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명성황후 죽였다, 간단했다" 126년만에 발견된 '을미사변 고백'

Jimie 2021. 11. 17. 07:31

"명성황후 죽였다, 간단했다" 126년만에 발견된 '을미사변 고백'

중앙일보

입력 2021.11.16 17:50 업데이트 2021.11.16 17:54

명성황후(1851~1895) 시해에 직접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고향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126년 만에 발견됐다.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는 내용 등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명성황후 시해가 일본 국가 차원에 주도된 것은 아니라는 그간 일본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 역사학자들이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사건 직후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실린 16일자 아사히신문. 이영희 기자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1865~1945)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한 8통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호리구치는 당시 외교관·경찰·민간인 등으로 구성된 을미사변 실행단의 일원이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일본 니가타(新潟)현 나카도리무라(中通村·지금의 나가오카시)의 한학자이자, 호리구치의 친구인 다케이시 사다마쓰(武石貞松)다.

 

새로 발견된 편지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쓴 것으로 총 8통이다. 이중 6번째 편지는 을미사변 다음날인 1895년 10월 9일에 쓰여졌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이 상세하게 기록됐다.

그는 편지에서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썼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서 오히려 놀랐다"는 소감도 덧붙였다.

 

해당 서한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시에 사는 우표·인지 연구가인 일본계 미국인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씨가 고물상에서 입수했다. 붓으로 흘려쓴 글자의 내용은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씨가 판독했다. 아사히신문은 "편지가 원래 보관돼 있다고 여겨지는 장소나 기록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을 비춰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전했다.

김문자씨는 "사건의 세부(내용)나 가족에 관한 기술 등을 비춰봐도 호리구치 본인의 진필로 봐도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려지는 문면(文面·편지에 적힌 문구, 표현에서 보이는 취지)에서 새삼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며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을미사변의) 세부 사항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가치 높은 자료"라고 덧붙였다.

 

일본 근대사와 한·일 관계사에 정통한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대 명예교수는 아사히신문에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면서 "당시 일본이 조선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사건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당사자로부터 1차 자료가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또 "(이 자료가) 사건 당사자들이 현지인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해당 서한에 대해 "을미사변이 일본 국가 차원의 범죄라는 걸 입증하는 증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명예교수는 "그간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대원군의 뜻을 따라 일본인이 도운 것이며 을미사변 당시 실행단은 일본 낭인 등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해왔다"면서 "범죄 현장에 있던 현직 외교관이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인정한 서한이 발견된 것은 을미사변이 일본의 국가범죄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강조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櫻) 당시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 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하에서 을미사변을 실행한 일본인들은 조선이 아닌 일본 재판에 회부됐다. 호리구치 등 48명은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면소(免訴)·석방됐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박형수 기자 misquick@joongang.co.kr

 

 

ch87**** 19분 전

여러 사람들이 써 논 댓글을 살펴보면, 朝鮮國 이라는 왕정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 이 개국하면서 고종 임금은 王에서 帝國의 皇帝로 稱하게 되고 王妃는 皇后로 尊稱하게 된다. 그 분이 바로 비운의 閔皇后인데, 고종황제 께서는 대한제국으 근대화에 엄청난 노력을 한 분이다. 한 예로 1899년 당시 한양 도성 안에 전차를 다니게 했고(일본 도쿄는 3년이 늦은 1902년 개설) 우정국을 설립해서 나라 안을 소통 함에 있어 신속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박학 다식해서 문신들과의 조회에서는 항상 나라 밖 정세 나마 알고자 노력한 통치자 였고, 지폐를 발행하고. 광산 개발. 철도 부설 등등 큰 업적을 남겼으나 일본의 간교한 책략에 말려들어 1905년 을사보호 강제 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짧은 역사(1897년 10월 12일 대한 제국 선포 이후 1910년 8월 29일) 속에서 제국의 황후가 이웃나라 浪人(사무라이)들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한 불행한 사건이다(선조들 께서 무능했다 말 마라

 

nave**** 5시간 전

아래 답답한 사람들아! 민비를 악녀라고 저주하고 잘 죽었다고 하는데 대원군이나 고종은 악당이 아닌가? 집안싸움으로 며느리를 죽이고 대원군은 청나라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고 고종은 한일합방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헌납했지. 고종이 독립협회를 탄압하지 않고 권력을 양도 했으면 대한제국이란 나라는 존속 했을지도 모른다. 독립협회를 탄압하여 당시 이승만은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집안 싸움에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그놈이 그놈이지.

 

cys0**** 10시간 전

매관매직을 일삼아 전라도 군수자리. 도지사자리 만냥부터 수십만냥까지 받고 넘기면 그 본전생각에 전라도 백성들 똥창자까지 빼내다 들고 일어난게 동학농민항쟁이다. 그 주범이 민자영이다. 그 돈으로 대궐에서 무당년을 무령군으로 봉하고 매일 관우장군을 모시고 굿판을 벌이니 나라 꼴이 어쩌나? 민자영이 아버지 풍수발복빈다고 그 시체를 들고 전국방방곳곳 국상질이나 그 돈과 백성의 고통을 어찌랄까? 외국 공사 여편네 환심빨에 정부예산 절반을 넘겨주고 조선표범 수백마리를 잡아 민자영이 카페트를 만들던 엿같은 것들 아닌가? 동학농민 수십만을 살육한 그 장본인이 민자영이고 군인들 월급에 쌀을 모래넣어 준 인간이 민자영이고 그 군인들 죽이라 중국군대 불러들인게 민자영인데 갸 죽음이 원통하니?

일국의 궁성을 수비할 경비병과 군대가 있으나 마나한 상태라 왕비 처소에 너무나 쉽게 들어가 놀랐다는 당시 낭인참가자의 편지란다.

 

국력이 약하고, 외세를 막을 국방력이 없었으니...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명성황후 암살사건에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이 사건 다음 날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며 시해 정황을 자세하게 적어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한이 발견됐다고 아사히신문이 16일 보도했다. 아사히신문 홈페이지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