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차흐 공화국
인구 15만 산속마을이 뭐길래, 러·이란·터키도 뛰어든 이 전쟁
입력 2020.10.18 10:00
업데이트 2020.10.19 07:37
‘문명의 통로’로 불리는 캅카스 산악지역에서 총성이 요란하다. 캅카스는 흑해와 카스피 해, 그리고 러시아·이란·터키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고대부터 유럽과 중동, 동양과 서양 문명,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경계이자 통로로 통하던 지역이다.
그만큼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하다.
캅카스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마르타케르트 마을에 10월 15일 포탄 파편에 부숴진 것으로 보이는 철모가 나뒹굴고 있다. 아르메니아 계가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아제르바이잔 땅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싸고 양측이 벌인 교전의 결과다. 두 민족은 이 지역 영유권을 둘러싸고 100년 이상 분쟁을 겪어왔다. AP=연합뉴스
2020년 7월 12일 가벼운 교전으로 시작해 9월 27일 전투가 본격화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분쟁이 10월 10일 휴전합의에도 아랑곳없이 그치지 않고 있다.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지난 3주 동안 양측을 합쳐 100명 이상의 군인이 숨지고, 수백 명이 부상했으며 7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피란했다.
두 나라는 지난 10월 10일 러시아의 중재로 3국 외무장관 회담을 열고 휴전에 합의했지만, 충돌은 그치지 않고 있다.
캅카스에 자리 잡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와 나고르노 카라바르 공화국. 붉은색 안은 아제르바이잔 땅이지만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80%를 차지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영역. 진한 갈색은 1991년 이후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과 분쟁을 벌이면서 확보한 실효지배 지역. 아르메니아계 주민은 이 실효지배 지역에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을 세웠지만 유엔 회원국 중 아르메니아만 승인했을 뿐 국제적인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가 터키계 언어에서 비롯됐다며 2017년 주민투표로 이름을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바꿨다.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캅카스에 자리 잡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와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
붉은색 안은 아제르바이잔 땅이지만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80%를 차지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영역.
진한 갈색은 1991년 이후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과 분쟁을 벌이면서 확보한 실효지배 지역.
아르메니아계 주민은 이 실효지배 지역에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을 세웠지만 유엔 회원국 중 아르메니아만 승인했을 뿐 국제적인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가 터키계 언어에서 비롯됐다며
2017년 주민투표로 이름을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바꿨다.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나고르노카라바흐 둘러싼 자존심 대결
이들이 싸우는 가장 큰 원인은 아제르바이잔의 한가운데에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80%나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인구가 15만에 불과한 작은 산악지역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용어로 국제사회에 알려졌지만 이는 러시아어인 ‘나고르니 카라바흐’의 영어식 표현일 뿐 현지어가 아니다. 아르메니아어로는 ‘레르나인 가라바그’라고 하고, 터키계인 아제르바이잔어로는 ‘다을르그 가라바으’라고 부른다. 여러 가지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자존심을 걸고 영유권을 다투는 곳이다. 종족이나 집단의 정체성이 걸린 지역이라 분쟁 해결이 쉽지 않다.
캅카스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마르타케르트 마을에 있는 진료소 출입문이 10월 15일 혈흔으로 얼룩져 있다. 치열한 교전과 희생자 발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AP=연합뉴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을 겪는 최악의 상황에서 왜 지역 분쟁이 다시 붙 붙었을까. 외신을 종합해 전투 상황과 그 배경, 그리고 전망을 정리한다. AP·로이터·AFP 등 통신의 속보를 바탕으로 영국의 BBC, 미국의 NPR·NBC·CNN 등 방송과 ·파이낸셜타임스·가디언·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월스트리트저널· LA타임스 등 신문의 상보를 참조했다. 프랑스의 프랑스24, 독일의 도이체벨레(DW), 유럽권 영어 방송인 유로뉴스, 아랍권 방송인 알자지라의 영어뉴스 보도도 참고했다.
상세한 전투와 피해 상황에 대한 정보는 아르메니아계 뉴스 사이트인 팬아르메니안네트와 아제르바이잔의 아제리통신(APA), 러시아의 리아노보스티 통신을 통해 입수했다.
하지만 서로 자국의 주장을 앞세워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비정부기구인 미국외교협회(CFR), 국제위기감시기구(ICG), 미국의 유럽·중동 대상 라디오인 자유유럽방송(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 등의 사이트를 통해 국제정치적인 함의를 살펴봤다.
캅카스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중심지인 스테파나케르트에 떨어진 아제르바이잔 로켓포의 잔해. 아르메니아 외교부가 외국 기자들에게 배포한 사진이다. 9월 27일 화대된 교전을 민간인 지역에 대한 포격으로 이어졌다. EPA=연합뉴스
터키 지원 시리아 민병대, 아제르바이잔 측에 참전
보도를 종합하면 양측은 전차·장갑차·야포·헬기를 비롯한 재래식 무기에 드론을 비롯한 최신 무기까지 동원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측에는 터키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민병대인 함자 사단과 술탄 무라드 사단의 병력이 1600명 이상 참전한 것으로 보도됐다.
양측은 상대방이 먼저 공격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황을 살펴보면 아제르바이잔이 치밀한 준비 끝에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다. 과거 분쟁에선 아르메니아가 승리를 거두고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석권한 것은 물론 두 지역을 이어주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올해 분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과거에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고 주장한다.
분쟁의 기본적인 이유는 아르메니아 본토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아제르바이잔에 둘러싸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대립이다. 인구가 15만에 불과한 작은 지역이지만 캅카스의 화약고가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캅카스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중심지 스테파나케르트의 민간인 거주지에 떨어진 아제르바이잔 로켓포의 잔해 앞을 개가 지키고 있다. AP=연합뉴스
캅카스의 100년 묵은 분쟁 또 불붙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분쟁은 역사가 오래됐다. 캅카스 지역은 오랫동안 페르시아·오스만튀르크·러시아가 각축을 벌이다 1800~1864년 제정 러시아가 점령해서 지배하게 됐다. 러시아에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면서 1918년 조지아정교 지역인 조지아(러시아어로 그루지야로도 불림)와 아르메니아정교 지역인 아르메니아, 그리고 무슬림(이슬람 신자) 지역인 아제르바이잔으로 각각 독립했다. 하지만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가 19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1921년에는 조지아를 점령했다. 소련은 이들에게 연방 산하 공화국의 지위를 부여했다. 이때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의 일부였다.
문제는 조지아 출신으로 이 지역을 잘 이는 스탈린이 1924년 나고르노카라바흐의 통제권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넘겨주면서 불거졌다. 아르메니아와 이어지지 않고 아제르바이잔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관리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캅카스 서북부인 조지아 출신으로 아르메니아인의 강력한 민족주의를 잘 아는 스탈린이 이를 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 넘겼다는 것이 아르메니아 측의 오랜 주장이다. 독재자 스탈린이 오랜 민족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10월 13일 아제르바이잔의 포격을 받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중심지 스테파나케르트의 무너진 주택 앞에서 고양이가 울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강력한 소련의 통제 속에서는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소련의 통제력이 약해진 1988년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분쟁을 재개했다. 1991년 양국이 소련에서 분리·독립한 뒤에는 아예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강대국에 속해 있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다 통제가 느슨해지면 다시 충돌한 셈이다. 고질적인 민족 대결이다.
양국은 1992~1994년 전면전을 거친 뒤 1994년부터 낮은 수준의 분쟁을 계속해오다 이번 2020년에 다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1992년 이후 모두 3만~4만 명이 숨지고 수만 명의 피란민이 발생했다. 캅카스의 비극이다.
아제르바이잔 출신 미국인들이 10월 14일 워싱턴DC의 백악관 주변에서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들고 나로그노카라바흐에서 벌어지는 교전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AFP=연합뉴스
터키·프랑스·러시아 등 국제 개입 불러
민족 분쟁은 국제적인 개입과 각축전, 대리전, 그리고 외교적 갈등을 불렀다. 보도에 따르면 올해 분쟁에서 터키는 민족과 언어에서 유사점이 많은 아제르바이잔에 드론을 비롯한 다량의 무기체계를 지원하거나 판매했다.
주목할 점은 이스라엘의 레우벤 리블린 대통령은 10월 5일 아르메니아의 아르멘사르키샨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점이다. 리블린 대통령은 이 통화에서 아르메니아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배경에는 아르메니아가 지난 9월 분쟁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한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1991년 독립 직후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이집트 주재 대사에게 겸임 대사를 맡게 하다 지난해 9월 상주 대사관을 이스라엘에 열었다.
이스라엘이 아제르바이잔에 무기를 팔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앞서 이스라엘 영어신문인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 무기체계의 60%가 이스라엘제라고 보도했다. 아제르바이잔이 터키제 드론과 함께 이스라엘제 드론도 이번 공격에 사용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번 통화는 이스라엘이 이런 상황에서 아르메니아를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아제르바이잔, 이란과 척지고 이스라엘과 친해
아제르바이잔은 무슬림 국가이지만 독립 이듬해인 1992년 이스라엘과 수교하고 전략적·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스라엘은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석유를 수입한다.
주목할 점은 2012년 포린폴리시가 이스라엘이 아제르바이잔의 협조를 얻어 카스피해 인근의 시탈차이 공군기지를 빌려 핵무기를 개발 중인 이란을 공습할 준비를 해왔다고 보도했다는 점이다. 이 기지에서 이란 국경까지는 500㎞정도 떨어졌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이를 부인했다.
아제르바이잔은 국경을 맞댄 이란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같은 무슬림 국가이자 다수가 따르는 종파도 같은 시아지만 반목을 계속해 왔다. 다민족 국가인 이란에서 전체 인구의 53%인 파르시(페르시아인)에 이어 아제르바이잔계는 18%를 차지해 둘째로 많다. 역사적으로 이란은 19세기까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캅카스 동부를 지배하다 전쟁 패배로 러시아에 넘겨준 이력이 있다. 현재의 이란은 아제르바이잔이 범투르크주의를 앞세워 자국내 아제르바이잔계 주민을 선동할까 우려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최근 미국 주도의 대이란 제재에 동참하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을 지지하면서 이란과 사이가 더욱 틀어졌다. 이번 분쟁이 격화하자 아제르바이잔은 이란이 아르메니아를 돕는다고 주장했지만 이란은 이를 부인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이번 분쟁은 종교나 종파와는 무관해 보인다. 민족주의가 캅카스 분쟁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다.
미국·프랑스·교황청 등은 분쟁 자제를 호소했다. 특히 프랑스의 호소는 분쟁의 뒤에 도사린 터키에 대한 견제구 성격으로도 평가됐다. 프랑스와 터키는 최근 동지중해와 리비아 사태를 두고 서로 대립해왔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싼 지역 내 민족 감정과 대립이 외세의 개입을 부른 셈이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이 10월 15일 워싱턴DC의 의회 의사당 앞에 모여 나고르노바라바흐 사태에 미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세운 아르차흐 공화국을 승인하라는 요구, 아르차흐의 기독교도들이 아제르바이잔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주장, 아제르바이잔의 공격 중지를 촉구하는 내용 등이 종이에 적혀 있다.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10월 15일 아르메니아는 자위권이 있다고 발언해 이번 충돌에서 아르메니아를 편드는 듯한 인상을 줬다고 AFP 통신이 지적했다. AFP=연합뉴스
문명 통로에서 기독교-이슬람 국가 대립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자리 잡은 캅카스 지역은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 러시아와 이란, 터키로 둘러싸인 곳으로 고대부터 ‘문명의 통로’ 구실을 해왔다. 두 나라 모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제정러시아가 무너진 뒤인 1918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1920년 소련의 공화국으로 병합됐다가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다시 독립했다. 두 나라 모두 아제르바이잔은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인 아제르바이잔인이 인구의 92%를 차지하며, 아르메니아는 고유언어를 사용하는 아르메니아 정교 신자인 아르메니아인이 인구의 98%를 차지한다. 종교와 언어, 민족 정체성이 확연히 다른 셈이다.
아제르바이잔은 면적 8만6600㎢(남한의 85%)에 인구 1010만 명, 아르메니아는 면적 2만9743㎢에 인구 300만이다. 2020년 국제통화기금(IMF) 명목 금액 기준 전망치로 국내총생산(GDP)은 산유국인 아제르바이잔이 416억6000만 달러로 세계 88위, 광업과 주류업이 발달한 아르메니아가 128억1000만 달러로 세계 130위이다. 1인당 GDP는 아제르바이잔이 4125달러로 세계 103위, 아르메니아가 4315달러로 98위다.
동아시아·한반도에 주는 교훈 새겨야
이번 분쟁과 휴전 과정을 살펴보면 사태의 본질이 보인다. 근본적인 원인은 과도한 민족주의에 따른 지역 내 뿌리 깊은 갈등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 갈등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자 외세가 개입했다. 개전도, 휴전도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도 외국산일 수밖에 없다.
터키는 어떻게든 분쟁에 개입해 범투르크 주의를 확산할 기회로 삼았다. 그러면서 드론을 비롯한 신종 무기 시장을 확대했다. 러시아는 역시 캅카스의 휴전중재는 옛 소련 당시 종주국이든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면서 양쪽에 무기를 팔았다.
이스라엘도 이 지역에 드론을 비롯한 무기를 팔았다. 유럽은 성명 외에 달리 개입하지 못했다. 중국도 자제를 요청하며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사례는 지역 갈등이나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외세가 끼어든다는 교훈을 준다.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머나먼 나라, 미지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나고로노카라바흐 갈등이 남의 일이 아닌 이유다.
〈분쟁 심층분석〉
나고르노카라바흐 중심지 스테파나케르트의 주민들이 10월 6일 방공호에 대피해 있다. AP=연합뉴스
캅카스 작은 충돌이나 역사적 뿌리 깊어
풍광 좋기로 이름난 캅카스 지역에서 코로나19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민족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근원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이 분쟁은 얼핏 보기에는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소규모 군사적 충돌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의 갈등과 분쟁을 국제적으로 중요하다. 아제르바이잔이 산유국이고 캅카스 지역이 오랫동안 서로 다른 문명권이 지배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인 역사가 있어서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 해에 접한 수도 바쿠와 주변에 거대한 유전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이곳 바쿠 유전을 향해 진군하다 소련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저지당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유전은 아제르바이잔 등과 카스피해를 공유하는 이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0월 12일 터키 수도 앙카라의 거리에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이르메니아와 교전 중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는 광고판에 세워져 있다.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같은 터키계로 언어와 풍습이 서로 가깝다. 이번 분쟁에서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에 시리아인 용병 부대를 보내고 드론을 비롯한 무기를 수출하는 등 지원을 이끼지 않았다. AP=연합뉴스
터키계 아제르바이잔, 터키와 가까워
아제르바이잔은 1991년 독립 뒤 같은 터키계 언어를 쓰는 터키와 러시아보다 더욱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역사적인 연유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튀르크군은 러시아 혁명으로 상황이 어지러웠던 이 지역에 일시 진출했다, 그러면서 캅카스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진 터키계 민족을 통합하고 통솔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908년 청년튀르크당의 군사 혁명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권력자가 된 엔베르 파샤(1881~1922년)는 터키어를 사용하는 문명권의 통합을 추진하는 범튀르크주의·범우랄알타이주의·범투란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캅카스와 중앙아시아의 터키어 사용 지역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세력권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구상이다. 대터키 구상이다. 엔베르 파샤는 1918년 이슬람군을 결성해 1차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세력 공백’ 상태가 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 입성했다.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오스만 튀르크의 동맹국으로 1918년 3월 볼셰비키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 남부 영토를 차지한 독일조차 이런 엔베르 파샤의 돌출 군사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에서 연합군 세력을 이끌던 영국은 경악했다. 오스만 튀르크 세력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면 최대 식민지이자 이권 지역인 인도까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08년 군사쿠데타로 오스만 튀르크의 권력자가 된 엔베르 파샤(1881~1922년).터키의 팽창을 원했던 그는 1918년 이슬람군을 조직해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를 점령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발생한 세력 공백을 틈탄 터키 세력의 캅카스 진출 기도였다. 엔베르 파샤는 1922년 프랑스 파리에서 동족 학살에 분노한 아르메니아계에 의해 살해됐다. 사진=위키피디아
오스만, 1918년 아제르바이잔 일시 점령
게다가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중동보다 먼저 석유가 발견된 전략적인 유전 지대였다. 당시는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당시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의 제안으로 함선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막 바꿨다. 석유에 강대국 간의 전략적 이해가 걸린 셈이다. 엔베르 파샤의 바쿠 입성 당시 놀랐던 영국은 1차 대전이 끝난 뒤 오스만제국을 갈기갈기 찢어 분할했다. 당시 적용한 논리가 ‘민족자결주의’였다. 이상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 제안했던 이 논리는 식민지의 독립이 아닌, 영국을 자극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실이 지배하던 중유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에 활용됐다.
터키 인도주의 구호재단(HH)의 직원이 10월 4일 수도 앙카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연대를 보여주기 위한 차량 행진을 앞두고 자동차에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달고 있다. AFP=연합뉴스
영국은 새롭게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소련도 경계했다.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의 무슬림 주민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캅카스의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다. 하지만 이내 이를 번복하고 1920년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지역을 다시 점령해 소련의 일부로 삼았다. 당시 캅카스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서로 갈등하며 분쟁을 일으키자 곧바로 개입해 양쪽을 모두 소련의 일부로 편입했다. 이를 지켜본 영국은 볼셰비키를 ‘새로운 러시아 제국주의자’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을 해체한 영국은 볼셰비키 제국주의자들이 감히 중동을 넘보지 못하도록 그 지역에 친영·친서방 정권을 세워서 유지하려고 계속 시도했다. 캅카스에서 세력권의 충돌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9월 27일 캅카스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교전이 격화한 가운데 아르메니아 측이 불발탄을 터뜨려 제거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캅카스, 종교·문명권 충돌하는 경계지역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캅카스 지역은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다.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지리적인 대륙,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계지대다. 이곳에서 지금 다시 총성이 들리고 가장 큰 이유는 캅카스산맥 한복판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다.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캅카스 남부 지역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한 주로서의 개념이다.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주민의 대부분은 아르메니아인이다. 아제르바이잔인은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이 대부분이고, 아르메니아인은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아르메니아정교를 믿는 기독교도다.
아제르바이잔인과는 역사도, 언어도, 종교도, 정체성도 다른 아르메니아인이 모여 사는 자치주가 나고르노카라바흐다. 과거 나고로노카라바흐 자치주는 아르메니아와 경계를 맞대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회랑을 통해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이 자치주에다 아르메니아 군대가 점령한 주변 지역을 합친 지역이다. 합치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게 됐다. 2017년 주민투표를 통해 아르메니아인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수 천 명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이 10월 11일 로스앤젤레스의 터키 영사관 앞에서 아르메니아 국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끝없는 갈등
캅카스의 갈등은 뿌리 깊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20세기 초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일시 독립한 이 두 나라는 잔혹한 폭력으로 점철된 일련의 분쟁을 겪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분쟁은 1918년 3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2년 8개월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제르바이잔은 처음 오스만 제국과, 나중에는 소련(엄밀하게는 러시아 소비에트)과 손잡고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과 아르메니아 본국이 연결되지 않고 아르메니아 한복판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거주지인 나히체반의 아제르바이잔인이 학살되기도 했다. 그 결과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모두 소련의 일부로 병합됐으며, 영토 문제는 미해결로 남았다.
아제르바이잔 군이 10월 9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진입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제공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소련 무너진 힘의 공백이 갈등 증폭
문제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옛 소련 말기인 1988년 내전으로 다시 불이 붙었다. 1988년 2월부터 1994년 5월까지 6년 3개월간 계속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다. 전쟁의 연유는 이렇다.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요구했다.
당시 붕괴로 치닫던 소련은 이를 조절하거나 말릴 정치력이 없었다. 이에 따라 사태는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이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계 주민과 소수의 아제르바이잔계 주민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졌으며 상대방이 자신들을 ‘인종청소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의회는 투표 결과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분리와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의결했다. 중간 과정으로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을 선포했다. 일단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돼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라는 주체로서 아르메니아와 통합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다. 소련에서 분리되면서 잠시 여유가 없었던 아제르바이잔은 내정 불안이 진정된 1992년 이 지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이 나선 중재가 결렬된 것도 계기가 됐다. 1993년 봄에는 아르메니아 군도 나서 나고르노카라바흐로 이어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영토를 점령했다.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외교 장관(왼쪽부터)이 10월 9일 모스크바에 모여 나고르노카르바흐 지역에서 벌어진 교전을 중지하고 휴전을 이루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지역 분쟁은 다시 외세의 개입을 불렀다. 10일 휴전이 발효됐지만 교전은 계속되고 있다. AP=연합뉴스
휴전만 하고 평화협정 없어 불씨 남아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 1994년 당시 아르메니아 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아제르바이잔 전체 영토의 9%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즉 아르차흐 공화국의 영토가 됐다. 전쟁의 결과 아제르바이잔 각지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23만 명과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살고 있던 아제르바이잔인 80만 명이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아르메니아인은 아르메니아로, 아제르바이잔인은 아제르바이잔으로 추방된 것이다. 분쟁의 결과 인구 교환이 이뤄진 셈이다.
결국 러시아가 휴전을 중재해 1994년 5월 휴전협정이 이뤄졌다. OSCE에 ‘민스크 그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양국 간 평화회담을 계속하기로 했다. 캅카스 한복판에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정전만 이뤄진 채 ‘평화협정’이 미뤄지고 있는 셈이다.
나고르노카르바흐의 아그담 마을에서 숨진 29세 청년의 묘지 잎에 10월 15일 가족들이 모여 오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과잉 민족주의의 비극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즉 아르차흐 공화국은 현재 국제적인 미승인 상태다. 아르메니아를 포함해 이를 국가로 승인한 유엔 회원국은 아무도 없다. 다만, 유엔 비회원국으로 비슷한 신세인 트란스니스트리아·남오세티아·압하지야 등이 독립을 인정할 뿐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국가로 승인한 이 세 나라(또는 지역)는 모두 옛 소련의 영토였는데, 분리 독립 과정에서 별도의 국가로 독립을 시도했다가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받기 힘든 상황을 겪고 있다. 역사적인 특수성, 지리적인 특이성, 영토 욕심의 은폐 목적 등의 이유로 독립을 승인한 나라들이다.
결국 캅카스 국가들은 글로벌 사회에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과도한 민족주의 문제로 서로 갈등하다 인명피해를 수반한 분쟁으로 이어진 셈이다. 비극적인 분쟁이 벌어지자 비로소 전 세계가 관심을 보인다.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는 과잉 민족주의의 비극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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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2020.10.18 22:31
신문에서 이런 수준높은 글을 볼 수 있다는것이 놀랍습니다. 거의 논문 수준이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아르메니아도 한국처럼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계속해 침략당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죠... 험한 역사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서 그런지 민족성은 지독하고 인간미도 좀 별로이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편견 일 수 있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글렌데일 은 해외에 있는 가장 큰 아르메니아 인들이 모여사는 도시 (주민의 반 정도가 아르메니아인) 인데 이곳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소녀상이 세워 졌다. 고난 당한 민족끼리 서로 통하는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듯하다...
좋아요40화나요1 -
cock****2020.10.18 18:47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분쟁 배경을 설명하는 장황한 기사를 쓰면서 아제르바이잔(정확히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다루지 않은건 큰 실수한 겁니다. 세계에 문화와 종교가 다르고 타 민족 속에 섬처럼 살면서도 큰 문제 없이 사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들이 이렇게 1세기 넘게 싸우는건 대학살의 앙금 때문입니다.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지만, 아르매니아인 60~80만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아제르바이잔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울러 터키가 형제국이다 이런 얘기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하고도 이를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는 나라, 키프로스 무력 침공하여 나라 두동강 내놓고 괴뢰정권 세운 나라, 쿠르드족 탄압하는 나라로 국제적 이미지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터키인 상대로 장사할거 아니면 형제국 운운할 필요 없습니다(역사적으로 사실도 아니고)
좋아요32화나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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