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 없으면 쭈뼛쭈뼛… 대통령에겐 ‘영어선생’이 필요해
외교 무대에서 반복되는
대통령들의 영어 잔혹사
“프레지던트 리(Lee)는 항상 영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니 그와 이야기할 때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2010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한미 정상회담 도중 한 말이다. 이 대통령이 한국말 통역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오바마에게 답변했기 때문.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서 두 정상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재조정,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등 굵직한 현안에 합의할 수 있었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양측 통역이 순차로 말하면 회담이 길어지고 딱딱해질 수 있는데 이 대통령이 오바마 발언을 통역 없이 알아듣고 영어로 농담을 주고받은 덕분에 원활하게 이뤄졌다”며 “커트 캠벨 미 국무부 차관보도 ‘오바마 대통령이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가진 ‘48초 회담’의 후폭풍이 거세다. 이례적으로 짧게 끝난 만남 자체보다 바이든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눈 직후 카메라에 잡힌 윤 대통령 욕설이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 하지만 외교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이 미국까지 가서 바이든과 정식 회담이 아닌 인사 수준의 만남밖에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더 심각한 참사라고 지적한다. 당시 회담이 동시 통역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두 정상이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은 각각 10초 안팎. 한국산 전기차를 미 정부의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핵심 현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당시 윤 대통령이 직접 영어로 바이든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이고, 추가 회담을 요구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당장의 외교적 성과 이전에 해외 정상과 거리를 좁히고 친분을 쌓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한 외교부 고위직 출신 인사는 “윤 대통령이 향후 해외 순방에서 좀 더 나은 성과를 얻으려면 외교 현장을 잘 아는 ‘영어 교사’를 시급히 구해야 한다”고 했다.
◇“영어 공부할걸” 대통령들의 영어 잔혹사
아쉽게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상당수가 유창한 영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빈약한 영어 실력 탓에 외교 무대에서 곤욕을 치른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이른바 ‘후아유’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 전 대통령이 보좌진 조언에 따라 클린턴에게 ‘How are you(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려 했는데 긴장한 나머지 ‘Who are you(누구세요)?’라고 말해 버린 것. 그러자 클린턴이 “나는 힐러리 남편”이라며 재치 있는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자칫 외교적 결례로 비칠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해 망신을 당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 측 통역사 쪽으로 몸을 돌린 뒤 “그(문재인)는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어서 통역해달라”고 했다. 자신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 문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흠잡은 것. 하지만 문 대통령은 트럼프가 자신의 영어 실력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도중에도 활짝 웃는 모습을 보였다. 재임 기간 27차례 해외를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영어 울렁증으로 고생했다. 대통령 취임 전 한 번도 미국을 가보지 못할 정도로 해외 경험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던 것. 노 대통령은 해외 순방길에서 “대통령 될 줄 알았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영어 공부에 깊은 열정을 보인 대통령도 있었다. 미 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를 받은 해외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역대 한국 지도자 중 가장 영어에 능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 의회에서 대통령 신분으로 연설하고, 미국 지도부와 영어로 한반도 정세를 토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48세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미국인과 회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실력이 늘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참모진이 작성한 영어 연설문을 고치도록 수시로 지시할 정도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대그룹 재직 시절 세일즈맨으로 중동을 누비면서 실전 영어에 강해진 덕분에 외교 무대에서 영어를 가장 잘 활용한 지도자로 꼽힌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회의에서 통역 없이 지도자들과 영어로 환담하며 의장국으로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따라 젊은 시절부터 해외 정상들과 교류하며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를 익혔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뒤 외국어 실력은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해외 순방에서 영어·프랑스어로 연설했지만, 외교적 성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어 연설 대신 ‘스몰 토크’에 집중해야
대통령들은 해외 순방 1~2개월 전부터 ‘영어 속성 과외’를 받아왔다. 영어에 능통한 외교부, 청와대 직원에게 집중 지도를 받으며 참모진이 작성한 영어 연설문을 암기하는 식이다. 실전 영어가 약하니 연설할 때나 상대 정상과 만날 때 써먹을 영어를 미리 원고로 만들어 달달 외우는 것. 순방 일정이 없으면 이런 영어 수업도 없다.
문제는 ‘암기 영어’로는 해외 정상들과 깊이 교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 유럽 지도자들은 통상 국제 회의나 회담에서 상대 정상과 처음 만나 친분을 쌓은 뒤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협력 관계를 쌓는다. 유럽연합(EU) 주요 정상은 상대 정상의 성(姓)이나 직함 대신 이름(퍼스트 네임)을 부르기도 한다. 통역이 없는 자리에서도 영어로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도자들은 해외 순방에서 참모가 써준 대로 읽고 식사만 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다른 정상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외교관 출신인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국제정치학)는 “우리 대통령들은 미국을 방문할 때 영어 연설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는데, 매끄럽지 않은 발음으로 1시간 넘게 연설할 경우 역효과만 날 수 있다”며 “어려운 영어 연설에 집착하기보다 정상들과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스몰 토크’(일상을 주제로 한 가벼운 대화)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 익히기를 목표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내수용 대통령’은 이제 그만
대통령이 임기 중 단번에 영어 실력을 높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영어 실력을 키우는 일 못지않게 상대 정상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노력도 필요하다. 참고할 만한 사례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다. 영어가 약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앞에서 팝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을 부르며 엘비스 춤을 흉내 냈다. 이후 급격히 가까워진 둘은 미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함께 타고 엘비스 생가를 방문했다. 미국 유학을 해 영어도 잘했던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골프 마니아인 트럼프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18홀 골프 라운딩을 함께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세계 경제가 점점 불안해지는 상황에서 우리 대통령도 국내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내수용 대통령’에서 벗어나 해외 무대에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세일즈할 수 있는 외교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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