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뜨겁게 환호했다…'95세 송해'가 알려준 것
입력 2022.02.03 00:35
업데이트 2022.02.03 03:05
이지영의 문화난장
이지영 문화팀장
올 설 연휴 TV 프로그램 중 최대 화제작은 ‘송해 뮤지컬’이다. 1927년생, 95세 현역 최고령 방송인인 송해 선생의 인생을 뮤지컬 형식으로 펼친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KBS2)다. 정동원·이찬원·영탁 등 ‘트롯맨’부터 태진아·김연자 등 최정상 가수까지 출동해 선생의 유년 시절과 6·25 피난길, 이산의 아픔과 악극단 생활, 1988년부터 진행을 맡은 ‘전국노래자랑’ 이야기 등을 시대순으로 담아냈다.
살아있는 누군가의 일대기를 명절 연휴 황금시간 대에 방송한 선례가 있었던가. 설 전날 밤 7시 50분부터 2시간가량 이어진 방송은 시청률 12.7%(닐슨코리아 조사 결과)를 기록했다. 올 설 특집 프로그램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악플 흔한 인터넷 댓글창도 선생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소망으로 채워졌다. 선생에 대한 대중의 사랑과 존경이 대세로 증명된 셈이다.
원로 아닌 현역으로 활약
“부족해서 더 도전한다”
86세대 정치권에 죽비
최근 원로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분야는 단연 대중문화계다. 지난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75), 지난달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호명된 오영수(78)만 있는 게 아니다. ‘선생’이란 지칭이 자연스러운 이들이 여전한 현역으로 종횡무진 활동 중이다.
영원한 현역, 송해의 일대기를 뮤지컬 형식으로 꾸며 설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송한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KBS2). 시청률 12.7%를 기록했다. [방송 캡처]
연휴 전날인 지난달 28일 늦은 밤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에서 배우 박정자(80) 선생을 우연히 만났다.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라고 했다. 선생은 1주일에 네 차례 서울 디큐브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지난해 8월 개막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 빌리의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선생의 60년 연기 내공은 아역배우가 많은 이 작품에서 무게중심 역할을 톡톡히 한다. 공연 도중인 11월에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제작진을 긴장시키기도 했지만, 2주 만에 무대에 복귀하는 근성을 보여줬다.
방금 세 시간짜리 공연을 소화한 팔순의 선생이 추운 겨울밤 지하철로 귀가한다는 게 놀라웠다. 한 정류장만 지나 환승한다며 의자에 앉지도 않았다. 연습실에선 엄격하기로 소문난 선생이지만 의전을 따지는 권위의식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려웠다.
‘빌리 엘리어트’의 16개 넘버 중에 선생이 혼자 부르는 곡은 ‘할머니의 노래(Grandma’s Song)’ 딱 하나다. 주인공을 도맡아 해온 선생에게 너무 작은 역할 아니냐고 물었더니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작품이 좋으면 거기에 생명력을 더하고 싶다. 무대에 설 때마다 기쁘고 흥분된다”고 대답했다. 그 진정성이 선생의 연기 수명을 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 스커트 튜튜를 입고 춤을 추는 배우 박정자. [사진 신시컴퍼니]
현역 최고령 여배우로 꼽히는 김영옥(85) 선생은 나이 여든을 넘기며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해 화제작 ‘오징어 게임’(넷플릭스), ‘갯마을 차차차’(tvN), ‘지리산’(tvN) 등을 섭렵한 데 이어 현재 주말드라마 ‘신사와 아가씨’(KBS2)와 교양 프로그램 ‘유쾌한 상담소’(JTBC) 등에 출연 중이다. 지난달 25일부터는 채널S의 새 예능 ‘진격의 할매’ MC까지 맡았다. 실제 ‘찐친’ 사이인 나문희(81)·박정수(69) 배우와 함께 출연자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첫 방송날 서울 상암동 스튜디오에서 만난 선생은 “느끼는 대로 말한다. 너무 말도 안 되는 고민거리를 들고나오면 ‘아, 이제 그만하고 가’라고 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대중예술인이지만, 얄팍한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세간의 은퇴 연령을 훨씬 넘겨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지난 연말 연극 ‘리어왕’ 공연을 마친 이순재(88) 선생에게 물어봤다. 선생이 교체 배우 없이 원캐스팅으로 주인공을 연기한 ‘리어왕’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매진 행렬을 이어갔고, 연장공연까지 했다. 선생은 “톱 자리에 있었던 배우가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스로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더하고 더하고 해서 살아남는다. 같은 자리에 앉아 반복하는 것이 아닌,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창조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에선 86세대의 용퇴 문제가 논란거리다. 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들어간 86세대의 나이는 많아 봐야 이제 갓 환갑을 넘긴 정도다. 이들이 왜 ‘라떼’와 ‘꼰대’의 아이콘이 돼 벌써 퇴출 대상이 돼버렸을까. 배우와 가수를 ‘딴따라’로 폄훼했던 시절, 그저 무대와 연기가 좋아 대중예술계에 발을 디뎠던 ‘K노인’ 스타들은 긴 세월 초심과 도전 정신을 동시에 지키며 이제 세계 무대까지 사로잡고 있다. 이들의 ‘진격’에서 86세대 정치인의 어긋난 발걸음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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