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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北 龜尾 朴正熙大統領 生家

Jimie 2024. 5. 6. 08:01

류지미 2023. 10. 4. 04:32

 

(06) 慶北 龜尾 朴正熙大統領 生家 (下)
 

大統領의 香氣室   -2018.09.04사진


 

(21) 朴正熙大統領-陸英修女史 모습


(22) 金烏山의 精氣 – 朴正熙大統領의 出生
   =金烏山의 精氣
    朴大統領이 태어난 上毛洞은 서북쪽에 金烏山을 등지고, 동쪽으로 洛東江을 바라보고 있는 地勢로 옛날부터
    ‘背山臨水’라고 하며 吉地로 여겼다. 嶺南士林學派의 씨를 뿌린 冶隱 吉再가 태어났으며, 新羅佛敎의 聖地
    太祖山 桃李寺도 이곳에 있다. 善山은 冶隱이외에도 丹溪 河緯地, 新堂 鄭鵬(조선 前期의 文臣)을 배출한 곳이며,
    太祖 王建이 甄萱을 무찌르고 後三國을 통일하는 決戰場이었다. (*冶: 풀무 야 *隱: 숨을 은 *桃: 복숭아 도
                 *緯: 씨 위 *鵬: 붕새 붕 *甄: 질그릇 견 *萱: 원추리 훤)
    *背山臨水: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聚落이 立地條件으로, '산을 뒤로 등지고 앞으로는 河川을 마주보고
          위치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傳統民間思想인 風水地理와 관련되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에
          適應한
 祖上들의 實用的인 지혜로 여겨진다.

   =朴正熙大統領의 出生
    朴正熙大統領은 1917.11.14 慶北 善山郡 龜尾面 上毛里에서 7남매의 막내로 出生했다. 父親 朴成彬은
    高靈 朴氏로 
中興始祖 直講公의 15代孫이며, 母親 白南儀 女士는 水原 白氏로 고향은 善山郡 龜尾面이다.
    朴大統領이 태어날 
당시 上毛里는 당시의 農村을 상징하는 가난한 마을이었으며, 朴大統領 집안도 역시
    貧農家로 어린시절 극심한 
가난의 苦痛은 훗날 經濟大統領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彬: 빛날 빈)


(23) ‘대추방망이’ 少年
      朴正熙大統領은 어렸을 때부터 작지만 야무진 性格을 지니고 있어 別名이 ‘대추방망이’였다고 한다.

   =李洛善 備忘錄
    成績은 全科目이 우수하고 暗記力이 좋아 算數, 歷史, 地理등은 늘 滿點이었으며 思考力이 예민했다.
    級長으로 統率力이 탁월해 自習時間에는 學友들을 指導하고 學級運營도 잘했다.
   =作故한 同期生 장월상의 증언
    朴正熙는 어릴 때 몸집은 비록 작았으나 야무져 별명이 ‘대추방망이’였다. 體軀에 비해 膽力이 세고 머리가
     비상하고 暗記力이 뛰어났다. 3학년때 학예발표회 연극에서는 老人役을 맡아 學父兄과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 (*軀: 몸 구 *膽: 쓸개 담)


(24) 熱情으로 가득 찬 20세의 젊은 敎師
   =大邱師範學校 入學과 生活
    1932년 大邱師範學校에 上位圈成績으로 입학했으나 日本人과 韓國人의 差別待遇에 불만을 품고, 學業보다는
    世界文學全集, 古典, 歷史, 小說등 다양한 讀書를 섭렵하면서 知的, 靈的世界를 넓히고 敎養을 쌓았다.

   =聞慶普通(初等)學校 敎師生活
    民族魂을 일깨운 선생님.
    1937년 師範學校를 졸업하고 그해 봄 聞慶普通(初等)學校에 敎師로 부임했 다. 그는 가난한 학생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여 12km떨어진 僻村까지 자전거를 타고 弟子의 家庭을 방문해 사람들을 感動시켰다. 또 학생들에게
    民族과 나라의 所重함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 끼리 있을 때는 우리말을 쓰자.”고 했으며, 朝鮮語를 가르치며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日本人校長이나 敎師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복도에
     학생을 
세위 망을 보게 하고 太極旗와 朝鮮의 歷史 및 시조를 가르치기도 했다.


(25) 朴正熙大統領 遺品


(26) 淸廉한 軍人 (*廉: 청렴할 렴)
    1950年代 軍의 不正腐敗가 심해 軍需物資가 釜山國際市場으로 流出되고, 厚生事業이 恣行되었다.
    將軍의 月給이 쌀 한 가마니 수준으로 生計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으나 軍人 朴正熙는 의연하게 지냈다.
    將軍이 되어서도 淸貧해 남의 집 셋방살이를 轉轉하고, 때로는 糧食이 떨어져 陸英修女史가 몰래 쌀을 꾸러
    다니기도 했다. 第5師團長 在職때 서울에 있는 이삿짐을 실어 나른 運轉技士 이타관은 그때를 이렇게 懷古했다.
          (*恣: 마음대로 자 *腐: 썩을 부 *懷: 품을 회)
    “서울에 와보니 鷺梁津驛앞의 셋방은 아직 비어 있지 않았다. 돈에 맞추어 집을 얻다 보니 부엌도 없고 아궁이가
     마루밑에 있어 솥을 걸 곳이 없었다. 군인들이 비옷으로 쓰던 고무 장옷을 방바닥에 깔아 놓고 漏氣가 차서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그런 房이었다. 내가 “장군님도 너무 하시네요”라고 하자 사모님은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도 
있잖아요”하며 오히려 나를 타이르는 것이었다. (*鷺: 왜가리 노 *漏: 샐 누)



(27) 激動의 時期를 헤치며.
  =混亂의 時代와 5∙16革命
    4·19혁명으로 李承晩政權은 물러났으나 社會의 혼란은 如前했다. 政治는
   系派와 政黨間의 갈등이 극심했으며, 過去事 眞相糾明要求, 學生·勞動者의 데모,
   敎員勞組結成등에 대해 정부는 指導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잦은 內閣更迭로
   리더십의 不在를 나타냈다.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混亂해지고, 매일 8건의 示威가
   일어났으며, 평균 8,000여명이 참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나라의 將來를
   傍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朴正熙 將軍은 大韓民國의 危機를 극복하기위해 1961년
   5월 16일 뜻을 같이하는 同志들과 함께 ‘革命’의 非常手段을 斷行했다.
   朴正熙大統領은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革命을 일으켰으며. 革命成功後 腐敗와
   不正으로 混濁된 舊習을 제거하고 民族의 精氣를 바로잡아 自立과 自律의 民族的
   主體意識을 확립해 民生苦를 해결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유달순 著. <박정희대통령 통치철학>에서 발췌)
  =朴正熙大統領이 1961년 5∙16혁명을 앞두고 龜尾 金烏山上空을 지나며 남긴 말
    -國民에게 -鄕土先輩에게 (*49번 사진 참조)


(28) 大統領執務室 展示遺品


(29) [有備無患] 1974년 5월 21일 -朴正熙大統領 親筆揮毫
       -대통령기록관 所藏 (*毫: 터럭 호)


(30) 1960년대 - 1970년대
     =1960년대; 祖國近代化의 힘찬 발걸음
     =1970년대; 繁榮의 來日을 향하여


(31)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韓國社會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70.04.22 旱害對策을 숙의하기 위해 소집된
    地方長官會議에서 대통령 朴正熙는 水災民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農村再建運動에 착수하기 위해 勤勉∙
    自助∙自立精神을 바탕으로 마을 가꾸기 사업을 提唱하고 이것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새마을운동初期에는 단순한 農家의 所得倍加運動이었으나 많은 成果를 거두면서 都市∙職場∙工場에까지
    확산되어 勤勉∙自助∙協同을 生活化하는 意識改革運動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自立해 先進國隊列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意志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준 政府主導의 國民的 近代化運動이었다.
    새마을운동은 朴正熙大統領의 철저한 祖國近代化精神의 所産으로 1970年代의 驚異的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驚: 놀랄 경)


(32) 勳章∙褒章
    (왼쪽부터) 協同章 -勤勉章 -自助章 -努力章 -自立章 -褒章 (*褒: 기릴 포)


(33) 소파와 벽에 걸린 사진


(34) 自主國防 – 治山綠化와 自然保護運動
   =自主國防
    -1964.07 베트남戰 同議案 可決   -1966.06 韓國軍 裝備現代化計劃 발표   -1968.04 鄕土豫備軍 창설
    -1970.08 國防科學硏究所(ADD) 創設 -1971.11 重火器 국내생산계획 발표    -1971.11 民防空訓練 실시
    -1975.11 艦對艦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1978.09 國産 長距離誘導彈, 多連裝로켓 시험발사 성공
    -1978.11 韓美聯合司令部 발족
  =治山綠化와 自然保護運動
    -1961.12 山林法 제정   -1963.02 國土綠化促進에 관한 臨時措置法 公布  -1965.04 治山綠化 7個年計劃 成案
    -1971.07 서울지역에 그린벨트 最初指定  -1973.03 제1차 治山綠化 10개년계획 발표
   -1977.10.07 肉林의 날 선포  -1978.10 自然保護憲章 선포  -1979 제2차 治山綠化 10개년계획 발표


(35) 가슴으로 보듬은 國民을 향한 사랑
   =국민을 위해 흘린 따뜻한 눈물
   1964년 12월 借款導入을 위해 西獨을 방문한 朴正熙대大統領이 首都
   본(Bonn)에서 주요일정을 마치고 루르(Ruhr)지방에 가서 韓國鑛夫와
   看護員들을 위로하고 연설하는 중에 눈물을 흘려 瞬息間에 講堂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瞬: 깜짝일 수)

  =慈愛로운 令夫人 陸英修(1925~1974)   -忠北 沃川 出生
   1960~70년대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 이는 陸英修女史였다. 경제발전을 위해
   힘든 노동을 견뎌가며 일하던 이들과 社會의 그늘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사람들을 陸女史는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36) 웃음 가득 찬 朴正熙大統領과 陸英修女史
       -大統領의 발자취室-


(37) 胸像홀로그램, 國民敎育憲章 (*胸: 가슴 흉)
 
 

(38) 아시아 龍에서 地球村 經濟리더로.
   =輸出 入國과 重化學工業 育成
    1960年代初까지만 해도 韓國은 우간다, 수단, 튀니지, 카메룬 등 아프리카國家들보다 수출규모가 작고 국민소득도
    필리핀보다 적은 나라였다. 그러나 朴正熙大統領 政府主導의 강력한 産業競爭力 강화정책이 추진되고, 韓國民의
    勤勉함과 敎育熱, 손재주 등이 더해져 수출규모가 크게 성장했다. 1964년 수출이 1억$였으나 1977년 100억$,
    2011년에는 5,000억$를 돌파했다. 1인당 國民總所得(GNI)이 1963년 필리핀의 170$보다 적은 103$에 불과했던
    韓國은 1977년 1천$, 2000년 초반 2만$로 늘어났다.
  =科學技術 發展
    朴正熙大統領은 經濟開發에 科學技術의 중요성을 認識하고 1966년 韓國科學技術硏究所(KIST)를 설립했으며,
    1967년 科學技術振興法을 制定, 科學技術處를 設立하고 과학기술발전의 기초를 구축해 科學技術發展에
    一大 轉換點을 만들었다.


(39) 未來戰略家, 朴正熙大統領 -未來學者 허만 칸과의 만남
    朴正熙大統領은 未來學이 막 胎動하기 시작한 1960年代初에 當代最高의 戰略理論家이며 未來學者
    Herman Khan(1922~1983) 허드슨 硏究所長과 交友하면서 우리나라의 새로운 未來를 열기 위한 끊임없는
    挑戰을 試圖했다.


(40) 朴正熙大統領, 獨逸 뤼프케大統領, 獨逸派遣 看護師와 鑛夫
 

(41) 보릿고개 體驗場

   *보릿고개

    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음력 4~5월), 農家生活에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운 고비로, 春窮期, 또는 麥嶺期라고도 한다. 최근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農家所得도 늘어나 ‘보릿고개’라는

    말이 實感나지 않으나, 日帝强占期에는 두말할 나위 없고 8·15光復後 1950年代까지도 年例行事처럼 찾아 들던

    농촌의 貧困相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窮: 궁할 궁 *麥: 보리 맥)

    요즘 靑·壯年層들은 ‘보릿고개’라는 用語도 모를 것 같다.

 

(42) 朴正熙大統領 銅像으로 가는 길 옆에 탐스럽게 열린 감

 

(43) 朴正熙大統領 銅像으로 가는 길

 

(44) 朴正熙大統領 歷史資料館 建立工事 -2018.09.04 사진

    -공사기간; 2017.12~2019.05 -發注處: 龜尾市廳 -垈地면적; 77,021㎡ -건축면적; 1,736㎡/延面積; 4,358㎡

    -主用途; 문화 및 집회시설(展示場∙ 第1種 專門博物館).

 

(45) 朴正熙大統領 銅像

   朴大統領의 94회 誕辰祭와 함께 2011.11.14 除幕되었다. 2009년 4월에 구성된

   동상건립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3만여명의 募金으로 銅像을 건립했으며,

   김원영 弘益大美術大學 敎授가 설계했다.

 

(46) 朴正熙大統領 銅像 앞에서 기념촬영

 

(47) 님이 고이 잠든 곳에   ―1975.08.14 -詩 朴正熙

    陸英修女史: 1974.08.15 光復節紀念式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壇上에서 朝總聯系 文世光의 狙擊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님이 고이 잠든 곳에/방초만 우거졌네/백일홍이 빵긋 웃고

     매미소리 우지진데/그대는 내가 온 줄 아는지 모르는지

                  - 중략 -

     해와 달이 뜨고 지니/세월은 흘러 가고

     강물이 흘러 가니/인생도 오고 가네

     모든 것이 다 가는데/사랑만은 두고 가네.

 

(48) 中興亭

 

(49) 國民에게, 鄕土先輩에게

    1961년 5월 朴正熙大統領께서 第2軍 副司令官으로 在職中 軍事革命을 하기 위해 飛行機便으로 上京中에

    龜尾 金烏山上空을 지나면서 쓴 글이다.

  = 國民에게

    荒波에 시달리는 三千萬 우리同胞

    언제나 구름 개이고 太陽이 빛나리.

    千秋에 恨이 되는 祖國秩序 못 잡으면

    내 民族앞에 鮮血바쳐 充血寃魂 되겠노라. (*寃: 원통할 원)

  = 鄕土 先輩에게

    嶺南에 솟은 靈峰 金烏山아 잘 있거라.

    삼차 걸쳐 成功 못한 興國一念 朴正熙는

    一片丹心 굳은 決意 所願成就 못하오면

    快刀割腹 맹세하고 一擧歸鄕 못하리라. (*快: 쾌할 쾌 *擧: 들 거)

 

(50) 京釜高速道路에서 車窓밖으로 보이는 龜尾 金烏山

   *金烏山(△977m)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道立公園으로 지정.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大本山이었으나 中國 五岳가운데 하나인 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南崇山이라고도 했다.

    金烏山이라는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金烏山이라 이름

    짓고, 太陽의 精氣를 받은 名山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奇巖怪石이 어우러져 壯觀을 이루고 있으며 경사가

    급하고 험난한 편이나, 頂上部는 비교적 평탄한데 이곳에 있는 高麗時代의 金烏山城(경북기념물 67호)은

    壬辰倭亂때 倭敵을 방어하는 要塞로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