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Taiwan)
타이완은 옛 문화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산업화된 현대국가로서, 수려한 산악지역 기슭에 일련의 악취나는 도시들이 자리잡고 있는 나라이다. 세븐 일레븐 편의점에서는 전통적인 국수를 팔고, 미니 스커트를 입은 토착 원주민들이 있으며, 절에서 의식이 끝난 다음에는 수상스키를 타러 가는 그런 곳이 타이완이다. 타이페이의 물밀듯한 인파가 여행자의 발길을 휩쓸지만 도시경계에서 조금만 물러나면 왜 타이완이 일라 포모사(Ilha Formosa), 즉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산봉우리는 구름 속에 솟아있고 멋진 검은색 화산암들이 해안을 따라 둘러싸고 있으며 폭포는 물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타이완은 컴퓨터로 그려낸 중국의 수채화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확실히 중국과 함께 한 대만의 역사는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마찰과 골치거리가 되고 있다. 본토의 중국 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민주진보당간에 계속되는 주도권싸움은 아직 전면전으로 진전되지는 않았지만 가끔 내전의 썰렁한 분위기를 띠는 경향이 있다. 중국 본토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반면, 타이완은 원칙상으로는 중국에 동의하며 불가능한 줄다리기를 팽팽히 하고 있지만 사실상으로는 독자적인 공화국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진먼현(중국어 정체자: 金門縣, 병음: Jīnmén Xiàn)은 중화민국 푸젠성(福建省)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성(省) 정부의 청사가 위치하고 있다. 현의 영역은 진먼섬(金門島)과 그 부속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중화민국 정부 소재지인 타이완과는 약 210km에 달하며,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인 중국 대륙에서 불과 1.8km의 거리로 매우 가깝다. 마쭈 열도(馬祖列島)와 함께 진마 지구(金馬地區)로도 불린다.
福建省 Fújiàn Shěng
Quemoy and Matsu
After its defeat in the Chinese Civil War in 1949, the Republic of China retreated to Taiwan. Since then, the communist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has controlled most of Fujian province, while the Republic of China has held on to the islands of Quemoy and Matsu.
The islands of Fuchien under the administration of the ROC are:
- Quemoy County
- Quemoy (金門島)
- Lesser Quemoy (小金門島)
- Wuciou (烏坵嶼)
- Daciou (大坵)
- Siaociou (小坵)
- Dongding (東碇)
- Dadan (大擔) and Erdan (二擔)
- Lienchiang County (Matsu)
- These islands have a total area of 182.66 km² and a total population of 71,000 (2001).
역사
한때 정성공(鄭成功)의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지였다. 1915년에 독립된 현이 되었다. 1949년 말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양 측이 이 섬의 지배를 둘러싸고 격돌한 고령두 전투(1949.10.24 - 10.26)에서 공산당 측이 대패하여 이 섬에 대한 국민당의 지배가 굳어졌다. 중국인민해방군과의 전투를 이유로 1956년 7월부터 진마(金馬, 금마) 지구에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진먼 포격전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중국 인민해방군이 무려 47만발에 이르는 포탄을 이 섬에 쏟아부었으나, 중화민국 국군에 패하였다. 이 후에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진먼섬에 대한 포격은 1978년까지 20년 간 계속되었다. 진먼섬은 분단국가인 중화민국 정부의 최전방 지역으로, 마쭈 열도와 함께 섬 전체가 군사적으로 요새화되었다.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영어: Second Taiwan Strait Crisis) 또는 진먼 포격전(영어: 1958 Taiwan Strait Crisis)은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진먼 섬(중국어 정체자: 金門)에 주둔하고 있던 중화민국 국군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포격을 가한 전투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진먼포전 (중국어 간체자: 金门砲战), 중화민국에서는 8.23포전 (중국어 정체자: 八二三砲戰)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7만발에 달하는 포탄을 퍼부었으나, 중화민국 육군 진먼방위사령부(金門防衛指揮部) 사령관이었던 후리엔(胡璉)은 미국 해군의 해상수송 지원을 받으며 진먼 섬을 사수하고 8인치 유탄포로 샤먼의 중국 인민해방군에 반격을 가했다. 그 후, 공격의 횟수가 점차 줄어들다가 1979년 1월 1일 미·중 국교 정상화 이후 포격전이 멈췄다.
경과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다진먼 섬ㆍ샤오진먼 섬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전투개시 2시간 만에 4만발, 하루 만에 5만7천발의 포탄이 사용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화민국 국군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를 목표로 공격하여 중화민국 측에서는 4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진먼방위사령부의 부사령 지싱원(吉星文)ㆍ자오지아샹(趙家驤)ㆍ장지에(章傑)가 전사하였고, 참모장 류밍쿠이(劉明奎)와 진먼 시찰 중이던 국방부장 위다웨이(兪大維)는 부상을 당했다.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진마 지구를 탈취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하였다.
8월 24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진먼의 탄두진지, 랴오뤄 만(料羅灣, 요라만) 부두, 진먼공항 및 포병진지에 대해 포격을 집중시켰고, 이에 대해 중화민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포병진지에 반격을 개시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항만과 공항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진먼의 봉쇄를 시도하였다. 진먼 봉쇄작전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 미국정부는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하여, 중화민국 국군에 대한 물자 보급을 지원함과 동시에, 공군・해병대・육군의 합동 훈련연습을 실시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경고하고, F-104A 전투기 등을 중화민국에 급파, 작전지휘센터를 설치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다.
8월 25일 이후, 중화민국군은 진먼에의 해상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야간 보급작전을 행하였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은 수뢰정 등을 동원하여 보급 저지를 꾀하였다. 9월 1일 펑후 제도의 마궁 시(馬公)에서 출항한 중화민국군 보급함이 다음날 랴오뤄 만(料羅灣)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함정과 맞닥뜨려 9.2해전(九二海戰)이라 불리는 전투가 발생하였다. 중화민국 측은 이 전투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함정 10여 척이 격침되었다고 발표하였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충돌에 의해 2척이 침몰하였고 보급함 타강호(沱江号)가 큰 피해를 입혔다고 발표하였다. 또 공중전에서는 중화민국 측이 제공권을 확보하였다.
태무산 진먼방위사령부(太武山金門防衛指揮部), 기념원사령 유옥장 상장(紀念元司令劉玉章上將)의 석비. 유옥장과 후 리엔(胡璉)은 1950년대에 진먼 방위를 담당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중화민국에 진먼 다오와 마쭈 열도는 미국ㆍ중화민국 공동방위조약에 명시된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진먼 섬의 포기를 요구하였지만, 장제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은 사태해결을 위해 제3국을 통해서 진먼 방위 전투에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시사하였다(미국 공군이 푸젠성의 샤먼 주변에 대한 핵공격을 계획하였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국 국방부의 기밀문서에 의해 2008년 밝혀졌다). 또 중화민국군에 대하여는 무기를 공여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미ㆍ소간의 핵공격을 촉발하지 말라'고 중화인민공화국에 경고했다. 9월 18일 이후에는 미국으로부터 8인치 유탄포가 진먼에 제공되었고, 9월 26일 이후 중화민국 국군은 대등(大嶝)과 이등(二嶝)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진지를 공격, 큰 피해를 입혔다.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怀)는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을 7일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중지를 발표, 적극적인 공격을 멈췄고 포격전은 소강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0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하루씩 걸러 포격한다'고 발표하였고 포격은 차츰 줄어들어 갔다. 최종적으로 전투가 중지된 것은 1979년 1월 1일 미ㆍ중 국교수립에 의해서였다. 국교수립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쉬샹첸(徐向前)은 『대ㆍ소 진먼도 등의 도서에 대한 포격전 중지 성명(停止砲撃大・小金门等岛屿的声明)』을 발표, 20년에 걸친 포격전은 마침내 멈추게 되었다.
영향
진먼 포격전에는 47만 발이 넘는 포탄이 사용되어, 전사(戰史)상 최고의 착탄밀도(著彈密度)가 기록되었다. 포격에 사용된 포탄의 탄신(彈身)에는 매우 단단한 경금속(硬金屬)이 사용되었고, 진먼 섬의 주민들은 포탄을 재활용하여 식칼을 만들게 되어 현재까지도 진먼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어 있다.
2차 대만해협위기 | 진먼포격전
2020년 8월23일 중국과의 진먼 포격전 62주년을 맞아 차이잉원 총통은 대만 공군 1호기를 타고 진먼섬을 방문, 진먼 충렬사 등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특히 이번 행사에 대만 주재 미국대사관 격인 미국재대만협회(AIT)의 윌리엄 브렌트 크리스턴슨 타이베이 사무처 처장이 처음 동행했습니다.
역시 양국관계가 흔들리지 않는 동맹관계임을 중국에 과시했습니다.
진먼현은 중국 푸젠(福建)성과 불과 1.8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대만의 최전방 도서로 한국의 백령도 같은 섬입니다.
이번 행사가 열린 곳은 대만 내정부 산하의 20개 충렬사의 한 곳으로, 지난 1958년 진먼 포격전에서 순직한 한국의 최병우 기자 등 6명의 대만 내·외신 기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입니다. 중국은 진먼 포격전, 대만에서는 823 포격전이라 불리는 무력충돌입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국부천도이후 진먼 섬은 최전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국은 진먼 섬을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상륙을 감행했으나 큰 손실을 입고 철수합니다.
또한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함에 따라 더 이상 여력이 없었습니다.
1954년 대만은 진먼 섬 및 마주 열도에 군대를 증파하자 이에 반발해 포격전이 발발합니다. 결국 미국의 압박에 1955년에 쌍방은 포격 중지를 합의하였고, 미국은 중화민국과 방어조약을 체결합니다.
1958년 7월에 이라크 왕국에서 혁명이 발생해 왕정이 타도되자 미국과 영국은 바로 레바논과 요르단에 파병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동인민의 반침략주의 투쟁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연안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공격의 준비에 나섭니다.
명분은 중동을 지원한다는것이지만 사실은 마오쩌둥이 내부의 투쟁으로 인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중공군은 진먼 섬 근처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공격준비를 서서히 합니다.
이에 대만은 8월 15일 진먼-마쭈 지구에 전투준비를 명령했고 증원군을 보낼 준비까지 했습니다. 이어 중국은 "곧 진먼 섬을 해방할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1958년 8월 23일 6시30분 중공군은 459문의 대포를 이용해 진먼 섬에 대규모 포격을 개시합니다.
전투개시 2시간만에 4만발, 하루 만에 5만 7천발의 포탄이 사용되었습니다.
공격목표는 중앙지휘소, 관측소, 교통기관 및 포병진지로 중화민국측은 약 440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당시 대만은 진먼 섬 방위사령부의 부사령이던 지씽웬(吉星文), 자오지아시앙(趙家驤),장제(章傑)가 사망하고 참모장 리우밍쿠이(劉明奎)와 진먼을 시찰중이던 중화민국 국방부장인 유다웨이(兪大維)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포격의 타격지점,시간대 등 너무 미스터리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날 중화민국 국방장관인 유다웨이 부장이 방문중이였고, 미국측 고문단중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기로 했기에 저녁에는 환송연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6시15분쯤 유다웨이 부장은 밖에 잠깐 나왔고 3명의 지휘관이 찾아와 저녁에 환송연에 참석할것인가 등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6시30분 중공군의 기습적인 포격으로 3명의 부지휘관은 현장에서 모두 사망하고 유다웨이 부장은 운이 좋아 부상만 입었습니다.
중공군이 어떻게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포격을 개시할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중공군 지휘관이였던 예페이 회고록에는 모든 명령은 마오쩌둥이 직접 내렸다고 합니다.
중공군은 진먼섬의 공격을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했어요. 그들은 포격전을 앞두고 체포한 3명의 대만간첩을 통해서 진먼섬 지휘부의 위치, 지하벙커의 출입구, 그리고 대략적인 주둔군의 활동 시간대등을 파악합니다.
진먼섬의 지휘부는 태무산에 막혀 중국대륙과 3면을 맞대고 있지만 볼수 없는 사각지대였습니다. 중공군은 샤먼의 가장 높은 윈딩암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간첩들로부터 얻은 자료를 기반으로 진먼섬 지휘부의 방향, 위치등을 파악해 포격전략을 계산하죠. 그리고 푸젠에서 비슷한 지형을 찾아 2일간 포격훈련을 진행합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실전에 근사한 데이터를 확보한 중공군은 만단의 준비를 마치고 마오쩌둥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일 6시20분 마오쩌둥은 포격명령을 내리고 약 10분뒤 작전명 “태풍”으로 명명된 1차 포격이 시작된것이죠.
약 5분뒤 진먼 방어군도 즉각 중공군의 대포진지를 응사하며 격력히 저항했습니다.
미국의 조셉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즉각 <진먼지구를 빼앗는 것은 평화에 대한 위협이다>라고 비난합니다.
중화민국은 2차대전의 공로를 힘입어 유엔상임이사국이였습니다.
유엔은 다수 찬성으로 중공군의 도발행위를 침략이라고 비난했습니다.
23,24일 중공군은 기습적인 도발로 엄청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진먼봉쇄작전의 대항수단으로서 미국정부는 제 7함대를 대만해협 주변으로 파견하여 대만에 대한 물자보급을 지원하는 동시에 공군, 해병대, 육군의 3군에 의한 공동연습을 실시하여 중공측에 강력한 경고를 합니다.
또한 록히드 F-104A 전투기 등을 급파해 작전지휘센터를 설립하는 전면적인 지원정책을 펼칩니다. 8월25일 이후 대만군은 진먼에 대한 해상보급을 위해 야간작전에 돌입합니다.
중공군도 수뢰정등을 동원하여 보급저지를 합니다.
8월24일,8월27일,9월2일,9월19일 대만해군은 중공군과의 대결을 통해 보급로 확보에 성공합니다.
9월 1일에 마공(馬公)에서 출항한 대만의 보급함이 다음날 라오루오만에서 인민해방군 함정과 조우해 92해전(九二海戦)이라 칭하는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대만군측은 <인민해방군 해군의 격침 수십척>이라 발표했고 중공군은 충돌로 인해 2척만 침몰하고 보급함 투오장(沱江)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라고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사실 대만군의 완승이였습니다.
중공군은 항만과 공항에 대한 공격을 이어나가면서 진먼의 봉쇄를 시도했지만 대만군의 강력한 반격에 의해 실패합니다.
개전당시 미국은 진먼 및 마주제도가 중화민국간의 상호방위조약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진먼의 폐기를 요구했지만 장제스(蒋介石)총통은 이 요구를 거절합니다.
더우기 중화민국군이 전투에서 우위에 서면서 미국은 사태의 해결을 위해 제 3국을 통해 진먼방위를 위해 전술핵무기의 사용을 언급합니다.
해전의 승리는 진먼섬으로 물자보급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원한 8인치 유탄포까지 운반하는데 성공합니다. 9월 26일 이후 대만은 완전히 우세를 장악하면서 중공의 연안 아모이등 포병진지를 공격하고 큰 피해를 입힙니다.
공중전에서도 대만군은 완승을 합니다.
9월 24일 중공측은 100여 기의 J-5 전투기를 출격시켰습니다. 대만측도 32기의 F-86 전투기를 날려 대응했습니다.
중국은 전투기의 성능이 우위에 있었고 수적으로도 앞섰기에 자신만만했죠. 하지만 대만의 F-86은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은 AIM-9 공대공 미사일을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공중전에서 중국은 17기의 J-5를 포함해 20여 기가 격추됐습니다. 반면 대만은 3기만 상실한 일방적인 대승을 거두죠.
양측은 총 12차례 공준전투에서 대만 공군은 중공군 전투기 총 31기를 격추시킵니다.
제공권까지 장악한 대만군은 전략물자를 진먼섬에 공중투하를 하기 시작합니다.
점차 수세에 몰리고 실력으로 승리하기 어려움을 인지한 중공측은 10월 5일에 국방부장이던 펑더화이(彭徳懐)가 인도적인 견해로 포격을 7일간 중지한다라며 일방적으로 발표합니다.
이후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중지를 발표하며 28일부터는 격일공격의 방침을 발표합니다.
중국군과 대만군은 희한한 전투를 이어가는데 중공군이 짝수 날에 진먼 섬을 향해 포탄을 쏘았고, 대만군은 홀수 날에 샤먼을 향해 포탄을 쏘았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적지가 아닌 바다를 향해 쏘았죠.
이렇게 포격놀이는 1979년에 미중국교수립때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두 달간 격전의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대만에서만 군인과 민간인 618명이 죽고 2600여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진먼 섬 및 주변 17개 섬에 떨어진 포탄은 47만발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대만은 진먼 섬을 불침의 기지로 만들었죠.
1958년부터 진먼 섬 곳곳에 지하갱도를 건설했고 지하갱도는 군항, 비행장, 병기저장고 등 군사시설부터 주민 4만여명이 동시에 생활할 수 있는 거주지까지 두었다. 그 중 자이산(翟山)갱도는 군항이었습니다.
10만이나 되는 병력이 진먼 섬에 주둔하게 됩니다. 전쟁터가 되다보니 주민들은 어업도 할수 없었죠.
대만정부는 진먼에서만 유통되는 화폐를 발행해 장병들에게 월급으로 지급했습니다. 주민들은 군인을 상대로 장사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런 특수한 환경속에서 진먼 섬만 특산품이 있습니다.
육군의 지하갱도에서 숙성되는 진먼고량주의 원주, 포격전으로 곳곳에 박힌 포탄 중 일부를 수거해 만든 포탄 칼입니다.
오랜시간 진먼 포격전 역시 마오쩌둥의 배포로 크게 양보한 것으로 선전해왔습니다. 사실 포격전 전야에 예페이를 불러 포격계획을 듣고 미국고문이 사망하면 안되니 피할수 없냐고 두 번이나 물었다고 합니다.
고작 4km거리의 진먼 섬 포격전에서 사실상 중공의 완패였죠. 물론 대만은 미국의 배후 지원이 있었죠. 당시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중동에서 6함대의 일부병력을 대만해협으로 배치시켰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고 자부하는 중공군이지만 그 보다 더 넓은 대만해협을 건너 대만을 3일만에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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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진먼섬 포격전에서 대만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을거에요. 사실 대만에서 중공군보다 무서운건 마잉주 같은 국민당의 친공세력이겠습니다.
[출처] 전쟁사 | 2차 대만해협위기 | 진먼포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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