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에는 태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있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입력 2020.03.12 14:00
- 수정 2020.03.20 08:00
또한 세종대왕자 태실의 배치를 보면 원손 시절의 단종 태실을 제외하면 18기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세종의 가계를 보면 18남 4녀를 두었기에 일면 숫자가 맞는 것 같지만, 세자였던 문종의 태실은 예천 명봉사에 조성되었기에 17기의 태실이 있어야 맞다. 그런데 18기가 자리하고 있으니, 1기의 정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성주 태종 태실지의 전경, 현재 민묘만 남아 있을 뿐, 태실 관련 석물은 확인하기 어렵다 @김희태
태함의 개석 @사진 제공 : 성주군청
그러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함주에 있던 태를 찾아 경산부의 조곡산으로 옮겨 가봉 태실을 조성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태종의 어태를 조곡산에 안장한 결과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조곡산과 관련한 기록이 있는데, “주 남쪽 35리에 있다. 태종의 태를 봉안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태종의 태실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옮겨지게 되는데, 『태봉』에 따르면 태실의 봉출 시기가 1928년 8월 12일~13일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봉될 당시 태지석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태항아리의 존재는 확인된 바 있다. 여기에 당시 스케치한 태실 관련 석물이 남아 있어 태종 태실의 형태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 일부 석물만 간신히 남아 있는 성주 단종 태실지
주변 사람들에게 단종의 태실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경상남도 사천이라는 답을 듣게 된다.
정말 단종의 태실은 사천에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문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기록을 통해 동궁(東宮)의 태실(胎室)을 성주 가야산(伽倻山)에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즉 단종의 태실이 최초 선석산에 있다가 성주 가야산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에 있는 원손 시절의 단종 태실의 태실비와 장태 석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세조실록』을 통해 단종의 태실이 법림산(法林山, 현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에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태실이 파괴된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입증하듯 법림산의 단종 태실지 현장에서는 단종의 가봉 태실과 관련한 우전석과 상석 등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주에 있었던 단종의 태실은 어째서 사천에 자리하게 된 것일까?
성주 단종 태실지. 우전석 1매가 눈에 뛴다 @김희태
우전석, 태실 가봉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석물이다 @김희태
태실지에 조성된 민묘. 자세히 보면 태실 관련 석물을 재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의 묘호를 받게 된 시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무렵 왕의 지위를 회복했기에 자연스럽게 노산군 묘에서 장릉(莊陵)으로 능호의 변화가 있었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서 단종의 태실 역시 수개(修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문제는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가야산 자락의 법림산에 있던 단종 태실지는 실전이 된 상태였다.
대신 사천 세종대왕 태실 인근의 인성대군 태실이 단종의 태실로 잘못 알려진 결과 인성대군의 태실에 가봉 태실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단종의 태실을 이봉하는 과정에서 단종의 태지석이 아닌 인성대군의 태지석이 출토된 것이 명백한 증거로, 인성대군의 태실이었음은 명백하다. 또한 태실을 수개하는 과정에서 태함을 개봉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단종의 태실이 성주에서 사천으로 이봉 되었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망주석 아래의 석물. 전석을 뒤집어 사용한 것으로, 묘에서는 이 같은 재활용된 석물이 5기가 확인된다 @김희태
답사 과정에서 추가로 확인된 우전석 @김희태
사천 단종 태실지. 인성대군의 태실이 단종 태실로 잘못 알려진 결과 단종의 가봉 태실 석물이 조성이 된 것이다 @김희태
이러한 내용을 종합했을 때 태실을 부르는 명칭 역시 성주의 경우 단종 태실지, 사천의 경우 ‘傳 단종 태실지’ 혹은 ‘단종 가봉 태실 석물과 인성대군 태실’로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법림산에 위치한 단종 태실지의 경우 태실지에 민묘가 들어선 상황으로, 지난 2012년 지표조사 결과 노출된 우전석 1매와 묘의 석재로 활용된 상석 2매와 전석 3매가 확인된 바 있다. 또한 최근 답사를 통해 지표조사 보고서에는 없는 우전석 1매를 추가로 확인했는데, 태실지에서 불과 20m 아래 일부 노출이 된 상태로 흙과 이끼에 덮여 있었다.
이는 해당 태실지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이내로 지표조사를 실시할 경우 추가 석물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지점이다. 또한 발굴조사에 따라 추가 유물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역사의 현장이다.
출처 : 오피니언타임스(http://www.opinion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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