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신문
승인 2014.06.24 17:07:12
▶절강시씨 득성연원
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 동해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단강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져 항주를 성도로 하고 있다. 시씨는 본래 중국 오흥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주나라 경왕(敬王:제26대 임금, 재위기간:BC 519~476) 때 성유(聖儒)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시지상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시씨의 연원은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명군의 유격종군으로 참전했던 무장(武將) 시문용(施文用)이 전쟁이 끝나고 명군이 철수될 때 어깨의 큰 부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북 성주에 정착해 시문용이 시조(始祖)가 되고 전해지는 관향은 절강 단본이다.
그 후 문용은 창녕장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슬하에 아들 영건(永建)과 영달(永達)을 낳아 절강시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하였고, 본향지인 중국 절강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광해군 때 당시 영의정(領議政)이었던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인용이 실각되자 성주로 돌아와 학문연구에 전력했다.
특히 문용은 의학과 병법에 조예가 깊어 「병학기정」과 「의복결유」·「감여지남」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문하에서 훌륭한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서울 송파구 송파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터)에 수향단을 쌓고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한 후, 청태종이 조선에 남아있는 명나라 유민들을 모두 체포하여 강제 송환을 시키려할 때 문용은 성주군 용암면 문명동 군성산 기슭에 은거하며 청나라에 망한 무국 명나라의 재기를 기원했다.
영조대에 이르러 당시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임진왜란 참전용사〉 후손들의 생활상을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자 영조는 문용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고 그 후손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면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가맥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조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유정(有鼎)과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유영(有榮)이 유명했으며, 한익(漢翼)은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올라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치황(致璜)·정석(廷錫)·영석(暎錫)·민식(敏植)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쳐 절강시씨를 더욱 빛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559가구 1,7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에 정착하게 된 시대와 배경
임진왜란 때 조선이 일본군의 수중에 거의 들어가고 선조왕이 의주에 피난 가서 있을 때 명나라에 정곤수(鄭崑壽)를 사신으로 보내어 군대를 보내 도와달라고 하여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절강성 출신 병부시랑(兵部侍郞) 시윤제(施允濟, 나중에 예부상서가 됨)다. 시윤제가 조선 사신 접반사가 되어 조선의 딱한 사정을 알고 1차 이여송이 나올 때 많은 군대와 물자를 보내는데 적극 도운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이 정곤수 장게와 왕조실록 영조 정조까지도 감사한 내용이 전해진다.
정유재란 때 시윤제는 아들 시문용(施文用)을 조선에 파견했는데, 정유년 6월 절강병 1천명을 거느리고 마귀(麻貴)제독과 함께 이 땅에 나왔다. 이해 여름 일본군 10만여 명이 북진할 때 남원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군 3천명과 조선군과 백성을 몰살시키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점령 후 경기도 접경 직산(稷山)에 일본군(6~10만 추정)이 집결, 9월초 한양을 향해 진격할 때 순수 명군의 힘으로 이를 격파하자 일본군이 남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 시문용도 참전했고 12월 명나라 군이 총동원되고 조선군이 합세하여 울산성을 공격할 때 참전했다. 이듬해 1월 명나라에서 유격장군 람방위(藍芳威)가 3,300명의 절강성 군사를 거느리고 추가로 나오자 이때부터 시문용은 이 부대의 유격중군장(遊擊中軍將, 行營中軍)이 되어 실질적으로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당시 이 부대가 공주 공산성에 주둔하며 일본군을 막아주어 민폐가 없었다며 후일에 세워 준 송덕비가 지금 공산성에 있다. 그 후 시문용은 충주, 청주, 보은, 상주, 가야산 일대의 적을 격파했다고 되어 있으나, 경기도 직산(일명 소사평 전투) 전투에서 일본군이 대패하여 남으로 도망간 전투도 명나라군의 전투인지라 공식 기록에 없듯이(실록에서 간접 확인) 시문용의 역사도 구체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으나 가야산 일대의 전투는 워낙 큰 전투였는지 이 전투 사실이 선조왕에게 보고되고 선조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주어 감사하다는 서찰을 시문용에게 보내어 위로한 내용이 전한다.
시문용은 정인홍의 고향 합천 가야에 내려와 장가를 든 후 바로 성주군 수륜면 보월동에 정착했으며, 그 후 후손이 고령 운수 화암동과 대평리 등 고령 일대에 정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입향 후 문중 인물
시씨는 역사가 짧아서 큰 인물은 없지만, 시조 시문용은 임진왜란 때 전투 공로로 선조 3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영조왕은 임진왜란 때 시문용의 선친이 조선을 적극 도왔고 시문용은 조선에 나와 많은 전공을 세웠다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증 병조참판(贈 兵曹參判)의 벼슬을 내렸고 그 외 후손들에게 많은 벼슬을 내렸으며, 시씨 후손들에게 부역 등을 시키지 못하게 했다.
현대 인물로는 시대복 포스코 건설부사장을 비롯해 운수면 순풍마을이 고향인 시명선(施明善) (주)강림중공업 대표는 많은 자회사를 거느려 대기업 반열에 근접할 정도로 활발한 기업활동을 해 절강시씨를 대표할 수 있는 기업인이며, 그 외에도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경제인들이 많다.
또한 시문한 판사, 시정기 변호사 등 법조계에도 여러 명이 있고, 시종수 국민은행 지점장, 시성철 기업은행 지점장, 시진우 국민은행 지점장 등 금융계와, 박사학위 취득자가 많아 교육계에도 절강시씨가 많이 포진하고 있다. 그리고 대림운수 대표이사이며 효자상을 수상한 화암리 시무준 노인회장이 있다.
현재 대종손은 시현연씨이고, 시재기씨가 절강시씨의 대종회장을 맡고 있다.
▶관내 집성촌 실태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와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대평리 등 고령군 일대에 수백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여느 성씨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대도시로 많이 나가 현재는 일백여호가 살고 있다.
▶그 외 문중비사
시조(始祖) 시문용은 정인홍의 추천으로 1615년 광해군 7년 10월 5일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가 제도개혁 등을 하였고, 새 궁궐을 지어 대개혁을 하려는 광해군의 뜻에 따라 정식으로 왕실풍수가 되어 지금은 없는 인경궁(仁慶宮, 현 서울 배화여중 일대와 필운동 일대)과 현재 5대궁의 하나로 남아있는 경희궁(慶熙宮)의 터를 잡고 지었다. 그러나 재주를 다 펴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억울하게 처형되고, 시문용은 정인홍의 사람이라고 고향에 돌아와 살게 되었다.
인조 1년에 고향에 내려와 살다가 인조 14년에 청나라에 항복할 때 청태종이 조선에 있는 명나라 장수를 잡아 보내라 하였으나, 인조는 반대로 시문용을 피신케 하여 성주군 수륜면에서 살다가 유격파총(遊擊把摠) 서학(徐鶴)장군과 함께 성주 용암면 군성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뒷산에 대명단(大明壇)을 조성하고 초하루 보름마다 조복입고 단에 올라 조선의 부흥과 조국의 중흥을 기원하였다. 서학 장군은 시문용과 동향사람이며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으며, 끝까지 시문용과 함께한 사람이다. 그때 그 단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대구의 대명동이 두사충 장군에 의해 대명동 동명이 생겼듯이 이곳 마을 이름이 이때부터 대명동이 되었다.(현재는 문명리)
그 후 세상이 조용해지자 시문용은 형곡동으로 돌아와 살다가 1643년 72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고 서학장군 후손은 대명동에 그대로 살게 되어 현재 절강서씨(浙江徐氏) 집성촌이 되었다.
/정리 최종동 논설위원
/자료제공 시조공 13세 시천수
임진왜란과 절강시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 당시 원군으로 왔던 명군의 숫자는 연 20만1천5백 명이다. 이름이 알려진 장수만도 270여 명에 이른다. 그 중 상당수가 한국에 눌러 앉아 귀화, 한국인이 되었다. 절강시씨를 비롯, 절강서씨, 소주가씨, 광천동씨, 상곡마씨, 절강편씨, 절강팽씨, 해주석씨 등이 대표적인 귀화 성씨들이다.
시문용은 유격장군 남방위와 더불어 합천에서 왜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군은 모두 철수했으나 시문용은 어깨에 큰 부상을 입고 철군에 합류하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했다. 이때 동료 서학도 그를 보살피기 위하여 머물러, 오늘날 절강서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문용이 정착한 곳은 경북 성주다. 이곳에서 창녕장씨를 부인으로 맞아 영건, 영달 등 두 아들을 낳았다. 그 후손이 오늘의 절강시씨를 이루게 되었다. 명과 청이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격돌하던 1630년대.- 조선은 친명배청의 노선을 견지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략했다. 이것이 병자호란 (1637년.인조 14년)이다.
다음에 1월에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린다. 이때 청 태종은 조선에 남아있는 명나라 유민들을 모두 체포해 청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겉으로는 이 요구를 수락했으나 내면으로는 명의 많은 유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당시 시문용이 피신한 곳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 기슭.
예를 올렸던 대명단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가로 4미터, 세로 3미터, 높이 1미터 쯤 되는 돌로 쌓은 제단이다. 시문용의 후손들은 매년 세 차례씩 이 제단 앞에서 북망사배의 예를 올린다.
시문용은 결국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이국땅 조선에서 숨졌다. 그로부터 약 1백여 년 동안 그의 후손들은 나라 잃은 설움 속에 인고와 수모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임진왜란 참전 용사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신변을 보호해 주었던 조정의 관심도 세월이 흐를수록 엷어져 갔다.
조선 조정이 시문용의 후손들을 비롯한 명의 유민들에게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부터다. 당시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가 명나라 유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조사해 왕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는 뒤늦게나마 시문용에게 병조참판직을 추증한다.
그의 후손들은 일체의 조세와 부역을 면한다는 교지도 함께 내렸다. 이때부터 시씨 문중에서는 지방관서의 말단 벼슬이나마 차지하는 인물이 가끔 나타났다. 그러나 워낙 인구가 적은 데다 첩첩 산중에 숨어 살아야 했기에 당상관급의 벼슬을 기대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했던 36년 동안 절강시씨는 또 다른 수모를 겪어야 했다.“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수의 후예들에게 항상 질시와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대평동은 시문용이 뿌리를 내린 후 그 후손들이 혈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집성촌이다. 대평동을 중심으로 인근 명암골, 꽃질, 맞질 등 모두 6개 자연 부락에 사는 120여 가구 6백여 명의 시씨는 모두 시문용의 자손들이다.
한편 시문용은 의학과 병법에 조예가 깊어 "병학기정(兵學奇正)" "의복결유" 등 저서를 남겼다. 한편 시문용은 의학과 병법에도 조예가 깊어 <병학기정>, <의복결유>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에게 병법을 배운 대표적 인물이 유명한 이사룡(李士龍. 성산이씨)이다.
명과 청이 중국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1640년. 이사룡은 청의 원병 강요로 명을 치기 위해 출전하는 부대에 징집 당했다. 당시 그의 직책은 포사였다. 이사룡은 전선에 가서“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군을 어찌 공격하겠느냐”는 생각에 공포만을 쏘다가 청군에게 발각돼 처형당한다. 죽음으로써 명에 대한 의리,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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