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민비시해의 진상 .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장례식

Jimie 2021. 11. 17. 07:47

두번의 민비 장례식

 

동아일보

 

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을 이용하여 민비 세력을 숙청하고 재집권에 성공 했다. 1873년 권좌에서 물러 난지 9년만 이었다. 폭도들은 민비를 살해 하려고 궁을 이잡듯이 뒤졌으나 민비는 궁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에 숨어 있었다. 대원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시신이 없는 민비 장례식을 치루 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33일만에 청군에게 잡혀서 텐진에 구금되었고 민비는 궁을 나간지 51일 만에 청의 도움으로 환궁 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은 청의 굴레에서 벗어 났다. 덕분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신은 황제가 되었다. 승자인 일본은 러시아가 견제하는 바람에 아직 고종을 마음대로 하기가 힘든 시기 였다. 1897년10월12일이었다. 첫 주요 행사는 명성황후 장례식이었다. 고종이 황제가 되었으니 민비도 황후로 승격했다. 1895년10월8일 민비가 시해된지 2년2개월 만인 1897년11월22일 황후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 되었다. 100만 달러 짜리 국장이었다(동아일보). 당시의 국가 재정 상태를 생각할 때 어처구니 없는 액수 였다. 민비 시해후 아관파천등으로 전국이 안정되지 않아 미루었던 장례식이었다. 황후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기위해서 였을 것이다.

 

왕비가 된지 29년, 향년 45세였다. 그가 왕비로 있는 동안 민씨 척족의 세도는 안동 김씨를 능가 했다.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복잡한 국제정세를 십분 이용 했다. 시아버지 흥선은 아들(고종)의 입지에는 아랑곳 없이 민비와 민씨들의 권력을 끝임 없이 위협 했다

 

고종은 대원군을 임종하지 않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898년5월15일 흥선대원군 장례 행렬이 덕수궁 앞을 지나 갔다. 고종은 궁 안 먼 발치에서 부친 장례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교국가의 왕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불효였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98년 1-2월 경에 러시아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니콜라이 그로데코프에게 고종과 화해를 중제 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세상 어느 곳에나 부모와 자식간에는 화목하게 산다. 그런데 수십년전 4명의 신하가 임금 앞에서 늙은 아비를 비방한 일이 있었다. 하늘에 맹세코 말하지만 우둔한 자들이 음모를 꾸며 부자지간을 이간시켜 놓음으로써 나는 지금 아비취급을 못하고 있다. 고종은 천성은 선량하나 나쁜신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제3권 145-146)

 

"내가 주상을 알현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말씀하시고 곧이어서 "어가가 오지 않는냐?" 고 되물었다. 그리고 세상을 뜨 셨다. (황현의 매천 야록) 1898년2월22일, 흥선은 79세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황천에서 두사람이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30여년동안의 악연이었다. 나라의 왕을 가운데 두고 왕의 아내와 아버지는 사활을 건 암투를 벌렸다. 나라의 장래는 뒷전이었다. 외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상대를 밀어 내려는 행태는 민비나 대원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죽을 때 까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민비와 민씨 척족 들은 그들의 지탄을 받았다. 왜냐면 그들의 가렴주구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보다 더 심했기 때문이었다. 왜 고종과 아버지 흥선은 원수가 되었을 까?

 

 

을미사변(乙未事變) - 민비시해

* 일본인의 블로그를 번역한 글

 

민비는 일족의 영달 때문에 국비를 낭비하여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장본인

(민비 장례식)

 

19세기 말,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삼국 간섭이 있어 이에 일본이 굴복하자 조선의 친일파가 동요하고 민비 일파가 러시아에 접근하여 다시 힘을 갖게 됩니다. 이 당시 왕궁을 호위하던 것은 미국인 지휘 아래의 시위대였지만 러시아는 친일파 척결을 위하여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된 "훈련대"를 폐지하고 무기를 압수하려고 했습니다. 훈련대는 격앙합니다. 민비 일파에서는 조선의 서태후라고 불리는 민비가 실권을 갖고 있었는데 훈련대는 주한 일본 유지들과 반 민비에 연합합니다.

 

메이지 28 10 7일 조선 정부가 훈련대 해산과 무장 해제를 통보하자 8일 새벽, 훈련대와 한일 유지는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을 거느리고 왕궁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시위대와 충돌합니다. 이 소란 속에서 민비가 살해됩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혁명 정부가 수립되게 됩니다.

 

대원군의 격문

 

"근년,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선량한 자를 배척하고 교활한 것을 이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단했다. 때문에 500년의 종사(국가의 )가 한시도 유예 없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짐은 이를 좌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지키고, 사악한 패거리를 쫓아내고 유신의 큰 기술을 이루어 500년의 종사를 지키기로 하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청일 전쟁의 일본의 승리로 유신의 흐름이 된 것, 러시아와 통한 민비 일파의 개혁을 원상 복구하여 그 불만이 을미사변이 되어 다시 개혁 노선으로 향했습니다.

 

요즘 NHKテレ朝(아사히 텔레비젼)가 이 민비 살해를 일본인 미우라 공사들의 범행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으며 NHK 등은 "언덕 위의 구름"의 드라마 중에 원작에는 씌어 있지 않는데 일부러 느닷없이 조작 시나리오를 삽입하는 악질적인 것까지 실시했습니다. 프로젝트 JAPAN에서도 조작 편향 보도를 했다고 합니다. 테레조 등은 "이것은 반일 감정의 근저"라며 완전히 거짓말을 방송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누가 죽였거나 일본의 유지인가 훈련대인가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데 일본인으로 규정하고 심리전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아무튼 일본인에게 속죄 의식을 심는 남다른 의욕이 느껴집니다. 실제로는 살해는 훈련대의 우범선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데(자백하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외국인 인사를 직접 죽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삼국 간섭의 직후라 국제 문제로 꼬이면 곤란한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투에 익숙한 미우라 공사(육군 중장)가 작전 지휘한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군인들이 관여하지 않고 모양이 바뀌어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coffee 씨의 블로그에 많은 자료가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조선 측의 대처는 험난했습니다. 훈련대는 해산됐고 동대장 이두, 우범선은 휴직 명령을 받고 민비 살해 혐의자 33명을 체포했으며 재판을 한 결과 이주회등 3명을 처형했습니다. 이주회는 미우라 공사가 일본에서 하옥된 것을 듣고 "일본 자신의 나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일에 다수의 지사가 구속되는 것을 본다. 이는 간과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한일 동지는 끈끈한 유대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민비는 사후에 대원군의 제안으로 신분을 박탈당해 평민으로 격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특명 전권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노력에 의해서 "명성황후"라고 하는 황족으로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언론은 감추고 있죠.

 

(역주: 민비가 일본인 낭인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이야기는 거짓으로 유포된 이야기라고 하며 사실은 대원군이 이끄는 조선훈련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대원군 일행이 민비를 암살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갈 때 일본인 남자들(낭인으로 생각됨)과 순경들이 동행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칼로 민비를 살해한 것은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인 훈련대장 우범선이라고 합니다 당시 재한 영국공사관원이 회상기록에 "민비를 암살한 것은 대원군이다"고 기술했다고 합니다 또 당시 상황은 그 때에 궁중에 있던 미국인과 러시아 인에 의해 목격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