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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류씨(瑞山柳氏) 유래2

Jimie 2020. 3. 31. 17:28


서산 류씨(瑞山 柳氏) 유래 2

~瑞山柳氏 大宗會~


4. 瑞山柳氏는 무슨 이유로 文化柳氏족보에 입적 했을까?

서산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분적한 성씨가 사실이라면 당연히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1565년)에 등재되어 있어야 논거가 성립 되는데 등재되지 안했다가 1689년 발행한 문화류씨 己巳譜에 비로소 이봉파로 간단한 기록만 있을 뿐 사유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우리 서산류씨와 문화류씨 관계를 심도 있게 연구하려면 세칭 삼산이주(풍산, 서산, 선산, 전주, 진주)류씨 관계 전부를 반드시 고찰해야 된다. 가정보를 보면 1985년 까지 풍산류씨의 시조로 알려졌던 柳資成, 1992년 까지 전주류씨 시조로 알려졌던 柳良梓, 1982년 까지 진주류씨 시조로 알려졌던 柳仁庇 등 三公은 이봉파로 명시하여 부실하게나마 등재되어 있으나, 서산류씨와 선산류씨는 그나마도 가정보에 들어있지 않다. 이를 보면, 서산류씨와 선산류씨는 다른 三柳(풍산, 전주, 진주)가 이봉파로 문화류씨족보에 입적한 사례를 답습하여 124년 후에 1689년 기사보 때 처음으로 입적 하였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삼산이주는 각자의 고유한 성씨본관을 감추고 무슨 이유로 문화류씨족보에 입적 했을까? 성씨 사회가 아닌 현대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우리나라에 족보가 처음 나오기 시작한 조선 중기의 역사성과 당쟁의 시대상으로 돌아가서 살펴봐야 한다. 삼산이주는 共이 고려역사를 이끌어 왔던 왕족의 후예(서산, 선산, 진주는 11대왕 文宗 후손으로 풍산, 전주는 8대 顯宗 후손으로 추정 - 2000년 초 高麗宗姓硏究會 결성, 全州 柳三龍, 若木 柳在河, 開城 王晙恒, 豊山 柳時復, 瑞山 柳秉錧 공동 연구 발표) 들로 역성혁명국가인 조선시대에 사대부 가문으로 살아 남기위해서는 적자생존의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할 것이다. 역사적 대학자이시고 영의정을 지내신 풍산류씨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께서도 실제 풍산류씨 시조는 고려왕손으로 “節”(1985년 보계변증보에 시조로 종통변경)임을 확인하셨지만 그 당시 풍산류씨족보에는 시조가 문화류씨 10世孫 자성(資成)으로 잘 못되어 있는 사실을 묻어버리고 모든 柳氏는 儒州生이니 이 이상은 찾지 말라는 심오한 유서(遺書)를 영모록(永慕錄)에 남기셨다. 여기에서 儒州生이라함은 文化柳氏 류차달의 후손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고 신라에서 좌상을 지냈던 차승색(車承穡)이 황해도 신천군 儒州(후일에 문화면으로 개칭) 九月山에 은거하면서 변성명한 류색(柳穡)의 지파 5세손 고려태조 왕건의 후예들인 父系 王氏와 母系 柳氏 에서 태어난 諱稱母姓인 삼산이주와 그 외 여덟 왕족 류씨를 지칭한 것으로 이는 고려 왕족출신이라는 신분이 들어나게 되면 살벌한 조선의 당쟁시대에서 자손들에게 미치는 화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삼산이주가 문화류씨에 이봉파로 입적(移封)하게 된 까닭을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지만 추정은 가능한 것이다. 문화류씨는 원래 고려 왕족의 후예가 아니면서 고려 초부터 권문귀족이었고 조선 초기 대표인물인 柳寬(夏亭公)은 개국원종공신으로 세종때는 좌의정에 올랐고 柳曼殊도 개국좌명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대대로 조선 시대 최고 권문세가로 수많은 재상이 배출된 명문명족이었다. 그러므로 삼산이주로서는 고려왕족의 신분을 감추고 문화류씨족보에 입적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本姓인 柳姓을 버리지 않고 보전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도였고 또한 사대부 가문으로 살아가는데 문화류씨 동족이라면 당쟁시대에서 피화가 되는 방책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정에서조차 삼산이주의 원 뿌리를 몰랐을 사항이 아니지만 알면서도 묵인해 두는 것이 인재가 많은 삼산이주 후예들을 고위직에 등용하는데 대의명분상 무리가 없었을 것이고, 문화류씨로서는 당쟁이 심한 씨족 사회에서 방계세력이 불어나니 반대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즉, 조정, 문화류씨, 삼산이주류씨 등 삼자 모두 다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서로가 얻는 것만 있는 묘책이었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삼산이주류씨 후손 어느 누구도 조선 사회에서 신분상으로 문화류씨로 행세했던 기록은 어느 고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없으며 특히 조선시대 科擧관련 고문헌인 國朝文科榜目이나 海東名賢錄 등에는 문화류씨와 삼산이류씨 후손들의 각 관향이 명확히 분류하여 기재되어 있다. 고려•조선 양 시대에 거쳐 우리 선조의 인적사항에 관한 조정의 각종 고문헌에 관향이 문화로 되어있는 기록은 단 한건도 발견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우리의 고유한 서산류씨를 문헌상으로 아무런 근거 없이, 지난 날 우리의 잘 못된 족보에만 의존하여 타성인 문화류씨에 종속시키려는 아집은 버려야 하고 고유한 우리의 뿌리를 완벽한 고증으로 확증하여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만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서산류씨가 원래 문화류씨에서 분적했다는 가설은 이젠 깨끗이 타파해야 한다. 문헌학적으로 아무런 근거는 없고 아니라는 근거만 있기 때문이다.

 

5. 諸柳氏를 무슨 근거로 고려의 왕족이라 할까?

고려 왕실에서는, 父系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없는 특이한 제도가 있었다. 왕족의 혈통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려 초부터 충선왕(26대 1308~1313)에 이르기까지 왕족들은 거의 근친 혼인을 하였고 왕실을 떠나는 왕자왕손들은 본래의 왕씨 성을 쓰지 못하게 금지시켰으며 따라서 어머니 성씨(母系姓氏), 즉 外家의 성씨를 따르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이 제도가 원류가 되어 후세 고려 靖宗5년 1039년에 賤者隨母法(賤從母法), 조선시대는 從母法, 從父法 제정). 고려조의 역대 王后 중 柳氏가 가장 많았음은 역사문헌으로 고증되고 있으며 그 류씨들의 후손이 外家 姓으로 변성 하여 거기에서 여러 왕족 류씨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는 高麗史, 高麗聖源譜, 文化柳氏世譜 등에서 고증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고려 왕손 柳氏는 貞州(千秋殿君․孝德太子), 白川, 淸州, 南原, 忠州, 羅州, 善山, 若木, 瑞山, 晋州, 高興, 豊山, 全州등이다. 諸柳외의 휘칭모성(諱稱母姓) 귀족으로 강능김씨 김광감, 경주김씨 김부식, 안산김씨 김은부, 경원이씨 이자겸, 청주이씨 이가도, 파평윤씨 윤관, 정안임씨 임월개, 경주최씨 최승로, 혜주최씨 최충, 평산박씨 박인량, 이천서씨 서희, 남평문씨 문공원등이다(高麗宗姓硏究會의 기록물). 바로 이 근친 혼인제도가 이어져 우리 서산류씨 여러 선조님께서도 귀족혈통을 보전하려는 차원에서 같은 왕족의 후손인 고흥류씨와 혼인했던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6. 瑞山柳氏와 瑞寧柳氏는 어떻게 다르며 같은 족보를 발행할 수 있는?

서산류씨는 宗派이고 서령류씨는 宗派의 8世季孫파로 1910년 최초 호적등재 때 본관을 서령으로 개관(改貫) 분적(分籍)하여 나간 성씨이다. 서산류씨 종중은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에 등록되어있는 187123-2414370 서산류씨대종회이며 서령류씨는 충청남도 서산시에 등록된 187122-3442257 서령류씨문숙공파문중으로 법적으로 별개의 비법인사단으로 제각기 활동하고 있다. 두 종중은 同姓, 同祖, 同本이 아니기 때문에 현행 관습법에 따라 함께 대종회를 결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족보는 본관 단위로 편집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본관이 다른 성씨와 혼합하여 동일 족보를 발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원래는, 서산류씨 최초 족보인 갑술보(1634년) 부터 다섯 번째 족보인 경진보(1880년)까지는 단일 본관인 瑞山이어서 현재의 서령류씨가 서산류씨족보에 들어있었으나 서령류씨가 개관한 이후 처음 발행한 1929년 己巳譜에는 빠져 있다가 1959년 발행한 己亥譜와 1980년 발행한 庚申譜에는 서령류씨가 다시 서산류씨의 일개 분파로 서산류씨족보에 등재되어있다. 2014년 9월, 이미 타성으로 분적하여 나가버린 서령류씨문숙공문중 대표 柳炳淳(父名 宇東)이 서산류씨 후손 수인을 회유하여 우리의 서산류씨족보를 발행하려고 시도하기에, 우리 대종회에서는 3차에 거쳐 서산류씨족보 발행금지를 내용증명으로 통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柳炳淳은 불법으로 두 가지 명칭의 족보를 사악한 목적으로 발행하면서 자기들 서령류씨 후손들에게만 배포하는 족보표제를 서령(서산)류씨족보로 하여 그 족보에 서산류씨 선후대 전부를 등재하여 반윤리적인 족보로 위작(僞作)하여 발행하고 말았다. 태생적으로 서령류씨는 서산류씨족보에 들어 올 수는 있어도 서산류씨는 서령류씨족보에 들어 갈 수 없는 인륜의 이치와 상하관계의 서열은 만고에 불변이라 할 것이다. 우리 대종회로서는 그와 같은 족보표제를 극구 금기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령(서산)류씨 어구는 종파인 서산이 계파인 서령에 종속되어 상하위계가 전복된 표기가 되기 때문이고 나아가 족보 편제상 서산류씨 선후대의 본관이 서령류씨가 되어버린 기현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러했기에, 우리 서산류씨대종회로서는 柳炳淳이 의도적으로 서산류씨를 유린하려는 목적으로 발행한 족보의 존재성을 하루라도 빨리 말살 폐기시켜 버리려고 전 편찬위원들이 서둘러서 근 1년만인 2015년 12월 우리 서산류씨 종중의 아홉 번째 족보인 을미보를 발행케 된 것이다. 즉 최초 족보를 발행한 1634년 당시의 향관이 瑞寧이 아니고 瑞山이었고 따라서 1910년 민적부(호적)에 본관 등록당시 관습법에 의하여 족보의 관적에 따라 종파가 본관을 瑞山柳氏로 등록한 것이므로 지파, 계파 모두는 당연히 본관을 종손파와 동일하게 瑞山으로 호적부에 등록했어야 사회통념상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계파인 휘伯淳문숙공파 손만이 아무런 명목 없이 본관을 瑞寧으로 민적부에 등록 해버렸기에 오늘에 이 불화가 야기 된 것이다.

 

특히 이번 을미보는 문헌학적 고증자료(을미보 제1권 제1편 10~34쪽 보계변증문), 高麗聖源譜, 王車柳三姓古代世系 등을 근거로 하여 지난 4백여 년 동안 와전되어 내려온 문화류씨 계보에서 완전히 단절하여 보계변증한 새로운 우리의 종통을 정립하였고 법적으로 이미 타성인 서령류씨 계손도 삭제하여 진정한 순혈파 서산류씨족보를 최초로 발행하게된 것이다. 서령류씨 삭제 사유는 서산류씨대종회 을미보 1권 제1편 4쪽 발간사와 2권 6쪽에 상세히 기재 되어 있다. 서산류씨와 서령류씨는 본관이 다르기 때문에 족보편제상 같은 족보를 발행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7. 풀어야 할 난제

우리 서산류씨세계(瑞山柳氏世系)는 을미보 1권 632쪽에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다. 실제는 6世에서 두 파로 갈라졌지만 일상적으로는 7世를 기준으로 장파를 금헌공(琴軒公 諱方澤)파 지파를 사암공(思庵公 諱淑)파로 부르고 있다. 두 선조께서는 역사적으로 워낙 훌륭하셨던 까닭으로 7世 선조를 상징적으로 호칭한 것으로 생각 된다. 금헌공과 사암공은 종형제 간으로 금헌공은 1320년, 사암공은 1316년에 태어나셨으니 사암공이 4년 연상이시다. 사암공의 시호는 문희(文僖公)이며 고려 31대왕 恭愍王이 1371년에 시호를 내렸고 금헌공의 시호는 정숙(靖肅公)이며 조선 3대왕 太宗이 1404년에 시호를 내렸다.

 

풀어야 할 난제라 함은 금헌공파는 호적과 족보에 본관이 일치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사암공파 중 일부가 호적부(가족관계증명서)에 본관이 서령으로 되어있는 점이다. 사암공파는 크게 나누어 5개파로 분류 되는데 시조 十世 항열 군수공파(휘諍 舒川郡守), 부윤공파(휘種禮 全州府尹), 감찰공파(휘種信), 태제공파(휘方善), 현감공파(휘洵挺 果川縣監) 이다. 그 중 군수공파와 현감공파는 서산지역이 世居地이고 나머지 세 파는 영남지방으로 영천, 경주, 울산 등으로 世居地가 다르다. 영남지방이 世居地인 위 세 파는 호적부에 서산으로 되어있어 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서산지역이 세거지인 위 두 파가 호적부에 본관이 서령으로 되어있는 점이 풀어야 할 난제인 것이다. 이 두 파의 파조는 思庵公이시고 思庵公의 본관은 서산이다. 사암공에 관한 모든 고문헌과 조정의 공문서에는 본관이 서산으로 나와 있고 간혹 瑞州(서산의 옛지명)로 기록 되어있으나 서령으로 되어있는 문헌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함에도 사암공 선조의 4世인 위 두 派의 孫이 호적부에 서령으로 등재되어있음은 분명코 행정상 착오였다는 이유 말고는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이 두 派 孫이 서령류씨 世居地와 같은 서산지역에서 거주하다보니 왜정초기 호적부제도가 갑작이 시행되면서 서령류씨 후손들에 휩싸여 본관을 서령으로 호적부에 잘못 등재한 것으로 유추 할 수밖에 없다. 이유야 어쨌든, 이 세상 어느 성씨도 始祖와 派祖의 本貫과 다르게 호적부에 등재 되어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서령류씨만 하더라도 휘伯淳을 派祖 및 貫祖로 하여 후손 전부가 서령으로 본관이 통일되어 있는 현상은 정상이지만 위 思庵公손 두 小派의 경우는 정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종회 차원에서 주도하여 도울 수 있는 사항도 아니고 참으로 어려운 난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현행 법제도는 합리적이어서 법적절차로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면 본관을 정정 할 수 있는 길은 열려있는 것이다. 어느 때라도 대종회의 협조가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서 함께 난제를 풀어서 반드시 정상화 시켜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추호도 위 군수공파와 현감공파를 비방할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같은 혈족으로서 안타까운 심정을 저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8. 향관과 본관은 어떻게 다른가?

鄕貫과 동의어로 貫鄕, 先鄕, 本鄕, 貫籍 등이 있고 本貫과 동의어로 本籍, 貫, 本 등이 있다. 모두 다 선조의 世居地 지명을 뜻한 용어이나 향관의 동의어는 地名이 개칭될 때마다 개칭된 지명에 따라 향관을 다르게 불러졌고 본관은 왜정초기에 조선통감부(총독부)의 행정용어로 한번 본관으로 호적부에 등재하면 그 후 지명이 개칭되어도 변경 없이 그대로 존속되는 행정용어였고 현재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본”으로 표기 하고 있다. 우리의 족보에 의하면 서산류씨 향관이 箕郡, 富城, 瑞寧, 瑞州, 瑞山 등 다섯 가지로 나와 있지만 실제 향관으로 쓰인 것은 瑞山이 주(主)이고 瑞州는 1308~1310년으로 2년 동안, 瑞寧은 1310~1413년으로 103년 동안 지명 변경에 따른 것 이었고 그 외는 서산을 향관으로 1413년부터 변함없이 써오다가 1634년 갑술보를 발행하면서 관습법에 의하여 瑞山柳氏族譜로 명명했던 것이고 1910년 최초호적(민적부) 등재 때 족보의 관향에 따라 당연지사로 서산을 법적인 본관으로 등재하였던 것이다. 箕郡과 富城은 지명 변경의 연력이며 우리 선조께서 실제로 향관으로 쓰인 기록은 없다.

 

9. 시조 成澗公께서는 언제 무슨 공훈으로 瑞寧府院君(서령부원군)에 봉해졌는가?

시조 成間公에 관한 문헌학적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단, 과거의 우리서산류씨족보뿐만 아니라 각종 성씨관련 발간물에 서산류씨시조는 成澗이고 작호는 瑞寧府院君으로 원래 문화류씨에서 분적한 성씨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 중 원래 문화류씨에서 분적했다는 기록은 역사문헌상 전혀 근거가 없으므로 2015년 을미보를 발행하면서 보계변증하여 종통을 새로이 정립하게된 것이다. 시조 성간공께서 서령부원군에 봉해진 기록은 못 찾았지만 고려 恭愍王 때의 역사성과 당시 조정에서 思庵公(시조 7세손 휘 淑)의 높은 지위와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한 공, 홍건적을 물리친 공, 흥왕사 변란을 진압한 공훈과 그 당시 瑞山지명이 서령이었다는 점 등의 개연성을 함축해 보면 成澗公을 서령부원군에 봉해진 근원을 역사성에 비추어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①우선 고려 시대는 왕족 출신에게만 府院君 또는 君의 작호를 주었기 때문에 成澗公은 왕족 출신이었음으로 본인이나 또는 후손이 나라에 특별한 공적을 세우게 되면 부원군이나 군(君)의 작호를 받을 수 있는 신분상 조건을 갖추셨던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는 엄격한 귀족사회로 왕족이나 귀족출신에 한 해서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는데 성간공의 증손 휘公器께서 고려 신종7년(1204년)에 과거에 급제하신 고증(족보 제1권제1편 17쪽, 22쪽)과 휘公器의 次子 祖衡公은 王師를 지내셨으니 성간공은 왕족출신이 확실하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②사암공께서는 왕족후예로서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기에 1340년 문과에 급제 바로 다음 해, 1341년 恭愍王을 수행(실은 왕족의 대표인물로 인질)하시어 元 나라에서 10년 동안을 볼모로 함께 계시면서 온갖 인고의 애한을 같이 나눈 고려 왕족사이의 막역지간으로 지내오다가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본국에 함께 돌아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승진 공민왕을 최측근에서 보좌 하셨던 것이다. ③1361년 홍건적 2차 침입 때 왕에게 권하여 남행하실 때 호종하셨고 평정후 환도하시어 사암공은 호종(扈從)의 1등 공훈으로 충근절의찬성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에 책록, 瑞寧君에 봉작 되셨다. 이 때 같은 왕족 출신이고 함께 호종한 류습(柳濕 忠靖公 본관高興)은 高興府院君을 습봉(襲封, 조부 柳淸臣英密公 高興府院君) 받았다. 여기까지는 실제 역사기록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함축해서 추리하면 恭愍王의 입장에서 思庵公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고찰했을 때 같은 호종공신이고 같은 왕족 후손인 고흥류씨 류습(柳濕)은 고흥부원군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유독 서산류씨 선대는 그 때까지 아무도 府院君이나 君을 받지 못한 차별적 대우를 보상하려는 배려에서 사암공은 당시 출신지명인 서령을 부쳐 瑞寧君으로 봉작하고 始祖 成澗公은 한 위계 더 높은 瑞寧府院君으로 봉해 졌다는 추론이 성립 되는 것이다. 공민왕께서는 王이라 할지라도 함께 호종 功을 세운 류습(柳濕고흥류씨)을 비록 고흥부원군에 책봉했다하여 한꺼번에 思庵公과 시조 成澗公 두 분을 같은 위계인 서령府院君에 봉작하기에는 예법에 무리였을 것으로 시조 成澗公에게는 정1품 瑞寧府院君으로, 사암공은 종1품 瑞寧君으로 차등 봉작 되었다고 추정함이 역사성에 비추어 합치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두 가지 실체가 내재되어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사암공께서 瑞寧君으로 봉해진 해는 역사 기록상 1361년이고 사암공의 증조 휘公器께서는 1204년에 급제하시어 1240년 중반 예천(甫州) 원의 벼슬살이를 거쳐 말년에 조정에서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판전이사사(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判典理司事) 종 1품직을 봉직하신 이력은 그 당시에서는 불과 100여년 전의 짧은 역사인데 그와 같은 역사적 기록을 몰라서 휘公器 선조를 서령부원군으로 추증 안한 것이 아니고, 시조 成澗公께서 왕족출신 음사관으로 휘公器 선조보다 더 높은 품계의 재상에 오르셨던 당시의 확실한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후손이 시조로 섬겨오던 차에 恭愍王 제위 때 思庵公의 공훈과 운명적으로 元나라에서 볼모생활로 맺어진 인간관계로 서령부원군을 추증 받으셨다는 추정이 여합부절로 타당한 것이다. 또 하나의 실체는, 시조가 서령부원군이므로 서령을 본관으로 해야 한다는 서령류씨의 주장은 전혀 역사적 실증에 맞지 않음이 위 고흥부원군 습봉으로 명백히 들어 난 것이다. ○○부원군 앞의 지명은 관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고 봉작 당시 관계인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단순 접두어에 불과 했기 때문에 고흥류씨 경우 할아버지와 손자가 두 번 고흥부원군에 봉작한 것이지 만일 관향의 뜻이었다면 조정에서 같은 성씨 조손(祖孫)에게 같은 관향을 두 번 내릴 수 없다는 논증이 성립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 成澗公의 작호가 서령부원군이었음으로 본관이 서령이라야 맞는다는 서령류씨문증 측의 주장은 관행적으로 관작 앞에 붙이는 관계인의 출신 지명이 곧 본관이라고 혼돈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관”의 뜻은 왜정초기 제정된 특수행정용어이다.

 

10. 우리 始祖 成澗公의 上代는 안계신가? 아버지 없는 아들이 있는가?

당연히 上代가 계셨을 것이고 아버지도 계셨을 것이다. 단 누구인지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록문화는 인류역사보다 턱없이 짧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종원 중에는 구보(舊譜)에 연연하여 成澗公의 上代를 문화류씨시조 柳車達公으로 하면 자연스럽게 車씨, 王씨, 姒씨, 중국 皇帝 姬씨로 연결되어 上代가 완전하다고 믿지만 姬씨 왕조는 기원전 B.C. 2704~2205년인데, 그렇다면 姬황제의 上代는 누구인가? 姬황제도 아버지가 있었겠지만 기록이 없어서 모르지 않는가? 결론은, 上古代가 문헌학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족보에 기록 하지 안한 것을 두고 上古代가 없는 족보는 잘 못 된 것이라고 주장 한다면 이는 인류역사와 기록문화를 혼돈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어느 성씨가 뿌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11.  瑞山柳氏 鼻祖와 中始祖는 어느 분이신가?

우리 서산류씨 비조와 중시조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관습법에 따라 비조와 중시조는 대종회 총회에서 정해야 할 사항이다. 시조 휘成澗의 上古代를 기록으로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鼻祖를 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中始祖는 始祖4世 휘公器선조를 중시조로 섬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며 그 이유는 우리 서산류씨 선조 중 가장 확실한 문헌학적 첫 고증으로, 高麗神宗 7년(1204)에 급제하시어 경상북도 예천 최초 원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시어 중년에 조정에서 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에 오르셨고 증광정대부(匡靖大夫종이품)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추증 받으신 선조이기 때문이다.

 

12. 柳氏는 高麗 朝鮮의 姓氏時代에서 사회적 위상은?

우리 柳氏는 예부터 三韓甲族으로 일컬었고 東韓名閥로 손꼽혔던 우리나라 최고의 名文姓氏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우리나라 上古로부터 朝鮮末까지의 文物制度를 분류하여 정리한 책으로 총 250권 50책)에는「高麗士人以族望相高 柳, 崔, 金, 李 四姓爲貴族」이라 하여 류씨를 四大名族의 하나로 꼽고 있으며 權文海가 지은 大東韻府羣玉(모든 역사적 사실을 뽑아 수록한 일종의 옛백과사전, 조선 宣祖때 발행)에서 東韓名閥로 20姓을 뽑았는데 柳氏를 아홉번째로 꼽고 있고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290여성씨 가운데서도 우리 柳氏가 그 淵源도 가장 오래 일뿐 아니라 반만년 민족사에 가장 크고 화려한 발자취를 남긴 姓氏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문화류씨 가정보 발문에도 柳氏는 三韓甲族이라 기재되어있다. 위 증보문헌비고와 大東韻府羣玉를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했으나 앞으로 탐구하게 되면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리려한다. 우리의 여러 선조님께서 해동명헌록(海東名賢錄)과 인물고(人物考) 등에 수록되어 있음을 규장각과 국립중도서관에서 확인 하였다.

우리 류씨의 근원을 원파록(中國 江南王氏의 江南譜에 수록되어 있는 得姓記錄)에 의거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4,700여 년 전인 기원전 2704년에 중국땅에서는 黃帝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帝位에 오르셨는데 黃帝의 本城은 公孫氏이고 휘는 탄강(誕降)하신 地名을 따서 헌원(軒轅)이라 하시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母系社會였으므로 黃帝께서는 母后(어머니)께 성을 지어 드렸는데 본래 母后께서 姬水라는 강가에 살았으므로 姬氏라는 姓을 지어 바치고 자신도 모후의 성을 좇아 姬씨로 성을 바꾸고 土德으로 제위에 오르셨다하여 黃帝라 부르도록 하시었다. 黃帝께서 그로부터 장장 110년을 帝位에 계시었다. 이후 姒氏, 王氏, 車氏, 柳氏 등으로 변성(變姓) 해 왔고 그 중 한 柳氏가 바로 우리 瑞山柳氏라는 전설적인 원파록이 을미보 제1권 제9편에 원문으로 나와 있으며 간편한 차트로 편집하여 다음쪽에 첨부하였다.

 

우리 인류는 근본적으로 기록보존 문화가 인류역사보다 짧기 때문에 어느 성씨도 뿌리를 올바르게 찾을 수는 없다 할 것이다.

 

                         끝

 

                              2016년 9월 30일

                              서산류씨 대종회장 류 병 준 역음

 

첨부 (원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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