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에게만은 주기 싫은데...英 여왕의 ‘가터 훈장' 고민
입력 2020.12.28 18:10
토니 블레어에게 최고 훈장을 주기는 싫고, 그 뒤 대기자는 밀려 있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왕실이 공직자에게 주는 최고 기사도 훈장인 ‘가터 훈장(Order of Garter)’ 대신에 이보다 낮은 기사도 훈장을 토니 블레어 전 총리(1997~2007년 재임)에게 주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영국의 선데이타임스가 27일 보도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관례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주례 보고(audience)를 하기에 앞서 인사를 하고 있다.
◇역대 총리 다 줬지만, “블레어는 안 돼”
가터 훈장은 공직에 봉사한 남녀에게 영국 여왕이 개인적으로 수여하는 최고의 기사도 훈장이다. 근 700년의 가장 오래되고 명예로운 훈장이다. 영국에서 이보다 서열이 앞서는 훈장은 뛰어난 무공(武功)을 발휘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빅토리아 훈장(Victoria Cross)과, 위기 시에 인명 구조에서 영웅적 행동을 한 군인과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조지 십자장(St. George Cross)뿐이다. 따라서 영국에서 공직을 수행한 자에겐 최고의 훈장이다. 1952년 6월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의 여왕 치세 중에 총리를 지낸 10명 중에서 9명이 ‘가터 훈장’을 받았다.희소성도 있다. 왕족을 제외하고는, ‘가터 훈장’ 기사단 멤버는 항시 24명을 넘을 수 없다. 수훈자가 숨져야, 다음 사람이 ‘가터 훈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 여왕이 총리를 그만 둔 지 13년이 된 블레어에겐 ‘가터 훈장’을 주지 않으면서 일이 꼬였다. 블레어 서훈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후임 총리들인 고든 브라운(노동당), 데이비드 캐머런(보수)·테리사 메이(보수) 등 4명도 줄줄이 서훈 절차가 밀렸다.
◇여왕, 자신과 나눈 사적인 대화 공개에 분노
여왕과 블레어는 블레어가 총리 재직 첫해인 1997년 8월 31일 교통 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 절차를 둘러싼 갈등과, 블레어 부부의 왕실 격식을 무시하는 행동들로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게다가 블레어가 2010년에 낸 회고록 ‘한 여행(A Journey)’에서 여왕 및 고위 왕족들과 나눈 사적 대화를 공개하면서, 여왕은 분노했다. 블레어는 이 회고록에서 “세상에서 영국 총리가 내각 동료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내(배우자)와 여왕밖에 없다. 여왕과는 무엇이든 공유할 수 있었고, 그 확실한 신뢰는 결코 깨지지 않았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43세에 총리가 돼 1997년 5월 2일 여왕을 처음 만났을 때에, 여왕이 “당신은 내 열번째 총리요. 처음은 윈스턴(처칠)이었소. 당신이 태어나기 전이죠”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미숙함을 은근히 꼬집은 것을 공개했다. 블레어는 또 윌리엄 왕손에 대해서도 “그(윌리엄)는 혈통에 따라붙는 (왕실의) 감옥과 같은 벽은 (왕이 되기 위해) 치르기엔 너무 비싼 대가라고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고 썼다. 다이애나가 숨졌을 때에도, 블레어 당시 총리는 BBC 인터뷰에서 “여왕은 이 엄청난 개인적 참사를 두고도, 대외 이미지 행사로 생각해서 (장례식 참가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또 “여왕이 다이애나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지만,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여론이 이후 왕실에 미칠 파장에 더 관심이 있다”고도 했다. 블레어의 이런 ‘폭로’에, 당시 영국 왕실 측은 “여왕은 자신이 총리들과 나눈 대화가 언젠가 싸구려 흥미 위주의 회고록에 소개될지 모른다는 염려 없이 총리들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크게 분노했다.
◇블레어에겐 낮은 등급 기사 훈장?
2019년 6월 윈저성에서 열린 가터데이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왕족들./royal.uk
선데이타임스는 왕실이 토니 블레어를 제치고 후임인 고든 브라운 전 총리에게만 ‘가터 훈장’을 주는 모양새를 피하기 위해, 브라운에게 두번째 높은 훈장이자 스코클랜드 기사단의 최고 훈장인 ‘엉겅퀴 훈장(Order of Thistle)’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브라운은 스코틀랜드 출신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블레어에게도 ‘가터’보다 낮은 등급의 훈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엘리자베스 2세 재위 중에 ‘가터 훈장’을 받은 보수당과 노동당 정치인의 비율이 4대1로 너무 한쪽에 기울게 된다. 이는 노동당 정부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터 훈장’ 서훈의 정치적 형평성은 계속 비난을 받게 된다.
◇가터 훈장이란?
가터 훈장. 십자가 방패 문양 주위에, "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자는 부끄러운 줄 알라"는 중세 프랑스어로 된 가터 기사단의 모토가 쓰여 있다./위키피디아
영국 왕실 웹사이트에 따르면, 1348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전설 속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단 얘기에 심취해, 이 기사단을 제정했다. 생존 시 ‘가터 기사단’의 멤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24명뿐이다. 매년 6월엔 윈저성에서 가터 기사단과 왕족들이 푸른 벨벳 천 망토의 왼쪽 가슴에 이 가터 훈장을 달고 행렬하는 ‘가터 데이’가 열린다.
스타킹이나 양말을 속옷에 붙들어매는 ‘가터’가 훈장 이름이 된 것에 대해선 여러 속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칼레에서 열린 한 무도회에서 에드워드 3세와 춤을 추던 솔즈버리 백작 부인의 가터가 풀려 바닥에 떨어지자 주위 사람들이 웃었는데, 왕이 이를 주워 백작 부인에게 돌려주며 중세 프랑스어로 “Honi soit qui mal y pense(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자는 부끄러운 줄 알라”며 “앞으로 이 밴드(가터)는 가장 영예로운 자들이 착용하게 돼 오늘 웃은 이들이 내일부터는 이를 착용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모토는 가터 훈장에서 십자가를 둘러싼 글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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