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마음이 부자 되는 글 - 독립 100주년 아일랜드에는 독립기념일이 없다|작성자 분양 도깨비 2022. 5. 16. 16:53
아일랜드는 유럽 서부 대서양에 위치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섬나라입니다.
지리적으로는 아일랜드 해를 사이에 두고
영국의 서쪽에 아주 가깝게 위치해 있고
오랫동안 영국과 한 나라였지만
800년 가까운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지속적인 침략과 수탈을 당하며
식민 지배를 겪다가
1922년 12월 6일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고
1948년 '아일랜드 공화국법'을 통과시켜
공식적으로는 '아일랜드 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섬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1만 2,500년 전이라고 하는데
원주민들은 다양한 거석과 고분 문화를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Bc 600년경부터 철기문화를 보유한 켈트족들이
중부 유럽으로부터 아일랜드로 건너와
우수한 무기로 토착 부족을 누르고
지배 종족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켈트족들은 아일랜드섬에서
단일 왕국은 형성하지 못하고 지역별로 할거하며
씨족사회로 살다가
5개 정도의 소왕국으로 통합되어
오랫동안 켈트족의 고유문화를 유지하였는데요.
이는 아마도 아일랜드섬이 워낙에 춥고 황량했고
땅도 척박해서
주변의 관심을 덜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서양의 중요한 명절 중 하나인
'핼러윈(Halloween)'도 켈트족의 추수감사절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는데요.
이런 원시 켈트족 사회를 붕괴시킨 사람이
'성 패트릭(St. Patrick) 주교'입니다.
꿈에 아일랜드로 가서 선교를 하라는 계시를 받은
성 패트릭은 선교를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교황으로부터 아일랜드 주교로 임명되어
432년에 북아일랜드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요.
아일랜드 각지를 다니며 열성적으로 포교를 해
그가 세운 교회가 365개에 이르고
12만 명에 이르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지천에 깔린
세잎 클로버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했다고 하는데
켈트족의 종교였던 '드루이드교'의 상징인
'뱀'을 바다로 내 쫓았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아일랜드인들은 성 패트릭을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추앙하고 있는데요.
성 패트릭이 영면한 3월 17일은
'성 패트릭 데이(Saint Patrick's Day)'로
가톨릭의 중요한 기념일로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아이리시들이
지금도 성대하게 치르는 민족적 축제일이 되었습니다.
아일랜드에 가톨릭이 전파되면서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라틴어와 알파벳이 사용되었고
새로운 학문과 사상이 들어오면서
아일랜드도 본격적인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아일랜드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바이킹족'들이 바로 그 외세들인데요.
759년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족들이
아일랜드를 기습한 이후로
200년 이상을 바이킹족들은 수시로
켈트족을 습격하며 노략질을 계속했습니다.
바이킹의 한 부족은
아예 아일랜드에 정착을 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세웠던 '더브린 왕국'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날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바이킹족들은
농업경제에 의존하던 켈트족에게
선박을 건조하고 항구를 만드는 방법과
새로운 예술 양식을 전수하며
도시 생활 양식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아일랜드의 바이킹족과의 악연은
영국에 자리한 바이킹족의 하나였던
'노르만족'의 아일랜드 침공으로 이어졌고
아일랜드와 영국과의 뿌리 깊은 악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일랜드의 켈트족들은
소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 간의 갈등에 잉글랜드를 끌어들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는
대병력을 이끌고 직접 아일랜드에 상륙하였고
교황은 헨리 2세를
'아일랜드의 영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노르만왕조는
아이랜드를 봉건적 방식으로 통치했고
아일랜드 가톨릭을
유럽 대륙에서 이식된 기독교 종파로
대체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켈트족들은
고유한 문화를 잃지 않고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오히려 아일랜드에 건너 온
노르만 귀족들이 아일랜드화 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인보다 더 아일랜드인이 되었다.
(More Irish than the Irish themselves)"
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으니까요.
1542년 영국의 독선적 절대군주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 의해
아일랜드 국왕에 올랐습니다.
형식적으로나마 교황청의 영지였던
아일랜드를
영국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복속시키려 했고
영국 국왕이 파견한 귀족들로 통치하면서
영국의 국교회를 파급시키려 합니다.
아일랜드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인
가톨릭을 고수하며
본격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저항은
영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진압될 수밖에 없었고
영국은 본격적으로 식민정책을 추진하여
북부 아일랜드의 얼스터 지역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을 대거 이주시켰습니다.
잉글랜드 출신의 귀족들은 부재지주가 되어
영국에서 살면서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임대하고
정착민들은 다시 소작농에게 토지를 임대하면서
결과적으로 토착 게일족들은 고지대의
척박한 땅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부당한 행위에 맞서 집단이 조직적으로 벌이는
각종 거부운동을 뜻하는 '보이콧(Boycott)'이란 말도
아일랜드 귀족의 재산 관리인의 이름에서
유래할 정도였으니까요.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에게 땅을 빼앗긴
아일랜드인들은 저항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아일랜드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올리버 크롬웰'의 '신모범군'이 이끄는
대량 학살과 가톨릭 탄압으로
60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인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아일랜드는 영국의 내란 때마다
고난을 겪어야 했고
영국과의 악연도 깊어만 갔습니다.
감자를 망친 것은 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영국인이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존 미첼
소작농으로 전락한 아일랜드인들이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때
그들을 먹여 살린 것이 바로 '감자'입니다.
당시의 감자는 개량이 되기 전이라
별 맛도 없고 생김새도 별로여서
'악마의 작물'로 불리우며
사람들은 거의 먹지도 않았던 작물입니다.
그런 감자가 일년이면 200일을 비가 오는
아일랜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고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빨리 자라니
아일랜드인들은 일 년 내내
감자와 버터 밀크를 먹고 살았고
역설적으로 영양도 좋아서 당시의 아일랜드인들은
다른 유럽 사람들보다 영양 상태가 더 좋았고
아일랜드인들의 인구가 800만이 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845년 여름
아일랜드 들판에서 잘 자라던
감자 줄기가 갑자기 검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자 마름병'이라는 전염병이 발생했고
감자가 전부 곰팡이가 피고
땅 속의 감자씨까지 썩어 들어가면서
아일랜드 들판의 감자가 모두 썩어버린 것입니다.
5년간 계속된 '아일랜드 대기근'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백만명의 아일랜드인들이 굶어 죽었고
1백만명의 아일랜드인들이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천재'였지만
그 당시의 지배자 영국은
죽어가는 아일랜드인들을 구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은 다른 나라의
식량 원조까지 제한하였으니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엄청난 반영 감정을 고조시켰고
영국에 대한 한 맺힌 증오심을 키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더 이상
영국의 지배를 원치 않았습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아일랜드에서도 민족주의가 불붙었습니다.
영국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저지했습니다.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은
무장 투쟁을 하자는 파와
평화적 운동을 하자는 파로 나뉘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17세기 성공회 개신교도가 주로 이주해 살고 있던
북부 6개 주는 영국의 통치 하에 있길 원하며
아일랜드의 독립을 반대한 것입니다.
아일랜드는 한편으로
독립을 하느냐 마느냐로
치열한 내전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들어 본 'IRA'라는 무장 단체도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 4조
나라의 이름은 에이레
혹은 영어로 아일랜드이다.
아일랜드 헌법
'에이레(Eire)'라는 국호는
아일랜드 고유어인 게일릭어의 명칭입니다.
마침내 아일랜드 남부 26개 주는
1922년 12월 6일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고
1948년 아일랜드 독립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북부 6개 주는
영국령으로 분리되어 분단되었습니다.
그런 아일랜드에는
독립기념일이 없습니다.
분단된 아일랜드가 독립기념일을 지정하자면
또 다른 분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옆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를 겪었고
식민 지배의 아픔도 겪었지만
강한 민족주의 정신을 잃지 않고
'정(精)'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와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마음이 부자 되는 글은
아일랜드에도 우리나라에도 하루빨리
진정한 독립 그리고 진정한 독립기념일이
생겨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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