회장 / 근현대한일연구회
“(이중하 선생은) 대단하죠. 소위 말하자면 내 목을 너희들이 자를 수 있어도 나는 우리 국토를 단 한 치도 적게 희생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했죠.”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조정의 무관심 속에 한 발 물러선 것이 두만강의 지류 중 하나인 홍토수를 원류하자는 양보안이었다. 그러나 청측의 주장은 서두수였다. 서두수는 백두산 최남단 지류였다. 그러면서 다시 홍토수 안을 궤변으로 몰아붙였다. 담판은 결렬 됐다.
윤휘탁 교수
“그러다가 1909년도에 일제와 청나라 정부 사이에 간도협약이 맺어지면서 국경 문제가 일단락 됐는데...”
이제는 석을수가 경계였고 그 거리만큼 백두산은 멀어졌다. 정계비에 의하면 토문강이라 표시된 곳이고 이중하 선생은 양보하여 홍토수 청나라는 서두수로 일제는 석을수로 타협을 했다. 그래서였을까, 1931년 7월 28일 일본인 등산객들에 의해 백두산정계비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다음 정계비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일제의 해산진 수비대원의 짓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신영길 회장
“그건 뻔히 보이죠. 일본 군인들이... 수비대가 한 것으로 봐야죠.”
1962년에는 북한과 중국이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새롭게 국경선을 획정했다. 토사퇴적으로 변화가 심한 두만강 유역에 하중도들은 일일이 경위도를 표시하여 그 소속을 밝혀 놨다.
윤휘탁 교수
“1962년, 조중변계조약, 즉 국경조약을 통해서 천지의 54.5%는 북한 영유로 되어 있고요. 나머지 45.5%는 중국 영유로 되어 있습니다.”
“거의 맞습니다. 국경선 개념이, 이렇게 해서 올라가게 되면 지금 여기서 다시 천지를 둘러싸고 이렇게 해서 북·중간의 국경이 이렇게 일직선으로 이어져서 이렇게 지금 국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위성화면으로 확인하면 천지와는 달리 북한은 정작 백두산에서 4분의 1만 소유할 뿐이고 4분의 3은 중국 소유다.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북한이 하나 중국이 3개다. 이것이 국경 관련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인 가슴속에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자리 잡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다만 국경관 관련한 현실 인식에서는 중국과 달리 우리 학계에서는 상이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윤휘탁 교수
“유리해진 겁니까?”
“유리해진 거죠.”
이상태 소장
“두만강을 가지고 이야기 하면 그건 우리 땅 뺏긴 거죠.”
초점은 백두산 정계비에 인정 유무다.
육락현 상임명예회장 / 간도 되찾기 운동본부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이예요. 토문강 줄기를 따라가면 송화강으로 해서 흑륭강과 합쳐서 동해로 빠집니다. 이것이 정계비에 의한 근거 지도입니다.”
“지금 당장 못 찾더라도 우리 정부에서 중국 정부에 대고 간도는 미해결된 땅이다, 우리 땅이다. 그것을 이야기해야만이 다음 다음 세대에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남는다는 겁니다.”
이상태 소장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경우에는 국경 담판을 다시 해야 되겠죠.”
윤휘탁 교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현실적으로는. 현재의 만주라고 하는 공간을 영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고 그러면 아마 향후에 한·중 관계는 파탄이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통일 한국에서 국경문제가 제기 된다면 조중변계조약은 파기되고 청일간도협약도 파기되고 이중화 감계담판이 결렬되었던 그 원인 제공을 했던 목극등의 사계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예측이다. 역사적 시각에 주목하는 바로 그 이유다. 실제로 그런 일이 되풀이 된다. 그러나 그 역사적 시점은 목극등 이전이었다.
장백산을 중심으로 압록 토문을 경계로 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일이었다는 말이다. 강희제 또한 압록, 토문을 경계로 하는 것은 명백하다고 했는데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그런데 아무도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따져보려 한다. 출발점은 두 개다. 1677년 무묵눌의 최초의 장백산 등정기. 그리고 1684년 늑초 일행이 그린 장백산도가 과연 지금의 백두산이냐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기의 두 사건이 지명과 그림으로 연결돼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늑초가 그렸을 이 장백산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지도의 남북 방향이 거꾸로 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용강산맥 부분은 제작진이 임의로 확장한 것으로 거기서 발원하는 것으로 보이는 토문하와 삼두하, 휘발하를 더 잘 알기 위해서다. 그리고 동쪽 끝에 다시 토문강이 있다. 용강산맥에 남로와집에서 발원하는 토문하가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성경통지 본문에 토문하란 이름으로 이 내용이 들어 있어 이 시기 그런 이름으로 존재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백두산 천지의 특징도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제작진이 발견한 문제점들이 있다. 이에 대한 답을 구했지만 명쾌한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 의문은 1677년 무묵눌이 어느 방향으로 백두산에 올랐느냐, 하는 흔적이다. 이도백하 쪽, 이른바 북파로 올랐을 가능성은 애초에 배제된다.
윤휘탁 교수
“이게 지금 이 (이도백하 쪽) 부분이 다 밀림이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서쪽 지역의 밀림의 분포가 적습니다. 그리고 남쪽은 좀 상대적으로 산세가 험하고요. 제 추측으로는 아마 이 서쪽 코스를 향해서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판단이 됩니다.”
무묵눌은 이 두 눌인강의 합류 지역을 장백산 등정에 전초기지로 활용했는데 늑초의 장백산도에도 표시가 돼 있다. 여기에 의하면 분명히 서파 등산로다. 구지 많은 사료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이 두 눌인강의 이후 바뀐 이름이 나온다. 긴강과 만강이 그것인데, 긴강은 금강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민부 교수 /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위성사진에서 보면 무송현에서 백두산 서파에 이르는 지역 한 중간 쯤에 만강진이라고 있습니다. 지금 만강진의 위치가 여깁니다. 여기가 만강진이고 이 만강진의 긴강과 만강 하부 지역에 있는 곳으로써...”
그렇다면 무묵눌 일행은 현재 만강진으로 온 것이 틀림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해석이 하나 더 존재했다. 만강진이 아닌 화띠엔시였다. 제작진은 무묵눌 일행의 행적을 되짚어 가기 위해 우선 창춘으로 날아갔다. 강희제의 명을 받은 무묵눌 일행은 1677년 6월 2일 또는 3일 당시 이미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장백산을 찾아가기 위해 지금의 지린시를 출발했다.
그리고 수많은 군소 지역들을 거쳐 간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갔을 지역들은 지금은 거대한 인공호수로 바뀌었다. 이 때 이들은 17척의 소선을 이용하여 3개월분의 식량을 실은 식량조와 육지로 가는 본진으로 나뉘어졌다. 기록엔 거쳐 간 많은 지명들이 등장하지만 눌인 지방에 이르기 전 지린시에서 육백여리 떨어진 곳에 지명인 탕륭와하가 마지막으로 기록돼 있다. 제작진은 화띠엔시로 향하면서 두 번째 의문이 들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현 지린시에서 백두산까지는 당시 1천 3백여 리 정도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육백리 이후의 기록이 없었다. 제작진은 이 화띠엔시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한 향토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길림지지에 의하면 이곳이 청시기 백산 눌음부였으며 무묵눌의 기록에 등장하는 대소 눌음하가 있었으며 액혁눌음 들판으로도 불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통지에도 두 눌음강이 지린에서 남쪽 또는 서남쪽 5백여 리 지점을 흐른다고 하였다. 긴강 만강의 비정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새인눌인하는 그 원류가 장백산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된 것일까?
왕지펑 화띠엔시 박물관장
“이 일대는 그러니까 원류는 송화강, 즉 장백산(백두산을 지칭) 산맥입니다. 여기는 장백산 산맥에 속합니다. 전부 장백산 산맥이죠.”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정작 화띠엔시까지 이어지는 길림합달령 이름을 들어본 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갖고 있던 중국 지도를 다 보여주는 일이 생겼다. 그러고도 관장은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현지 중국인들이 길림합달령은 모르고 있으며 산맥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곳까지 장맥산맥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이 되었다.
그러면 백두산을 시작으로 이렇게까지 넓은 범위로 장맥산맥이 확장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결론은 내릴 수 없지만 이렇게 해서 서로 다른 위치에 같은 이름에 두 눌음하가 있다는 것은 확인이 됐다. 심지어 무묵눌 일행이 갔다는 장백산도 백두산뿐만 아니라 이 지역을 기점으로 한 모든 가능성이 열려 벌였다. 여기서 무묵눌 일행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기록을 보면 눌음 또는 액음들판에서 장백산까지 오고 간 여정이 대단히 불규칙했으며 그 거리 또한 기록마다 달라 짐작이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정작 이상한 점은 한 기록에서 그들이 남쪽에 전망처로 되돌아왔다고 한 부분이다. 말하자면은 백두산 남쪽에서부터 올라갔다는 것인데 이것은 당시 조청간의 국제정세 상 사전 통보 없이는 불가능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출전이 다른 사료에도 장백산 남쪽에 지세에 대한 묘사가 기록돼 있다. 백두산 천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대신 강 중간에 못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압록강에 대한 언급은 한결같이 누락됐다.
그 7년 후에 늑초 기록은 더 이상한 점이 많다. 조선 변민과의 충돌사건으로도 유명한 늑초는 학계의 통설 상 백두산 남쪽을 오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1684년에 성경통지 초간본에는 늑초가 묘사한 장백산 남쪽의 형세가 나오며 북쪽이나 서쪽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으로 보기 어려웠다. 1712년에 목극등의 사계는 백두산 일대, 특히 남쪽지역에 대한 지리 정보가 없었던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었다.
이상태 소장
“압록강과 그 두만강 일대의 그쪽에 관한 역사적 지리 인식, 산천에 관한 지리 인식이 부족하니까 그쪽 부분을 좀 정확하게 조사해 와라 이게 이제 강희제의 기본적인 지시 사항이죠.”
근 30년에 걸친 집요함이었고 집착이었다. 조선 측의 반발도 무시 못 할 정도였지만 백두산 사계에 관련된 강압적인 언급만도 수차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목극등의 사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길림합달령에서 두 번째로 큰 산 조대계산을 찾아 가는 길이다.
“조대계산이 어디예요?”
“저기예요.”
“길림합달령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들어본 적 없는데요.”
이곳을 찾아 가는 이유는 기록으로만 보이는 늑극산이 가능성 때문이다. 무묵눌이 지나간 탁륭와하 또는 찰륜과하가 늑극산에서 발원하여 두 눌음하와 합류한다고 했으며 지린시에서 600리 남쪽에 있다고 했다. 조대계산은 높이 1257m의 높은 산이지만 평지에 산 하나가 우뚝 솟은 형세일 뿐이다. 산아래 신융호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장관을 이룬다고 소개돼 있지만 메마른 저수지일 뿐이다. 산천은 다름이 없는데 옛지명 특히나 만주어로 남은 기록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원래부터 조대계였는데 무슨 이름이 있어. 그냥 조대계야 원래부터 조대계였다고...”
“길림합달령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응? 뭐라고? 누구라고 그건 모르겠어...”
제작진은 길림합달령의 중심 쪽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도중에 판스시가 있다. 우리말로 반석, 실제로 인근 마반산에 반석이 있어 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강 이름과 산 이름이 쉽게 바꾸지 않는다고 믿는다. 한 두 세대로 보면 분명 그렇다. 좀 더 긴 시간 단위로 보면 지명의 변천은 무쌍했다. 역사의 부침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마반산의 반석은 산 중턱의 평범한 암반이었다. 안으로 굴을 뚫어 일제 만주 침략 시 피난처로 사용됐다고 한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제작진은 문뜩 의문이 들었다.
장백산. 이 넓은 만주 일대가 원래부터가 다 장백산일 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원류가 어디일까? 새로운 가능성이 하나 더 제기됐다. 성경통지의 장백산도는 단 하나의 산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렇게 넓은 범위의 산맥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민부 교수
“중국은 산맥 이름을 '맥'자를 빼고 그냥 산이라고 붙입니다. 그래서 여기 중국 지도에 나와 있는 장백산 하는 것은 장백산맥을 이야기하고... 요 정도 되면 굉장히 넓은 지역이죠. 우리는 이제 이것을 대지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대지, 이게 조금 높은 곳에 있으면 고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다 여기 포함이 되는데...”
사료들에 한결같이 나오는 장백산의 길이는 천리에 걸쳐 있는 산맥이었다(長白山 橫亘千里). 즉 장백산맥인 것이다.
“횡으로 천리는 이게 영 표현이 안 되는데?”
현 백두산 일대 장백산맥 산맥의 경우 길이 약 1300여 킬로미터(2256리). 청나라의 것으로 따지면 2200리가 넘는다. 고대의 기록보다 현 장백산맥이 두 배 이상 더 긴 산맥인 것이다. 늑초는 자신이 본 장백산이 명일통지가 말한 바와 같았다고 하였다. 그 명일통지에 두 개의 기록이 나오는데, 즉 회녕부 현 개원시 남쪽 60리에서 시작하여 천리에 뻗어 있다고 하였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삼만위 역시 현 개원시에 동북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천리에 걸쳐 있다고 하였다. 이 두 개의 조건에 부합되는 산맥은 현재 길림합달령 뿐이다.
이민부 교수
“그렇죠. 지금 현재 장백산지하고 길림합달령 산맥하고는 상당히 평지로 이렇게 분리가 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들이 말하는 장백산은 상당히 북쪽에 올라가 있는 산지가 되겠고 그런 경우에는...”
그런 경우에는 늑초가 그렸을 이 장백산도는 현 길림합달령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명들이 여전히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제 판스시를 지나 랴요위안시를 향하여 가는 길이다. 길림합달령의 중간지대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 일대 산들을 기점으로 하여 곳곳에서 강들이 발원하는 중요한 분수령지대이기도 하다. 성경통지에는 이 길림합달령 일원에 산들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모두 지린시에서 5백리 떨어진 산맥들로 장백산도에 나오는 안파도랍고하, 아제격도랍고하와 이름이 비슷한 산들이 있고 액흑눌인과 새인눌인은 길림합달령과 백두산 두 곳으로 혼재돼 있다. 그런데 성경통지에 장백산도를 다시 보는 제작진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3군데 지명이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판본의 체이었다.
성경통지는 총 5차례, 속수라고 하여 수정증보보완 되었다. 그런데 달라질 이유가 없는 장백산도의 지명들이 바뀌거나 지워진 것이다. 휘발하와 휘발성이 지워지고 혼돈강은 압록강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민부 교수
“아, 이것은(3차본) 잘못된 것이고, 이게 (초간본이) 맞죠. 이건 잘못된 거죠. 압록강하고 이게 방향이 다른데, 그러네요. 근데 이것은 의도는 모르겠는데 아주 잘못, 좀 인위적으로 변경을 시킨 그런 느낌이 많이 납니다.”
이상태 소장
“오류가 아니죠. 일부러 바꿔놓은 거죠.”
그러나 왜 그렇게 인위적으로 지명을 지우거나 바꿔놓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성경통지에 수록된 또 다른 지도. 성경여지전도. 이 지도도 지금의 상식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지도상의 장백산이 동가강이 발원하는 용강산맥 북쪽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민부 교수
“이 지도를 보면, 이 지도 자체는 분명히 이게 백두산아 아니고...”
이번엔 청일통지의 성경전도다. 여기에도 백두산 위치는 애매하지만 장백산은 뚜렷하다. 역시 같은 산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이상태 소장
“이쪽의 장백산은... 이것은 백두산하고는 다른 산이죠. 다른 산이에요. 이 정도의 거리라면 분명히 다른 산을 말하는 거예요.”
이 지도에 나오는 지명을 좀 더 살펴보자. 길림합달령으로 보이는 장백산 위쪽에 휘발성과 휘발하가 그려져 있다. 현 학계의 견해론 길림합달령 동남쪽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통지 등 사료 상으론 지린시를 기준으로 오백리 정도 떨어진 길림합달령 중심선들보다 더 가깝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제작된 근대 만주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의문이 일시에 해결된다. 길림합달령 위에 휘발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도의 장백산은 백두산이 아니라 길림합달령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만주일대를 포괄한 넓은 범위의 장백산으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장백산은 그 좁은 범위에 원래 장백산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근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산은 지금 길림합달령을 넘는 중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수산호(壽山湖 이동하의 발원지). 강희제가 동북 순시 후 귀로 길에 이곳에 들러 내린 이름이라 한다. 이 호수는 이통하(伊通河)의 최대 발원지다. 이통하는 지명변천의 유래를 고찰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압자하(鴨子河)였으며 요나라 성종 태평4년 1024년 이름을 고쳐 혼돈강이라 하였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혼돈강의 최대 발원지다. 이후 혼돈강(混同江)을 다시 지명을 옮겨 간다. 그렇지만 강의 흐름은 옛과 같으니 흘러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이제 우리는 늑초의 장백산도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휘발하와 휘발성, 혼돈강의 그림을 다시 그려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성경통시 3차 속수 본에서부터 이 3개의 관련 지명을 지운 이유도 짐작하게 됐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역사왜곡이다.
이일걸 회장
“요동지를 보게 되면 (개원)성 동북 500리에 장백산 북쪽에서, 송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가지고 송화강으로 간다는 것이거든요. 토문하가”
장백산도에 그려져 있는 토문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현 용강산맥에서 발원하는 토문하가 있었다. 그렇지만 길림합달령 북쪽의 토문하도 있었다. 지도가 아니라 문헌에는 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토문하가 길림합달령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휘발성, 나아불로성을 경유한다고까지 했다. 이 성은 무묵눌이 청조의 발상지 장백산을 오기 위해 경유했던 곳이다. 길림합달령 북쪽으로 토문하까지 들어가게 되어 이제 이 장백산도의 장백산을 길림합달령으로 보는 것에 무리가 없을 정도다. 길은 이제 완연한 내리막길이다.
대체로 이 지점을 좌우로 하여 동요하 수계와 송화강 수계로 나누어진다. 한 뼘의 발원지 차이로 인해 수만리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동요하의 발원지로 유명한 랴오위안시다. 이 강은 여기서 시가 반대 방향으로 흘러 반대 편 내몽골 지역에서 오는 더 큰 서요하로 흘러 들어 대요하가 된다. 이 하천도 동요하의 지류로 수많은 옛 이름을 지녔을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 머릿속에는 그저 동요하일 뿐이다.
“여기가 동요하인데요. 발원지예요. 랴오위안 이 일대는 전부 구릉입니다. 장백산의 여맥이죠.”
여기서 장백산의 여맥이라 함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두고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길림합달령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제작진의 여정도 거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랴오위한시에서 서쪽으로 가면 시펑현이다. 길림합달령의 중심은 벗어난 것이다.
“빙립산 이쪽으로 가는 것 맞나요?”
“맞아요.”
시펑현에 있는 빙립산을 찾아 가는 길이다. 여기도 넓은 의미든 좁은 의미든 장백산 중의 하나다. 지명의 연원은 물론 잊혀졌다.
“청나라 때부터 빙립산이라고 불렀나요?”
“맞아요. 청나라 때부터 빙립산(해발 870.2m)이라고 했어요.”
“여기가 전부 장백산 일대인가요?”
“네, 전부 장백산 산맥이에요. 어디까지인지는 우리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 장백산 산역에 속해요.”
지금까지의 추적을 통해 제작진이 추측한 장백산은 이런 것이었다. 장백산이 상징성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 여러 민족, 종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산이라기보다 산맥이 개념이 더 강했었고 때로 그 산맥 중에 하나의 산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산도 하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다. 시대가 바뀌면은 변하지 않는 산천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특징들이 불과 두, 세 시기 전까지 이곳 길림합달령 일대를 가리키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분명한 것은 산천의 지명들이 너무도 쉽게 사라지거나 옮겨 다녔다는 점이다. 역사의 부침이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가 장백산, 즉 합달령의 여맥입니다. 가장 마지막에 도달하는 위치예요. 여기가 용의 꼬리고, 장백산(백두산)이 용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이 빙립산에서 남쪽으론 용강산맥에 이른다. 늑초 기록에 장백산 남쪽 분수령이라 한 바로 그곳이다. 그 바로 밑이 흥경으로 청조의 진정한 발상지다. 진정한 발상지라 한 이유가 있다. 청조는 자신들의 발상지마저 이곳저곳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고탑이다. 영고탑이란 숫자 6을 뜻하는 만주어 링고타의 한역으로 청태조 누르하치의 6명의 조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영고탑이 원래 흥경에 있었는데 강희제시기에 지린을 거쳐 지금의 헤륭장성 영안시로 옮겨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이 원래 영고탑 지역인 것으로 둔갑해 있다. 그 증거가 있다. 조선 선조 28년에 1592년 12월 후금 건립 이전에 누르하치의 정세를 탐문키 위해 압록강을 건넌 신충일 장군은 이처럼 자세한 견문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도성은 호란합달성으로 그 인근에 영고탑(寧古塔)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누르하치의 두 번째 도성으로 지금의 흥경이다.
이것을 일제 때 일본인 학자가 이처럼 다시 재정리를 했다. 용강산맥 남쪽에 잉고타로 지명표시를 했으며 인근에 같은 이름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르하치의 조부들은 6개성을 축성했었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2, 3십리였음도 알려져 있다. 그들 여섯 명의 조부들의 칭호가 영고탑패륵이었다.
현재 청조의 발상지라 주장되는 곳들을 만주지도에다 표시를 해보면 만주 전역이 그들의 발상지 판도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이는 학계에서 별다른 이견들을 제사하지 않는 곳들이기도 하다. 자 이제, 백두산정계비로 돌아가 보자. 서쪽으로 압록이라 했다. 장백산도에는 그려놓지 않았지만 문헌에는 역시 서쪽으로 압록이라 하였다.
남의현 교수 / 강원대 사학과
“중국에서 연구된 변계사 책은 한국 고대부터 현재 북한까지 압록강은 변할 수 없다는 것, 국경선이…”
과연 압록은 옮겨 다닌 지명이 아니었을까? 여기서는 고대 기록에 나오는 압록에 특징 두 가지만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우선 고구려 영역에서 압록이 제일 큰 강이었다. 그 서쪽에 있었던 요수보다 강폭에 있어서는 3배나 차이가 났다. 그리고 요서와 더불어 압록수도 입패구 변천이 심한 강이었다. 고구려 동천왕 시기와 말기 사이인 430년 동안 입패구가 무려 130리나 신장되었던 강이었다. 오늘날 압록강은 이런 특징을 찾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제 조심스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성경통지 초안본의 이 장백산도는 지금까지의 분석에서 보면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하나의 지명이 두 군데로 해석이 가능했던 시기. 지명이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지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시기의 편찬자 입장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우고 옮겼는데 엉뚱하게 압록을 이곳으로 옮겨버렸다. 강희제의 명을 받아 잊혀진 발상지 장백산을 찾아간 무묵눌은 과연 백두산을 올랐던 것일까? 여기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다. 그 35년 후인 목극등의 사계 당시 기록인 김지남의 <북정록>에 의하면 백두산이 조선에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이상태 소장
“목극등이 (사계 당시) 그런 얘기를 하죠. "대국의 산천은 비록 다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백산은 이미 이국지지(你國之地) 너희 땅이니, 그래서(그림) 한 본을 주는데 무엇이 어렵겠느냐" 하는 백두산이 우리 땅이라고 분명히 오라총관 목극등이 인정하는 내용이죠. 여기. 백산”
강희제가 자신들의 발상지를 대단히 중시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더구나 장소도 무묵눌에 의해 이미 확인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해마다 큰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보내어 제사도 지냈다. 그곳이 백두산이라면 목극등은 결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따져보지 않았던 청측의 주장. 국경선이 목극등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그 주장을 역사적 맥락에서 따져 보았다. 그러나 국경선 그런 것은 그 이전에 없었다. 아니 강희제 이후 일정시기 동안에도 없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다. 빈 공지만 남았다. 무인지대가 된 것이다. 그 무인지대를 경계 짓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이른바 유조변이다.
남의현 교수
“원래 그게 명나라 때 요동 변장선이에요. 이것이 구변, 노변이 되는 거예요.”
유조변은 명나라 때 이미 설치가 되어 그 밖에는 조선과의 국경 중립지대였다가 청시기에 약간의 변화를 겪는다.
“흥경이라는 곳이 자기네 조상의 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흥경을 이 경계 안으로 끌어당긴 것이죠.”
강희제시기에 지금의 창춘과 지린 사이로 그 선이 뻗어나갔다. 그것이 이른바 신변이다.
“지금 현재 중국이 말하는 것은 늘 고대부터 압록강이 경계라고 하는데, 그건 중국의 논리고 우리 쪽 사료를 보게 되면 중국의 사료와 비교하다 보면 여기 이 지역은 국경 중립 지대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압록강 너머의 유조변과 유조견문의 모습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일정한 무인지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빈 땅이라는 게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양쪽 어느 국가의 행정 구역이 편입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에 국경 지역의 개념으로 봐야하는 거죠.”
강희제 당시 프랑스인 선교사 레지는 비망록에서 추측 건데 만주는 중원을 공격하기에 앞서 조선과 싸워 이를 정복하고 무인지대를 두기로 의정했다. 도상에 점선으로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을 뒷받침 해주는 중국 측의 기록들도 있다. 요해총서 중 유변기략에는 성경장군 관할지역은 판도내로 영고탑장군과 에헌장군 속한 지역은 군현도 없으며 무판도로 설명해 놓았다.
남의현 교수
“이런 지역은 無판도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봉금 지역은 에네 표현으로 무판도가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신의주 쪽 압록강과 중국 봉황성 변문 사이에 중립지대의 거리가 120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북한과의 무역으로 번성한 단둥시도 당시에는 사람들이 없는 무인지대였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 지역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봉황성에서 압록강으로 나오면 초하하고 예하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쪽으로 오는 지역인 거예요. 국경 중립 지대를 넘어온 거죠. 조선쪽으로.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당연히 저항에 들어간 것이죠.”
청나라 관리가 중립지대 망우초 지역에 수로방제시설 공사를 하려 하자, 조선 측의 항의로 중단된 일이 있었다. 조선 영조 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정계비를 세운 직후인 1714년에도 두만강 너머로 들어와 살던 청인들이 쫓겨난 일이 있었다. 강희제 명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청나라 때도 백두산정계비를 세워서 "서위압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계비 세운 이후에도 이 선이 국경선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빈 땅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서로의 국력이 약해지던 그 시기 1870년대 어느새 만주는 양국의 민초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국경선 문제가 촉발됐다. 일제가 한반도와 만주를 이어버린 이 장백산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만일 지금 우리가 만주지역까지 손에 넣고 있었다면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산맥지도를 배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이러한 장백산맥 지도를 만들었다.
남의현 교수
“보통 우리가 미래를 준비한다면 하나는 이런 역사적인 문제를 하나 정립해 놓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국력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는 거죠.”
지난 2007년 2월에 이 중국 문건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백두산이라 등록된 중국내 모든 상호를 취소시키고 만주족이 장백산 즉 백두산을 발상지로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극 선전하여 국경 밖 야심가들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
제작진은 다시 이름 모를 산길을 달렸다. 한국에서부터 여기에 오면 꼭 오르고 싶었던 산이 하나 있었다. 시골 민가들도 지나고 몇 시간을 그렇게 이름 모를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 하나의 산이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산이었다. 산 중턱에 돌로 축성된 성벽이 나타났다. 고구려 산성이었다. 어느 옛 기록에는 장백산의 작은 석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엔 그림 같은 호수는 없었다. 작은 계곡 수가 흘러내릴 뿐이었다. 오르막길이 가팔랐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난 후 성경통지 장백산도에 묘사된 것과 같은 돈대(墩臺 : 요새 역할을 하도록 높게 지은 시설물)현상의 암반이 솟아나 있었다. 거의 산 정상에 가까운 곳이었다.
산정상도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주어로 된 길림합달령 내 봉우리 안파화탁봉이 생각났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큰 대머리산쯤 된다. 여기도 길림합달령이고 장백산이기도 하다. 남서쪽으로 내려간 산줄기는 화령으로 뻗어 두 팔로 껴안은 형세라 하였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 중첩된 산들이 긴 여맥을 이루고도 있었다. 제작진은 여기서 더 이상의 상상을 허락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하나의 가능성을 뿐이었다. 하산 길에 만주족 노인을 만났다.
“파종하는 계절에 꽃이 피기 시작하죠. 그러면 산이 온통 꽃으로 뒤덮어요. 풍경이 아름답죠.”
“만주어로 ‘암바하다’라고 들어보셨어요?”
“들어본 적 없는데요.”
“혹시 만주족 아니세요?”
“만주족 맞아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괜찮아요.”
지명의 역사는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약 그 시간이라는 퍼즐 조각 중 하나가 없으면 연결은 끊긴다. 여기 만주란 공간은 여전하지만 하나의 시간 때가 침묵하고 있다. 만주어가 사라진 것이다.
* 글의 저작권과 이미지의 저작권은 SBS 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합니다.
'History & Human Geogra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일성 장학생 판사들 얼마나 많을까 (1) | 2024.05.13 |
---|---|
"레닌 쓰탈린당의 충직한 당원" "조선빨찌산의 거두"…홍범도 부고 (0) | 2024.05.13 |
'이문열 책반환' 모의장례식 (0) | 2024.05.13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Armenian genocide (0) | 2024.05.13 |
인구 15만 산속마을이 뭐길래, 러·이란·터키도 뛰어든 이 전쟁 (0) | 2024.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