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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Jimie 2024. 5. 6. 05:00

베르톨트 브레히트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류지미 2023. 8. 18. 11:00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그래도 지구는 돈다

출생1898년 ~ 사망1956년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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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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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에서
 
 

독일에서 괴테 이후 세계적 명성을 날린 3대 작가로 토마스 만(Thomas Mann),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를 꼽는다. 이중 브레히트는 연극을 혁신해 현대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 근거한 연극이 클라이맥스, 엔딩의 구조 속에 감정이입을 높여가며 카타르시스를 주는 데 비해 브레히트가 내놓은 서사극(敍事劇)이란 관객과 무대 위의 등장인물 사이의 감정이입을 차단하여 관객이 객관적 입장에 머물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관객은 무대 위의 연기에 덜 사로잡히고 실제 정보를 중심으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다. 희곡 구성도 반전, 경악, 폭로 등과 관계없이 서사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전개한다.

브레히트에게 문학의 형식보다는 내용과 효용성이 중요했다. 〈서푼짜리 오페라(Per Dreigrochenoper)〉 등 탁월한 희곡 48편 완성했고, 미완성 희곡 50편, 2,300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작품엔 리얼리스트답게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랑의 편린이 배경으로 들어있다.

어느 푸르른 날 자두나무 아래

브레히트가 열여덟 살 되던 1916년 여름 어느 날 오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평소 안면이 있는 마리아(Maria Amann, 1901~1988)를 만나 사귀게 된다. 브레히트는 학교 당국의 호출받아 퇴학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열 살 때 김나지움에 들어와 시를 쓰기 시작했고, 열여섯 살 때 가명으로 〈아우구스부르크〉 신문에 단편소설을 발표할 정도로 글재주가 좋았다. 그런 브레히트가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 평화사상이 깃든 산문을 제출했다가 불순 사상을 지닌 학생으로 낙인찍혀 퇴학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다행히 종이 공장 사장인 아버지의 노력으로 그의 퇴학은 면할 수 있었다.

퇴학 처분이 취소되면서 마음이 편해진 브레히트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이발사의 딸 마리아를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날 처음 이발소가 아닌 곳에서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날 자두나무 아래에서 기습키스를 하면서 마리아와 브레히트는 동화 같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순진했던 마리아는 한 번뿐인 입맞춤으로 임신했다는 불안감에 브레히트를 피했다.

기다리다 못한 브레히트가 이발소로 찾아갔지만, 마리아를 만날 수 없었다. 그곳엔 언니가 있었다. 브레히트는 마리아의 언니에게 작업을 걸지만, 거절당한다. 이후 마리아는 브레히트가 너무 저돌적이어서 부담스럽다며 친구 파울라 반홀처(Paula Banholzer, 1901~1989)를 소개해준다. 하지만 둘 사이가 진전되자 박식한 데다가 청산유수인 브레히트를 떨치지 못해 1920년 여름까지 관계를 맺는다.

후일 브레히트가 마리아를 추억하며 지은 시가 〈어느 푸르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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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푸르른 날, 하늘에 조각구름 하나만 떠 있던 날.
자두나무 그늘에서 그녀를 안았네.
창백하고 고요한 그녀를 꿈결처럼 안았네.
한참 후에 하늘을 보니 한 조각구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네.
그날 이후 무수한 시간이 흔적 없이 사라졌지.
이제 와 그 사랑 어찌 되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잊었다고만 말하리.
다만 남은 추억은 그녀와 첫키스한 그 순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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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사탕과 태양

마리아와 브레히트의 사랑은 2년간 계속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파울라가 알게 되면서 벼락같은 화를 낸다. 파울라를 찾아간 브레히트는 자신의 잘못을 빌어 용서를 받곤 마리아에게 조용히 다시 만나자고 제안한다. 마리아는 브레히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파울라를 먼저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한 뒤 둘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다.

브레히트는 몰래 만났던 첫사랑 마리아가 완전히 떠난 뒤, 오직 파울라에게만 집중한다. 파울라는 브레히트를 ‘나의 경배 세상’, ‘내 태양’이라고 부르고, 브레히트는 파울라를 ‘비(BI, Bittersüβ)’란 애칭으로 부르며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파울라는 아우크스부르크 병원의 유명한 의사 딸이었고 브레히트는 당시 뮌헨대 의학 전공 중이었기에 두 사람은 맞는 구석도 없진 않았다.

파울라 반홀처

 

한동안 둘만의 사랑에 만족하던 브레히트는 금세 본성을 드러낸다. 눈에 또 다른 여성이 들어왔다. 브레히트는 떠나버린 마리아의 순진성, 수용성, 순응성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아가씨 테레제 오스트하이머(Therese Ostheimer)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어쩌다가 참여한 가톨릭 미사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브레히트는 설레는 가슴으로 구애 편지를 보냈는데, 테레제의 아버지에게 발각되면서 혼쭐난 뒤 끝났다.

결국 다시 파울라에게 집중하던 브레히트는 졸업을 기념해 준다며 슈타른베르크 호수로 여행을 갔다가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뒤 임신하게 된다. 이 일로 브레히트가 파울라의 아버지를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작가지망생에게 뭘 믿고 딸을 주느냐”며 거절당한다. 그리고 딸에게는 “차라리 혼자 애를 기르며 살라”고 했다.

결혼과 이중생활

결혼도 하지 않은 파울라는 배가 불러오자 의사인 아버지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 먼 시골 마을로 내려간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로 내려가 남들 몰래 아들 ‘프랑크(Frank)’를 낳는다. 이 시기 뮌헨 의대에 재학 중이던 브레히트는 극작가로도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틈틈이 몰래 찾아온 파울라와 즐거운 시간도 보낸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같은 의대생인 헤다 쿤(Hedda Kuhn, 1898~1976)과 교제 중이었다. 두 사람은 의학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 함께 연극 비평과목을 수강하며 친해졌다. 그런데 헤다가 브레히트와 파울라의 관계를 알게 되자,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라고 심하게 다그쳤다. 하루는 파울라가 브레히트를 찾아 학교에 들어왔다. 이를 알게 된 헤다는 브레히트에게 ‘지조가 없는 남자’라 화를 내고 결별을 선언한다. 이때 브레히트가 파울라에게 “헤다는 머리와 눈으로 하는 일은 잘한다. 하지만 가슴으로 하는 일과 밤중의 일은 전혀 숙맥이다”라고 말한다.

첫사랑 마리아 이후 항상 두 여자와 교제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던 브레히트는 헤다가 떠나자 또 다른 여자를 찾는다. 아우구스부르크 시립극장에서 공연을 보러 갔다가, 오페라가수 마리안네 초프(Marianne Zoff, 1893~1984)에게 반해버린다.

브레히트는 공연이 끝나자 극장 안 의상실로 찾아가 다짜고짜 초프에게 청혼했다. 브레히트의 청혼을 초프가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은 뮌헨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파울라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몰래 만났다. 희곡 〈한밤중의 북소리(Trommeln in der Nacht)〉도 이 무렵 완성된다. 그 희곡은 뮌헨극장에서 상영되었고, 클라이스트 문학상(Kleist-Preis)을 수상했다.

브레히트의 이중생활은 금세 들통 났다. 초프는 파울라를 먼저 만나 입장을 듣고 브레히트를 불러냈다.

“당신이 지금 결정해라. 누구를 선택할래?”

초프의 완벽한 추궁에 놀란 브레히트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배회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일기장에 이런 푸념을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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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절대적 존재가 되려고 하는지, 그런 사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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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파울라를 만나서 달랜다.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나의 태양이오. 지금 초프가 임신 중이니 충격받지 않도록 출산 후 이혼하고 우리 정식으로 결혼합시다.”

이미 여러 번 바람 피우다 걸린 일이 들통 난 뒤라, 이번엔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그런데 파울라의 아버지가 아우구스부르크 명문가로 딸을 강제로 출가시켜 버린다. 그리고 딸과 브레히트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는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이 소식을 들은 브레히트는 파울라의 신혼집으로 친구를 보내 도망 나오기를 간청했다.

파울라는 그 청을 거절한다. 실의에 빠진 브레히트는 집을 나와 베를린으로 떠나 버린다. 이후 남편과 별거 상태가 된 파울라는 딸 한네(Hanne)를 혼자 출산한다.

두 번째 결혼과 연인들의 자살소동

베를린에 도착한 브레히트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의 집을 숙소로 정한다. 유대인으로 이름난 연극배우였던 그녀는 브레히트가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특히 마르크스의 저작물을 깊이 읽도록 배려한다.

깊이 사랑한 두 사람은 1929년 드디어 결혼에 이른다. 그리고 둘 사이엔 아들 슈테판(Stefan)이 태어난다.

이 결혼은 그동안 브레히트가 사귀던 많은 여인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이들은 브레히트가 초프와 사는 동안에도 애정 없는 부부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든 다시 브레히트와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브레히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정식부부가 된 것이다. 이제 다시는 브레히트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 수 없다고 여긴 여인들은 절망했다. 엘리자베스 같은 여인은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자신의 두 번째 결혼 후 연인들이 대 소동을 일으키자 브레히트는 “사랑이란 주는 것이다. 받으려고만 하면 자기애에 빠지게 되고, 이는 자살과 유사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해 〈서푼짜리 오페라〉가 크게 성공한다. 그 연극은 1931년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이 영화에 출연해 대스타가 된 카롤라 네어(Carola Neher, 1900~1942)도 브레히트와 사귄 적이 있었다. 그런 브레히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기차역에 마중 나온 브레히트가 내민 꽃다발을 내팽개쳐 버린다.

서푼짜리 오페라(1928)

 

브레히트는 글 쓸 때 남다른 버릇이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었다. 공동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릴 수 있었던 것도 한 역할을 했다.

헬레네는 그 버릇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여인과 염문을 뿌리는 것도 쿨하게 눈감아 주었다. 그러다 딱 한 번 폭발한 적이 있다. 브레히트가 고리끼의 《어머니》를 각색할 때, 스물세 살 나이에 결핵을 앓던 마르가레테 슈테핀(Margarete Steffin, 1908~1941)을 데리고 집에 온 것이다. 헬레네는 둘의 관계는 그러려니 했지만, 자식들에게 결핵이 옮길까 봐 화를 냈다.

1932년 〈어머니〉가 공연될 때 슈테핀이 하녀 역을 맡고 주연은 헬레네가 맡아 최고의 배우가 된다. 다음 해 나치 정권이 자작극 ‘제국의회 방화사건’을 일으키고 공산당의 소행이라며 색출작업을 벌인다. 위기의식을 느낀 브레히트는 헬레네와 함께 15년 망명생활을 떠난다. 슈테핀도 함께였다.

망명과 빨간 루트

나치의 지배에 있던 독일을 떠난 브레히트 가족은 덴마크로 망명했다. 그들의 망명을 제일 먼저 반긴 것은 기자인 동시에 미모의 여배우였던 루트 베를라우(Ruth Berlau, 1906~1974)였다. 그녀는 브루좌 가문 출신이면서도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어서 ‘빨간 루트(Red Ruth)’라 불리고 있었다. 취재를 빙자해 만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신문의 특집기사를 기획한다. 그리고 코펜하겐에서 파리, 모스크바까지 함께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모험담을 만들기도 했다. 이 기사는 큰 관심을 모았다.

루트 베를라우

 

나중엔 공동으로 희곡을 쓰게 되면서 무려 아홉 편의 작품을 내놓는다. 이들 작품은 덴마크에서 인기리에 공연된다.

덴마크 망명 시절 브레히트는 종교와 권력의 횡포를 다룬 〈갈릴레이의 생애(Leben des Galileil)〉를 썼다. 이 희극을 통해서 관객들은 아무리 횡포가 심해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름대로 덴마크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브레히트였지만,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다. 1841년 나치가 덴마크를 침공한 것이다. 결국 브레히트 가족은 또 다시 정처 없는 망명길을 올랐다. 브레히트는 떠나기 전날 베를라우에게 편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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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나는 당신만 기다릴 거야. 내가 어디로 가나 언제든 당신이 찾아오리라 믿어. 그 믿음은 너 때문이 아니야. 바로 나 때문이야. 빨간 루트, 나의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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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라우는 브레히트의 망명으로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아픔을 느낀다. 견디다 못한 베를라우는 가족과 남편, 친구 그리고 직업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브레히트를 따라나섰다. 이제 브레히트의 망명길에 가족 외에 슈테핀과 베를라우까지 두 명의 여인이 함께 하게 된다. 그들은 스웨덴을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기나긴 망명길에서 속기와 언어 천재인 슈테핀은 브레히트의 대변인 노릇을 충실하게 해낸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추운 날씨에 슈테핀의 결핵이 더 심해진다. 회생 가망이 없는 슈테핀은 더 이상 브레히트와 동행할 수 없게 된다. 병상에 누워 슈테핀은 “나를 남겨두고 모두 함께 더 좋은 곳으로 떠나세요”라며 애원했다. 그녀의 나이 겨우 서른세 살이었다.

브레히트 일행은 1941년 5월 30일,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슈테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브레히트 일행은 미국행 배를 탔다. 브레히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슈테핀을 회상하며 사랑의 시(Liebesgedicht)를 쓴다.

브레히트, 헬레네, 베를라우의 대단원

미국에 도착한 브레히트 일행은 독일 망명 문인들이 거주하던 할리우드 근처 산타모니카에 정착했다. 베를라우는 이들 곁을 떠나 뉴욕에 정착했다. 브레히트를 따라가 봐야 새로운 여인들과 공동작업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뉴욕에 홀로 남아 브레히트가 오면 오롯이 둘만 지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베를라우의 소원을 알고 있던 브레히트는 일 년에 두 차례씩 뉴욕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4~5개월을 머물렀다. 베를라우는 브레히트의 아이까지 낳게 되지만,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이 일로 상심한 베를라우는 짜증이 심해졌고, “평생 브레히트만 도와주느라 자기 이름으로 작품 하나 남겨두지 못했다”며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브레히트는 “저자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 작가란 과일처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버릴 때 가치 있다”며 위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브레히트 가족은 스위스를 거처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3층 집을 마련하여 1층은 식당, 2층은 헬레네와 가족의 거실로 정하고, 브레히트는 홀로 3층에서 기거했다.

베를린에서 브레히트는 고독 속에 침잠해 있기를 즐겼다. 헬레네는 브레히트 서사극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등의 연기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베를라우는 가끔 찾아오는 브레히트와 만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여기며 살았다.

어느 날은 점차 찾아오는 기간이 길어지자 “왜 이리 늦게 오느냐”며 손톱으로 브레히트의 얼굴을 할퀴었다. 브레히트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자 후회하면서 〈피에 물든 빨간 손수건〉이라는 시를 쓴다. 그날 브레히트는 일기장에 “쉰셋의 내 얼굴을 당신이 긁어 더 늙게 하였어”라고 적었다.

1956년 브레히트는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그토록 존경했던 헤겔 옆에 눕게 된다. 이후 브레히트의 묘소를 자주 찾던 베를라우는 19년을 더 살다 브레히트 뒤를 따른다.

 

이동연

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펼쳐보기

출처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 이동연 | 평단문화사

명작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의 명작을 이해하려면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희로애락이 깃든 작가만의 라이프..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