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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진방남(秦芳男)과 작사가 반야월(半夜月)

Jimie 2024. 5. 6. 08:08

진방남-잘있거라 항구야

1940

천아토 작사, 이재호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YzwEs03u2lU 

 

문화칼럼 - 반야월(半夜月)

민경탁 논설위원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

입력 : 2021년 07월 15일

 

반야월(半夜月)
민경탁 논설위원


1939년 7월 김천극장에서 조선일보·태평레코드사 주최 전국신인가수 선발콩쿠르가 열렸다. 일본 오사카에서 함경도까지 전국에서 참가비 3원을 내고 접수한 몇 백 명이 모여 이틀간 걸쳐 예선, 결선을 치렀다. 1등에 마산 출신의 박창오가 뽑혔다. 김천극장 옆 여관에서 가수 백년설과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고려성이 입상자 박창오에게 진방남(秦芳男)이란 예명을 지어줬다. 진나라의 꽃다운 향기 나는 남자가 되란 의미였다. 이로써 진방남은 전속료 40원에 한 곡 취입 수당 80원으로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됐다. 커피 한 잔에 5전, 냉면 한 그릇에 15전, 세끼 한 달 하숙비가 12원할 때다.

진방남은 태평레코드사에서 <사막의 애상곡>(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1939)을 첫 곡으로 하여 <탄식하는 종각 뒤>(초적동 사, 이재호 곡) <잘 있거라 항구야>(천아토 사, 이재호 곡)를 발표하면서 가수로서의 명성을 얻어갔다. 백년설이 나그네 스타일의 노래를 잘 한다면, 진방남은 고음 저음을 막론하고 마구 잘 부른다 하여 ‘휘뚜루마뚜루’란 별명을 얻었다. 가수 진방남, 그가 대중의 인기를 얻은 가요들이 <불효자는 웁니다> <잘 있거라 항구야> <마상일기> <세세년년> <하물선 사랑> <고향만리 사랑만리> <꽃마차> 등이다.

진방남은 1940년 하숙집 주인의 이질녀인 김천 남산동 출신 윤경분(尹京紛)과 결혼했다. 장인이 김천 남산동의 윤제균(尹濟均), 장모가 서태경(徐泰慶)이다. 김천에서 풍각쟁이 사위감이라 반대하는 걸 진방님이 어렵게 설득, 허락을 얻어냈다. 마침내 진방남과 윤경분이 서울 광화문 금구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충신동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진방남은 6·25전쟁 때 처자식을 잃고 떠돌다가 피란 갈 곳이 없어지자 김천 남산동의 처가로 찾아들기도 했다.

가수 진방남이 작사가 반야월(半夜月)이 되었다. 1

1942년, 아세아악극단의 평북 영변, 만주 일대 순회공연에 그가 특별출연을 하고 다닐 때다. 작곡가 김교성과 함께 여관방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진방남이 <넋두리 이십년> <꽃마차>를 작사해 김교성, 이재호 등에게 보였다. <꽃마차>는 만주 하얼빈에서 느낀 이국의 정취를 읊은 노랫말. 진방남은 여관방 창 너머로 보이는 달을 보곤 만월보다는 겸양의 뜻을 담아 ‘반야월’을 필명으로 삼고자 했다. 이 두 곡의 음반이 제작될 때 가사지와 라벨에 ‘반야월’이란 작사가명을 처음으로 새겨 넣었다.

반야월은 세 가지 한(恨)을 지니고 일생을 산 가요작가이다.

 

큰누이동생(창순)이 평남 진남포로 시집가서 생이별, 작은누이동생(귀순)이 안주의 어느 집 수양딸로 보내졌는데 6·25 때 임신한 몸으로 38선을 넘으며 쌍둥이를 낳다 태아와 산모가 모두 절명한, 이산가족의 설움이 첫 번째 한.

 

1940년 7월 일본에서 가요 <불효자는 웁니다>를 취입하기 직전, 어머니 별세 전보를 받으며 임종을 못 한 것이 두 번째 한.

 

6·25 전화(戰禍) 도중 부인이 혼자서 네 살짜리 둘째딸을 업고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다 화약연기에 질식해 아이가 사망, 호미로 미아리고개에 묻고 온 아픔이 세 번째 한이란다.

미아리고개의 이 뼈아픈 사연을 가요로 풀어낸 것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사, 이재호 곡, 이해연 노래, 1957)다.

 

가수 진방남은 1950년대 들면서 작사활동에 주력했다. 마산방송국 문예부장,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창설위원 및 부회장을 거치며  정부의 공보실, 교통부, 문교부 추최 가사 공모에 두루 입선을 하면서부터다.

 

반야월, 이 예명으로 그는 80여 년 간 3천5백여 곡의 가요시를 지으며 전국의 9곳에 자신의 노래비를 남겼다. 잘 알려진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 고개> <소양강 처녀> <무너진 사랑탑> <산장의 여인> <만리포 사랑> <두메산골> <삼천포 아가씨> <아빠의 청춘> <열아홉 순정> <유정천리> <잘 했군 잘 했어> <행복의 일요일> <딸 칠형제> <마도로스 박> <벽오동 심은 뜻은> <남성 넘버 원> 등등이 서민적, 낭만적, 휴머니즘적 성향 농후한 그의 히트곡이다.

작사가 반야월은 이외에도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浦), 남궁려(南宮麗), 금동선(琴桐線), 허구(許久), 고향초(高香草), 옥단춘(玉丹春), 백구몽(白鷗夢) 등 여러 필명을 쓰며 월북 작가의 작품을 개사, 보사하여 보전했다. 추미림은 작곡가 이재호· 박시춘· 이용준에게 가사를 줄 때에, 박남포는 김해송· 이봉룡에게 가사를 줄 때, 남궁려는 손목인에게 가사를 줄 때 즐겨 사용하던 예명이다.

반야월 생전에 한국가요사 자료를 구하러 충무로에서 여러 번 뵈온 적이 있다. 한국가요작가협회 사무실을 겸해 쓰고 있는 사무실에 들리면 으레 작곡가 오민우, 가수 금사향, 협회의 김병환 이사장 등과 함께 계셨다.

 

귀중한 한국가요사 자료를 많이 얻어올 수 있었다. 점심 때가 되어 모두들 식당으로 가 식사를 하고, 내가 계산을 하려하면 식당주인이 “반야월 선생께서 계산 하셨습니다” 한다. 식당을 나와 다방에 들렸다.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 값이라도 내가 지불해야지 하는 맘으로 계산대에 다가서면 이번엔 마담이 “반야월 선생께서 계산 하셨습니다”고 한다. 선생께 왜 이러시냐 물으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 무슨 돈이 있어, 내가 내야지”하신다. 당시 주위 분들에 의하면 반야월이 받는 저작권료가 월 9백만 원에서 조금 빠진다 고 했다.

반야월은 충북 제천 박달재에 한국대중가요박물관을 세우자고 했다. 어느 레코드회사 창고에 방대한 한국대중가요사 자료가 휴면상태로 잠겨 있으니, 이를 가지고 자신의 대표곡 <울고 넘는 박달재>의 탄생지인 박달재에 한국대중가요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며. 장차 자신도 그 옆에 눕겠다고 했다. 지금 한국가요사 1세대의 마스터 키요, 풍류 휴머니스터였던 반야월은 명예제천시민, 충북도민이 되어 박달재에 영구히 누워있다.

김천에서 개최된 신인가수선발대회에서 가수가 된 반야월이 타계하고 강산이 한 번 변할 때가 되었다. 한국가요사의 개화, 격동기에 조명암-박영호 뒤를 이은 걸출한 가요작가 반야월이 박달재에서 생전의 주장을 외고 있는 듯하다. “흘러간 가요가 아니라 흘러온 가요야!”.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
입력 : 2021년 07월 15일 
 
 
 

화물선(貨物船) 사랑 -- 秦芳男진방남(=半夜月반야월)

1940

處女林처녀림ba朴英鎬박영호=不死鳥불사조  작사,

霧笛人무적인ba李三同이삼동=李在鎬이재호=南村人남촌인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esuimMpVOXc 

 
 
"貨物船" 사랑 (1940) 
處女林 (朴英鎬) 작사/ 霧笛人 (李在鎬) 작곡/ 노래 秦芳男  (半夜月)
(앨범/ 1940.08 태평레코드 발매 GC 3005 A/B SP 꿈꾸는 港口線 白年雪 / 貨物船 사랑)
 


< 1 >
간다간다 떠난 港口 
안개 속에 그 港口
貨物船 뱃머리에 
매달리던 그 處女

울지마라 太徵아 
네가 울면은
매달리던 그 處女가 
다시 그립다~

< 2 >
온다온다 떠난 埠頭 
사랑 매낀 그 埠頭
두 토막 옷소매에 
百日紅을 그렸오

울지마라 太徵아 
네가 울면은
百日紅 옷소매가 
다시 野俗타~

< 3 >
떠나갈 때 안 오마는 
모진 님을 봤느냐?
온다고 떠난 님이 
돌아온 님 봤느냐?

울지마라 太徵아 
네가 울면은
허물어진 盟誓나마 
다시 아깝다~
 
 
 

 

 

무역선 사랑-- 진방남 

1957 

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

https://youtu.be/uSw7fdpHE8s

 

 

검은 연기 토하면서 무역선아 떠나느냐

저문 바다 실안개 속에 속절없는 이별이냐

아주까리 그늘 밑에 우느냐 항구 아씨

기약없는 님 이별엔 옷고름만 짓씹는다 

 

별이 걸린 섬을 돌아 무역선아 떠나느냐

주고받을 인사도 없는 매정스런 이별이냐

날개 지친 어린 새가 그 순정 바쳤드니

구름같은 이 내마음 믿은 내가 어리석소 

  

무역선아 가려무나 네 갈 데로 가려무나 

열번 백번 속았든 내가 천번인들 못 속으랴

배 떠나간 바다 우에 남은 건 거품이냐

흘러가는 별이드냐 이별하는 항구드냐

 

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으로 발표된 이 곡은 가사는 반야월이 다시 쓴 것으로

주제는 화물선 사랑과 큰 차이가 없는 "항구의 이별"이지만 표현이 더 이미지를 가미하고 서정적이며 아름답다.

 

화물선(貨物船) 사랑/진방남 노래(1940)  친일 작사가 박영효가 월북하면서 금지곡의 운명이 되자

반야월(진방남)이 가사를 다시 쓰고 나화랑이 작곡한 무역선 사랑--진방남 노래(1957)도 

이재호 작곡의 "화물선 사랑"과 선율이나 서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무역선 사랑--진방남 노래(1957)

https://www.youtube.com/watch?v=K06Al8YZUYE 

 

 

 
 

박영호(朴英鎬, 1911~1953) 

 
1934년 강석연의 ‘견우화’, 1935년 김복희의 ‘직녀의 탄식’, 1941년 고운봉의 ‘칠석의 정’과 백난아의 ‘직녀성’ 등은 견우직녀의 설화를 다룬 광복 이전의 노래들이다.
 
이 중 백난아가 노래한 ‘직녀성’은 원래 박영호가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것으로 광복 이후까지도 여러 차례 다시 발매될 만큼 크게 유행하였다.
 
“오작교 허물어진 두 쪽 하늘에 절개로 얽어 놓은 견우 직녀성/ 기러기 편지 주어 소식을 주마기에 열 밤을 낮 삼아서 써놓은 글발이요”라는 2절의 노랫말에 직녀가 견우에게 전하는 간절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
 
본명이 오금숙인 제주도 출신의 백난아는 함흥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그곳에서 열린 콩쿠르 대회에 출전하여 가수로 데뷔했다. 광복 후 작사가 박영호(朴英鎬, 1911~1953)가 월북하는 바람에 한동안 본래 노랫말 그대로 노래할 수 없게 되자, 반야월이 ‘추미림’이란 예명으로 노랫말을 수정하고 2절과 3절의 순서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