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사는 경상도 출신의 탄광 징용자로 총련 상공회 초대회장을 지낸 동포 상공인 조봉대와 진영례의 7남매 중 3녀로 태어나, ‘우리학교’인 규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로 진학해 우리말과 민족예술을 배웠다. 소조 활동시 성악, 피아노, 발레, 피겨스케이팅 등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온 그녀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 온 것은 16살 때였다.
1973년 7월30일 국립평양만수대예술단이 일본을 최초로 방문했다. 아사히신문 공동주최로, 8월2일부터 동경, 나고야, 오사카, 교토 등 7개 도시를 9월7일까지 순회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무용 음악 앙상블’ 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을 무려 5번이나 관람하면서 감동을 넘어 영혼을 관통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던 그녀는 무작정 예술단 일행을 따라 시노모세키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진학과 만수대예술단 입단이라는 꿈을 가졌다. 결국 당시 총련 후쿠오카 상공회 회장인 아버지와 여성연맹 간부였던 어머니를 설득해 평양행을 허락 받았다.
그 시절에 ‘북조선’으로의 귀국은 가히 열풍 수준이었다. 해방 직후 고향으로 귀국시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을 제한한 기만적인 미군정과 일본 정부 때문에 귀국을 미루거나 남았던 이들은 여전한 일제의 차별과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기민정책으로 외면한 한국 정부와 달리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북측이었다. 재일조선인들을 ‘북한 공민’으로 선언하고 일본측에 권리와 인권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1957년 4월8일에는 ‘조선학교’에 첫 교육 원조금과 장학금을 보내주었으며, 이후에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원이 이루어졌다. 동포 사회는 이것을 ‘생명수’라 부르며 환호했고, 이것이 현재의 북과 재일동포 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초가 되었다.
195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수용한다는 외무성 성명을 발표했고, 1959년 8월 조일적십자 간의 인도 ‘캘커타(Kolkata)협정’ 조인으로 귀국의 길이 열렸다. 1959년 12월14일 재일동포 975명이 최초로 만경봉호를 타고 나가타항(新潟港)에서 청진항으로 귀국을 하였다. 조청미는 1973년 7월 제169차 귀국선에 올랐다.
평양에 간 그녀는 대동강변에 자리 잡은 총련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지내며, 평양음악무용대학 예비과를 거쳐 같은 해 10월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하였다. 2번의 변성기와 소아결핵으로 난관도 많았지만, 이화여대 출신의 월북 성악가인 조경, 강시종, 왕혜숙 교수 등의 지도를 받으며 착실하게 성악가의 길을 밟을 수 있었다.
1979년 최우등으로 졸업을 한 조청미가 1980년 처음 배속된 곳은 ‘피바다가극단’이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연구원(대학원) 수재학부를 병행하며 실력을 쌓아가던 그녀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987년 10월이다. 당에서 심사 끝에 프랑스 툴루즈국제성악콩쿨(Toulouse International singing competition) 참가를 허락한 것이다. 제33차 콩쿨의 요강은 칸타타, 오페라 아리아, 프랑스 노래 등을 겨누는 것으로, 26개국에서 105명이 참가를 했다. 2차 심사 직전 감기 몸살에 걸려 위기가 찾아 왔지만, 3차 결선 결과 소련과 캐나다 참가자에 이어 3위로 입상을 했고, 동시에 특별상까지 수상을 하였다.
국내에서의 입지는 이미 탄탄대로였다. 1983년 3월부터 혁명가극 ‘피바다’에서 주인공인 을남 어머니 역에 캐스팅되어 ‘피바다’의 2대 어머니로 활동 중이었다. 1971년 7월17일 초연한 날부터 ‘피바다’의 1대 어머니 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북측 최고의 성악가 중 한명인 김기원으로부터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북측은 1960년대 악기 개량과 더불어 민족가극을 만들어 내었고, 1970년대 이르러 ‘피바다식’ 혁명가극을 선보였다. 북측 5대 혁명가극인 ‘피바다’, ‘꽃파는 처녀’, ‘당의 참된 딸’,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중 완성도가 가장 높다는 ‘피바다’는 1970년대 진행된 문예혁명의 시작이자 전범이 된 작품이다. 피바다가극단은 ‘속도전'을 통해 1년 만에 ’피바다‘를 창작함으로써 혁명문예 발전에 공헌한 단체로 평가를 받아, 주체 60년(1971년) 7월17일을 창립절로 기념하고 있다.
혁명가극 ‘피바다’는 항일무장투쟁 시절인 1936년 8월 만주 만강부락에서 처음 공연한 김일성 주석의 창작 연극 대본 혈해(血海)를 각색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노래를 ‘절가’화 하고 ‘방창’을 도입하였으며, 민족악기에 서양악기를 배합한 주체적 ‘배합관현악’ 편성을 받아들이고 무대미술의 새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주제와 방식의 혁명가극의 전형을 선보였다.
이 혁명적인 전통은 오늘에도 이어져, 피바다가극단은 2016년 4월23일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혁명가극을 초연한 바 있다. 북측이 청년 세대의 새로운 '혁명의 교과서'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은 항일운동가인 최희숙의 이야기를 통해 김정은 시대의 혁명 신념을 주창하고 있다.
‘피바다’는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과 함께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창작하였다는 3대 ‘불후의 고전적 명작’으로서, 1960년대부터 다양한 예술장르로 창작되었다. 1969년에는 백두산창작단에서 예술영화 ‘피바다’(최익규 연출)가, 1973년에는 장편소설 ‘피바다’(국내에서는 ‘민중의 바다’로 발간)와 교향곡 ‘피바다’(김영규 작곡)가 발표되었다.
‘피바다’는 1930년대 해방투쟁 시기에 평범한 한 어머니가 일제와 지주의 학정과 착취 속에서 혁명을 인식하고 투쟁으로 나선다는 내용으로, 남편을 잃고 유랑하면서 자식들의 유격대 활동과 자신의 의식화를 통해 혁명에 대한 헌신과 강고한 의지, 교양적 풍모를 발휘하는 공산주의 혁명가의 어머니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북측은 주장한다. 이렇게 혁명 문예의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가 되는 ‘피바다’ 혁명가극의 어머니가 바로 ‘피바다’ 가극의 주제적 인물이기 때문에 해당 역할을 맡는 배우는 당대 최고의 프리마돈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7년 12월 공훈배우 칭호, 1997년 11월 인민배우 칭호를 수여받은 조청미는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1990년 6월21일 보천보전자악단 예술인 독창회 공연을 참관한 김정일 위원장은 조청미를 눈여겨보아, 1990년 12월3일에 독창회를 열게 했다. 조청미 독창회에 참석한 김정일 위원장은 “녀성독창과 무용 ‘빛나라 정일봉’에서 녀성독창을 한 가수가 노래를 잘하였습니다. 노래 ‘빛나라 정일봉’을 중음으로 색깔 있게 잘 형상하였습니다”고 칭찬하였다.
이후 1991년 6월 두 번째 독창회, 1993년 10월 세 번째 독창회까지 개최하게 되어 북한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청미는 영화배우 오미란과 함께 ‘공연성과 축하편지’라고 하는 팬레터를 가장 많이 받는 예술인으로 부러움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17년만의 도일 무대였을 것이다.
1990년 9월14일 국립평양예술단의 단원으로 조청미는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십수 년 전 동경하던 평양 예술가들을 따라다녔던 철없던 소녀가 이제는 북측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어 고향집을 찾은 것이다. 비록 한반도를 닮은 정원을 집에 둘 정도로 통일을 열망하던 아버지는 그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피바다 주역을 맡은 첫 공연에도, 국제콩쿨의 현장에도 함께해 준 어머니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후쿠오카의 자랑’이라는 현수막이 거리에 내걸렸고, 그녀는 ‘재일조선인의 꽃’이 되었다.
1991년부터 윤이상연구소의 겸임가수로도 활동을 한 바 있는 조청미는 윤이상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산다고 한다. “예술가는 정치에 등 돌리지 말고 정치에 밝아야 하며, 예술가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조청미 임진강 https://www.youtube.com/watch?v=mtkSXWnJi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