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청와대와 경희궁

Jimie 2022. 3. 22. 04:33

청와대와 경희궁

입력 2022.03.19 13:59
 
 

광화문시대를 열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용산 국방부청사로 옮기려고 계획 중이라고 한다. 광화문거리에 있는 정부청사와 국방부청사 가운데 고민 중이라는 말도 있는데, 용산이 확정적이라는 말도 있다.

 

이전 목적이 ‘국민과의 소통’이니 장소가 어디가 됐든 그 소통이라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목적 달성에 대한 경제, 사회, 정치, 국방, 경호 등등 제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택이 필요하다. 현 청와대 건물 한두 개를 대통령 집무실로 쓰고 나머지 공간을 개방해 국민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문득 청와대 이전과 관련해 400년 전 광해군시대와 풍경이 겹친다. 교하로 천도를 계획한 왕이기도 했고 궁궐 이전을 계획한 왕이기도 했다.

 

광해군의 업적은 차고 넘친다. 오랑캐 후금이 명나라를 위협할 때, 광해군은 후금 청(淸)과 명나라 사이 실리외교를 통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다. 명나라가 대청 전쟁을 벌이며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원군 대장 강홍립에게 대충 싸우고 항복하라는 비밀지시를 내려 조선군 피해를 줄였다.

 

국내에서는 국가 조달용 각종 물건을 물건으로 받지 않고 쌀로 받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조세 병폐를 줄였다. 이전에는 지역 특산물을 두고 공무원과 업자들 농간으로 국민 부담은 부담대로 늘고 세입은 세입대로 줄어서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인의 반대 속에 궁궐 공사를 강행했다가 쫓겨난 왕이 광해군이다. 공사를 강행한 궁궐은 경덕궁, 지금 경희궁이다.

경희궁

경희궁은 정원군 이부가 살던 집이다. 이부는 선조의 서자이니 광해군과 배다른 형제다. 왕이 된 뒤 광해군은 잠재적인 정적인 동급 왕실 인물 이부를 극도로 경계했다.

 

광해군 7년인 1615년 활을 잘 쏘고 성격이 호탕한 정원군 셋째아들 능창군 이전이 역모를 꾸민 사실이 적발됐다. 능창군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1615년 윤8월14일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전에게 역모 혐의가 씐 결정적인 증거는 ‘이전의 운명이 40년 간 치평의 군주가 될 명운’이라는 점(占)이었다.

 

이전에게 큰 형이 있었는데, 이름은 이종이고 군호는 능양군이다. 1623년 3월 14일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이 된 인조다.

 

셋째아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뒤 술로 세월을 보낸 아버지 이부는 나이 마흔에 죽었다. 아들이 왕이 된 뒤 본인도 왕으로 추존돼 지금 경기도 김포 장릉에 묻혀 있다.

 

자기 조카를 역적으로 만든 그 광해군이 진행한 추가작업이 궁궐 공사였다. ‘왕은 평소 능창군 이전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온데다 또 정원군의 새문동(塞門洞) 집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항상 의심해 왔다.’(1615년 윤8월14일 ‘광해군일기’)

 

조카 이전이 죽기 전 광해군은 정원군이 살던 ‘왕기가 서린’ 집을 ‘빼앗았다’.(1615년 11월 17일 ‘광해군일기’) 그 집을 부수고 민가 수천채를 철거해 지은 궁궐이 경덕궁, 지금 경희궁이다.

 

경덕궁 공사 배경에는 성지(性智)라는 풍수술사가 있었다. 승려인 성지는 ‘광해군에게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몰래 인왕산 아래가 궁궐을 지을 만하다고 아뢰자, 왕이 크게 기뻐해 즉시 터를 잡으라고 명했다.’(1616년 3월 24일 ‘광해군실록’) 광해군에게 눈과 혀가 됐던 성지는 첨지중추부사라는 관직에 올라 ‘머리에 옥관자를 두르고 말을 타고 다니는 등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1618년 4월 13일 ‘광해군일기’) 사람들은 그를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지첨지(智僉知)라고 불렀다.

 

1617년 6월 경덕궁 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미 그 부근에는 인경궁(仁慶宮)이라는 궁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창경궁 중건이 완료되고, 그 남은 자재로 인경궁을 짓던 중이었다.

 

광해군에 대해 벼르고 있던 사림들은 바로 이 토목공사에서 쿠데타 힌트를 읽었다. 나라 살림도 군색한데 초대규모 토목공사를 동시에 두 건이나? 게다가 ‘잠시 머무를 별궁(別宮)’이라고 했던 명분과 달리 경덕궁은 ‘마련되어 있는 문(門)의 칸수가 무려 2백 칸이나 되고 들어갈 재목과 기와가 엄청나게 많았다.’(1618년 4월 4일 ‘광해군일기’) 반대가 빗발쳤지만 공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광해군은 철거된 민가에 대해 보상을 지시하고 벼슬을 내리기도 하며 궁궐 건설을 이어갔다.

 

1620년 11월 1500칸짜리 경덕궁이 완공됐지만 광해군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 다만 몇차례 ‘거둥하여 노닐었을’ 뿐이다. 동시에 진행된 인경궁 공사는 중단됐다. 완공되기 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기록만 보면 광해군이 경덕궁 공사를 강행한 이유는 오직 하나,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밖에 없다. ‘광해군일기’라는 기록물이 반(反) 광해군 세력에 의해 작성된 문서이니 과장과 왜곡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활용하지도 않고, 오래 머물지도 않은 궁궐을 둘씩이나 동시에 공사한 행동은 광해군을 성군이라 칭송한 사람들까지 그를 비난하게 만들었다.

 

1623년 광해군은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 집단에 의해 쫓겨났다. 쿠데타 명분 가운데 하나는 ‘무리한 토목공사’였다. 정원군 집터에 들어선 경덕궁은 정원군 아내 구씨가 들어가 살았다. 구씨는 인헌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진왜란 초기 의주로 도주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국가를 책임진 사람이 세자 광해였다. 대륙에 주인이 바뀔 때 실리외교로 나라를 보전한 지도자였다. 세금체계를 개선해 국민 부담을 경감시킨 지도자였다. 그런데 불합리한 토목공사 하나에 정적들은 그를 폭군이라 부르며 끌어내려버렸다.

 

작은 하나가 큰 모든 것을 압도해버리는 게 정치다. 정치는 그렇게 냉혹하고 허무하다.

 

 

 

 

우달원
2022.03.19 14:30:02
경부고속도로 기공식때 반대한다고 맨땅에 들어누워 반대하던 민주당 원로들이 생각난다! 그때 반대했던 자들은 지금 뭐라고 말좀 해봐라! 국민속으로 파고 들어 민생을 최우선 하겠다는 윤당선자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땡깡이나 부리지 말아라!
답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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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2022.03.19 14:17:36
어쩌자고 좌파 신문이 박근혜 탄핵을 주도했고 이제 천도도 아닌 이궐을 핑게삼아 윤당선자를 광해로 만들겠다는건가?
답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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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용
2022.03.19 14:21:52
조선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왕 인조와 꼭 닮은 문개! 잘 하고 있는 광해군을 한두가지 사안으로 뒤집어 씌워 쿠데타 일으킨 넘이나, 역시 세월호 등을 침소봉대하여 박통 ?아내고 정권 잡은 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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