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깃발/ 류치환

Jimie 2022. 7. 26. 20:04

 

깃발/ 류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여 흔드는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토영統營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잿빛 주문진注文津 하늘과 바다...

 

 

 

광야에 와서 / 유지환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생명의 서(1장)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百日)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을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학(鶴) / 유치환

나는 학이로다

박모(薄暮)의 수묵색 거리를 가량이면
슬픔은 멍인 양 목줄기에 맺히어
소리도 소리도 낼 수 없누나

저마다 저마다 마음 속 적은 고향을 안고
창창(蒼蒼)한 담채화(淡彩畵) 속으로 흘러가건만
나는 향수할 가나안의 복된 길도 모르고

꿈 푸르는 솔바람 소리만
아득한 풍랑인 양 머리에 설레노니

깃은 남루하여 올빼미처럼 춥고
자랑은 호올로 높으고 슬프기만 하여
내 타고남은 차라리 욕되도다
어둑한 저잣가에 지향없이 서량이면
우러러 밤 서리와 별빛을 이고
나는 한 오래기 갈대인 양

- 마르는 학이로다




바위 /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노(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憶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시인에게 / 유치환


영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정수리 위에 도사려
내가 목숨을 목숨함에는
솔개에게 모자보다 무연(無緣)한 것.

이 날 짐짓
살아 있으므로 살아야 되는 무가내한 설정에
비바람에 보둠긴 나무.
햇빛에 잎새 같은 열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의 사무치는 뜨거움에
차라리 나는 가두 경세가(經世家).

마침내 부유의 목숨대로
보라빛 한 모금 다비(茶毘)되어
영원의 희멀건 상판을 기어 사라질 날이
얼마나 시원한 소진(消盡)이랴.

그러기에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히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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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

 



1908 ~ 1967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
경남 통영(충무) 생.
동래고보 수학. 연희전문 중퇴.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 등단. 1936년 [조선문단]에 <깃발>발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의 한 사람으로 동인지 [생리]를 간행, 그러나, [시인부락] 동인으로는 활동 하지 않음.
경향 :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
-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은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서 찾았다.

1960년대에 부산에 정착, 부산고, 경남여고, 부산 남 여상 등 에서 교사, 교장으로 재직
시집 : [청마시집](1940),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등

●생명파(生命派) : <시인부락>(1936) 동인과 <생리>(1937)를 발간한 유치환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 생명의 의지를 추구한 1930년대 문학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 '시문학파'의 기교주의와 '주지주의시파'의 문명에 대한 시에 반발하여 생겨났다.

생명파의 대표 작가로는 서정주, 유치환, 김동리 등이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