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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석화성( 嶺南의 石火星), 성주 가야산(星州 伽倻山)~

Jimie 2022. 10. 17. 07:45

성주(星州)의 영산(靈山) 가야산(伽倻山)

대관령(大關嶺) 길손 ㅡ 성주(星州) 나그네~

 

조선 팔경의 하나... 불꽃 명산

~성주 가야산(星州 伽倻山)~

~영남의 석화성( 嶺南의 石火星), 성주 가야산(星州 伽倻山)~

 

가야산 정상을 동쪽(성주 수륜)에서 보는...

칠불봉(七佛峰 좌측 1,433m, 경북 성주군 가천면)

우측 상왕봉(象王峯1,430m, 경남 합천군 가야면)의 불꽃 형상!

 

 

伽倻山 정상,七佛峰

1,433m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산 162번지

 

//경상도에는 석화성이 없다. 오직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 같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가야산을 “석화성(石火星)의 절정”이라고 했다.

가야산 정상 줄기의 바위들이 뾰족하여 불꽃처럼 하늘로 솟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백년설(白年雪, 1914년 1월 19일 ~ 1980년 12월 6일)은

원래 이름이 이갑룡(李甲龍), 이갑용(李甲勇)이었지만, 이창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1964년에 이창민(李昌民)으로 개명.

 

 

경상북도 성주읍 예산리에서 출생하여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에 우연한 기회로 첫 데뷔한 그는 1938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수 데뷔하였고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등을 연속 유행시켰다.

 

대표곡은 1940년 발표되어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린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이며, 이 밖에도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산팔자 물팔자〉, 〈천리정처〉, 〈아주까리 수첩〉

‘'일자일루', ‘눈물의 수박등’, '대지의 항구', ‘만포선 길손’, ‘복지 만리’, '고향설', '어머님 사랑', '북방여로', '비오는 해관', ‘마음의 고향’, '상사(相思)의 월야', '석유등 길손', '신라제 길손', ‘해인사 나그네’등 히트곡이 많이 있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 서울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은퇴공연을 끝으로 가수활동을 접었다.

 

1955년 백년설은 40세의 나이에 아내 이한옥을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가수
심연옥과 재혼한 뒤, 평생 그가 추구하던 목적과 의미있는 삶의 일환으로 여호와의 증인에 귀의, 이후 연예계 관련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국제 무역을 운영하다가 197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가족과 함께 (아내와 심연옥과의 슬하 남매 5녀, 6남) 이민을 떠났으며, 투병 2년 후 1980년 12월 6일 65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심연옥님은 자녀들과 미국에서 살다가 2021년 10월 4일 93세 별세했다.

 

백년설은 가수 활동외에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 평화신문사 사업국장, 센츄리레코드사 문예부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영화제작자, 쇼 다이아몬드 대표, 연예협회 기획분과위원장, 한국연예단장협회 회장, 경향신문 일본지사장 등을 역임.


백년설이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냉수마찰은 평생을 계속했고, 유도가 공인 5단으로 단단한 체력이었지만 말년에 얻은 병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얼마 전 96세로 타계한 작사가 겸 가수 반야월 선생은 생전에 "백 선생은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여 너무 일찍 타계했다"고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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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면서도 나그네였던 시절, 울고 싶어도 마음놓고 울수 조차 없었던 시절.
일제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우리의 노래로써 나그네 신세의 설움과 울분을 달랬던 노래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고향설』 등이 모두 그때 불려졌던 노래들이다.

성주고등학교(백년설의 모교)교정

 

 

 

杜鵑花(진달래) 사랑!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17세 소년, 이창민은 증권회사의 외무사원이 돼 서울 거리를 매일 헤메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술자리에서 한 곡조 부른 노래가 인연이 돼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

 

'두견화 사랑`은 장안 홍등가의 인기를 몽땅 백년설에게로 쏠리게 했다는 노래입니다.

거리를 떠도는 한낱 무명 청년으로 부터 일약 가요계의 왕자로 등극하게 한~ 진달래 사랑~~~

 

두견화 사랑 - 백년설

1939

천아토(千亞土) 작사 / 전기현(全基現) 작곡

 

*천아토(千亞土) : 본명 천명철((千明鐵)

https://www.youtube.com/watch?v=UhOaLUWDAtE&t=15s 

 

 

H.G. Ryu 8 months ago

 

별고을 성주(星州)가 낳은
민족 가수, '나그네 설움' 백년설님,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삶과 애환을 달래준 "민족의 절창(民族의 絶唱)"~!

님은 가고 없어도
님이 남겨주신 민족의 노래는
민족의 삶과 애환과 함께 이땅에 영원히 흐를 것입니다.

님 가신 하늘 나라
영롱한 별이 빛나는 밤이면 밤마다
고향땅 별고을 내려보시고 고향 꿈에 포근히 잠드시오소서~!!!

님께서 남겨주신 아름다운 선율~
님의 소리자취

 

그리며
감사합니다.

 

백년설 - 두견화 사랑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dJj4fMtAIV4 

 

 

백년설이 남긴 에피소드

 

#. 1950년대 중반 백년설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에 초청받았다.

평소 이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고 아주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소수 측근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측근 보좌관이 백년설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하도록 대통령에게 진언한 것이다.

백년설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노래만 부를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 또 백년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도 생일 축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일 없었다.

그는 성격이 대쪽 같았고 한번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권력에 눈치 보며 아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큰 형인 이판룡씨가 1956년 사망했을 때였다.

백년설은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으로 향했으나 상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상객과 마을 사람들이 대문 앞을 막으며 ‘노래를 한 곡 먼저 불러주고 가라’는 것이었다.

백년설은 문상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백년설은 형 상가 앞에서 ‘한잔 술에 한잔 사랑’을 부르고 나서야 상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 화류계에서도 백년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방공연을 마치면 그를 초청하고자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을 가득 메우고 있어 슬쩍 빠져나가 혼자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목소리만 있으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진수성찬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