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Arts

私の歌の道・・・都はるみ

Jimie 2022. 10. 27. 07:35

私の歌の道・・・都はるみ

2017.

https://www.youtube.com/watch?v=8HgE_pBaZ40 

 

일본 하늘에 뜬 성주의 별(星州の 星)

 

일본 여성 엔카가수(演歌 歌手) 쌍두마차를 든다면

*미조라 히바리( 美空ひばり,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와

*미야코 하루미( 都はるみ, 1948년 2월 22일 ~ )를 들 것이다.

 

 

일본 여성 엔카의 톱스타 미야코 하루미(はるみ)실상 성주이씨, 이춘미(李春美)씨다......


 
일본의 한국계 엔카 가수 미야코 하루미( 都はるみ, 1948년 2월 22일 ~ )의 아버지 이종택(李 鐘澤 1904~ 1987)의 일본 이름은 마츠다 세이지(松田 正次).



성주이씨 李 鐘澤은 1904년 경상북도 성주태생으로 1940년 일본 교토의 비단 명산지인 니시진(西陣) 으로 이주하여 직물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직물공장에 너무나 성실한 여공으로 일하던 마츠시로(松代 1919~2005)와 결혼하여 얻은 딸이 '미야코 하루미'다. 한국명 이춘미(李春美).
 
‘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는 어머니 ‘타미’(タミ)와 아버지 ‘나카타니 도미타로’(中谷 冨太郎)사이에서 1919년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이시카와현’(石川県) ‘코마츠시’(小松市) 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녀가 네 살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 ‘타미’(タミ)는 ‘기타무라 조사부로’(北村 助三郎)와 재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교토로 돌아와 자랐습니다.
 
 
 
 

李春美(都はるみ)는 1948년 일본 교토부 교토 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

일본의 저널리스트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는 자신의 저서  ‘노래쟁이  미야코 하루미 (歌屋 都はるみ) '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재일한국인이며, 그녀의 한국 이름은 이춘미(李春美)라고 적고 있다.

 

예능을 좋아한 모친은 하루미의 나이 다섯살 때부터 일본 무용과 발레를 배우게 했다. 李春美교토시에 있는 라쿠요 종합 고등학교(洛陽総合高等学校)를 다니다가 가수가 되고싶다는 이유로 중퇴하였다.

 

1963年 15세에 第14回 콜롬비아 全国歌謡 콩쿠르 優勝 . 1964년 16세에《곤란해요 (困ることヨ)》로 데뷔하였으며, 같은 해 발표한 《앙코동백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恋の花》이 일본열도를 흔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1965년 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 이 155만 장의 앨범판매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오면서 그해 연말 일본 가수의 꿈에 무대인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하게 됩니다. 이후 1984년까지 20년 연속 홍백가합전 출장이라는 인기 정상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1973년 선 뮤직 프로덕션으로 이적한 ‘미야코 하루미’는 1976년 그동안 불러온 전통적인 엔카와 다른 감성적인 가요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를 발표하여 앨범판매 143만 장이라는 큰 흥행을 가져옵니다. 이 노래는 12월 엄동의 겨울에 발표되어 추운 겨울 연인을 향한 애틋한 여심을 발라더한 대중가요로 노래하여 대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야코 하루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던 노래입니다. 1976년 이와 같은 대 히트곡 ‘북쪽의 집에서’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됩니다.

 

1969년 11월 ‘주간 평범’이라는 잡지에 ‘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내가 조선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딸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면서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딸을 인기 가수로 키워내고 싶었다.’ 라며 ‘미야코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던 것입니다. 당시 ‘하루미’ 어머니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딸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임을 주변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인기인의 도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사의 파문이 너무나 컸던 것입니다. 당시 ‘주간 평범’ 잡지는 1959년에 창간된 잡지로 1960년에 100만 부가 팔려나가는 인기 잡지이었습니다. 이에 음반회사는 물론 기획사와 언론에 이르기까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내용에 대하여 가수의 생명이 끝이 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 전역에서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하여 이를 비난하는 편지들이 쏟아져 ‘미야코 하루미’ 어머니는 물론 가수 ‘하루미’ 본인도 이후 일체의 취재를 거부하며 함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1976년대 히트곡 ‘북쪽의 집에서’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될 당시 극심한 논란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는 1976년 12월 9일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 중 하나인 ‘산케이신문’(産業経済新聞)에서 발행하는 ‘주간 산케이’에 ‘하루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아니다.’ ‘이러한 하루미에게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줄 수 없다.’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당시 ‘미야코 하루미’는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대상을 받았지만 ‘이즈오섬’(伊豆大島)을 소재로 만든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을 부를 때마다 환호하던 함성과 ‘눈물의 연락선’과 ‘북쪽의 집에서’를 부를 때 함께 울던 눈물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마디의 말에 차가운 냉소로 돌아서는 비정함을 바라보며 당시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 하였습니다.

 
 

1976年 그동안 불러온 전통적인 엔카와 다른 감성적인 가요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를 발표하여 앨범판매 143만 장이라는 큰 흥행을 가져온다. 第18回日本レコード大賞

 

1980年、「大阪しぐれ」で 第22回日本レコード大賞・最優秀歌唱賞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일본 가요계를 대표하는 대 스타가 된 미야코 하루미.

1984년 '보통의 아줌마가 되고싶다.(普通のおばさんになりたい。)'는 말을 남기고 第35回NHK紅白歌合戦을 끝으로 은퇴하였으나,

 

 

1987년 음악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89년에는 일본에서 데뷔한 김연자의 곡을 프로듀싱 하는 등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1989년 第40回NHK紅白歌合戦』に出場し、「アンコ椿は恋の花」を歌唱, 가수로 복귀하여 지금에 이른다.

 

일본 가수들의 꿈의 무대인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에는 1965년부터 1984년까지,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총 29회 출연하였다.

 

NHK 홍백가합전 역대 순간 최고 시청률

1984년 제 35회 NHK 홍백가합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미야코 하루미가 눈물로 불렀던 노래 '부부 고갯길(夫婦坂)'이 방송되던 시점의 88.4%라는 경이적인 기록이다.

 

현재 레코드 회사는 콜롬비아 뮤직 엔터테인먼트.

 

2005年芸術選奨文部科学大臣賞を受賞。

2006年京都府文化賞.功労賞を受賞。

2010年紫綬褒章を受章。

              *자수포장 ※ 학문·예술의 연구나 창작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포장.

 

그녀는 독특한 꺾기 창법을 잘 구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녀의 독특한 꺾기는 여러 연예인에 의해 성대모사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주로 애수(哀愁)가 담긴 곡들을 많이 노래했으며, 이외에도 고향인 교토를 소재로 한 노래들을 취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엔카 이외의 장르의 곡들도 자주 부르기도 하였다.

 

アンコ椿は恋の花 都はるみ 1964年 (昭和39年) 当時16歳

1964년 16세에 " 아가씨 동백은 사랑의 꽃"으로

일본 열도를 흔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アンコ椿は恋の花 都はるみ(21歳)

                                                   1964年10月5日発売 作詞:星野哲郎/作曲:市川昭介
 

 

都はるみ 1984 은퇴공연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FnblV55F_KA 

 

大阪しぐれ(오오사카시구레)
夫婦坂 (메오토자카)
好きに なった人(스키니낫타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