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김일성광장 주석단에 내걸린 김씨 3부자의 초상화. 김씨 왕조의 3대 세습에 위협이 되는 ‘곁가지’ 핏줄은 단호하게 제거돼 왔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김현은 이후 ‘장현’이라는 이름으로 장성택의 호적에 올랐다. 1979년 김현은 생모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 동갑내기이자 조카인 김정남과 함께 살았다. 김현은 생모를 이모라고 불렀다. 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은 김정일의 저택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상당히 신뢰가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의 증언에서 거짓은 없다. 이한영이 1982년 한국에 망명했기 때문에 김현에 대한 증언은 모스크바 생활에서 끝난다.
지난해 5월 기자는 미출간된 김정일 회고록을 입수했다. 김일성 90주년 생일을 맞아 김정일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내용이 위주였는데, 여기에 김일성이 아주 허물없이 대했다는 마사지 담당 간호사가 두 차례나 상당한 분량으로 언급돼 있다. 일개 간호사를 김정일이 자세하게 소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최근 신뢰할 수 있는 한 소식통으로부터 김현의 이후 운명에 대해 들었다. 김현은 북한에 돌아와 평양 중심부 서재동초대소에서 살았다. 보통강 인근의 초대소는 1988년 9월 건설됐는데 경치가 매우 좋다. 2000년경 방북했던 한국의 일부 인사들과 기자들도 이 초대소에 머물렀다. 서재동초대소는 150∼170평 규모의 독립식 빌라 21채로 구성됐고, 각 빌라엔 침실이 3개 있다.
김현은 초대소 구내의 한 빌라가 아니라 입구에서 갈라져 들어간 단독 빌라에서 살았다. 2014년 북한은 서재동초대소 옆에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지었는데, 소식통은 그 자리가 김현이 살던 빌라 자리였을 것이라고 했다. 지휘소 옆은 김정일의 본처 김영숙이 살던 서장동초대소다.
김현은 대신 왕족의 대우는 받았다. 최고급 초대소에서 풍족하게 살았고, 차량 번호가 216으로 시작되는 벤츠도 갖고 있었다. 216 번호판은 북한 최고위 간부만 받는 특혜다. 운전수도 있었고, 요리사도 있었다. 물론 감시원들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김현을 한두 번쯤 현지시찰에도 데리고 다녔다. 위협이 될 존재인지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이다.
백수 신세가 된 김현은 난봉꾼으로 변해 벤츠를 끌고 나가 여성 교통안전원들을 유혹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김일성을 닮은 젊은 남자가 216 벤츠를 타고 다니는 데다 경비가 삼엄한 최고급 저택에서 사니 여성들도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김일성이 죽은 뒤 김현은 김정일에겐 짐이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쿠데타라도 일어나 김일성의 핏줄이라며 김현을 옹위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었다.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기로 한 김정일은 결국 2007년 김현을 조용히 죽였다고 한다. 김현은 김일성의 사생아로 태어나 36년을 잘 살고 죽은 것이다.
이렇게 핏줄 정리, 북한말로 ‘곁가지 정리’에 들어가니 김현과 모스크바에서 함께 큰 김정남이 가장 공포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정남 역시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됐다. 외국을 전전하며 동생의 마수를 피하려 했지만, 김씨 왕조에는 자비가 없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