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군행진곡》의 탄생과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
1933년 8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가 중국 공산당 소탕을 위해 5차 공격을 개시했다. 장제스는 공산당 근거지인 소비에트 지역에 ‘철의 포위망’을 치고 경제 봉쇄에 들어갔다. 소비에트 지역은 곧바로 식량과 의료품, 소금 부족에 시달렸다. 곳곳에서 공산당이 패배하며 전선이 무너졌다. 결국 1934년 10월 홍군(紅軍·중국 공산당군)의 주력 10만 군대는 장시성 루이진을 떠나 기나긴 탈출을 시작했다. 대장정(大長征)의 시작이다.
홍군은 험준한 산악지대와 거대한 강, 해발 4000m가 넘는 대설산 등을 넘어 1935년 10월 산시성 옌안(延安)에 도착했다. 11개 성과 18개 산맥, 24개 강을 건너며 1년간 1만2500㎞를 행군했다. 주력부대인 제1방면군은 10만명으로 장정을 시작했으나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는 8000여명에 불과했다. 궤멸 직전이던 중국 공산당은 옌안을 최후 보루로 삼아 국민당 공세를 막아내고 항일 전쟁을 치렀다. 이후 옌안은 중국 공산당의 성지가 됐다.
1933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간 정율성은 1937년 바이올린 하나를 어깨에 메고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인 연안으로 향했다. 정율성이 연안에 새로운 둥지를 큰 시기는 1937년 10월로 일본 침략이 최고조에 이른 무렵으로 무력충돌이 극대화하던 시기였다 항일(抗日)의 성지 연안에 당도한 정율성은 곧 루쉰문예학원에 입학해 체계적 음악교육을 받고 졸업 후, 이곳 교수로 근무하면서 1938년에는 중국인의 아리랑이라 일컫는 '연안송'(延安頌)을 창작했다.
1939년 1월 10일 정률성은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조직의 교양과 동지들의 배려아래, 정률성은 들끓는 항일활동속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 꾸준히 모색하고 탐구하는 과정에, 음악창작에서도 생기발랄한 왕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의 음악교원으로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온 학생들에게 《연안송》등 애국가요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의 노래소리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믿음을 안겨 주었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탁월한 작사자 두 명을 만나는데 ‘중국인민해방군군가’(팔로군대합창)의 작사자인 궁무(公木)와 ‘연안송’(延安頌)의 작사자인 女性 시인 모예(莫耶)이다. 특히 궁무는 정율성과 아주 가까웠고 다수의 곡을 함께 탄생시킨다.
정율성은 셴싱하이가 작곡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에 자극을 받아 궁무와 의기투합하여 ‘팔로군행진곡’ 창작에 전력을 다한다.
황하대합창은 중일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노래이며 이 노래는 중화민족의 생명의 강, 어머니 강으로 불리는 황하의 거세찬 흐름을 빌려서 항일 전쟁에 나선 중화민족의 민족존엄과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구가하고 있다.
황하대합창은 총 여덟 곡으로 이루어진 낭송과 합창 형식을 띤 노래이다.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장광녠(張光年)의 시에 작곡가 셴싱하이(?星海)가 곡을 붙였다. 원래는 낭송을 위한 시였으며 가락이 붙은 때는 1939년이다.
중국인들은 황하(黃河)를 ‘모친하(母親河·생명을 주고 키워준 어머니의 강)’라고 부른다. 티베트 칭장고원에서 5464㎞를 달려 발해로 흘러가는 이 강은 중국인의 삶 그 자체였다. 황하가 중국 문화의 여러 장르에서 상징적인 주제로 쓰이고 있는 까닭이다.
1939년 5월, 정율성은 연안 남문밖 서산요에 있는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의 한 땅굴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시인 공목과 시인 궁무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의 노랫말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던 공무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녹인 노랫말을 정율성에게 건네준다. 정율성은 같은해 8월에 오늘날의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불리는 '팔로군(八路軍)행진곡' 등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八路軍大合唱) ’ 등 불후의 대작을 쏟아냈다
궁무가 쓴 노랫말은 팔로군대합창은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 등 모두 8수로 형성되었다.
【革命歷史表演唱】八路軍軍歌 Anthem of the Eighth Route Army (1963) | ⦇EN CC⦈
https://www.youtube.com/watch?v=sgN-X9lO3DQ
《八路军大合唱》中的一首进行曲。公木作词、郑律成谱曲,作于1939年秋。
1939년 겨울, 정율성의 몸과 혼이 불살라진 ‘팔로군대합창’은 로쉰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소책자로 책으로 엮어져 연안 전체와 전군(全軍), 전후방(前後方) 할 것 없이 배포돼 울려퍼졌다. 1940년 초에는 정율성의 지휘 아래 ‘팔로군대합창’의 첫 공연이 연안에서 열렸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조국의 대지 위에 / 민족의 희망을 안은 / 우리 힘을 막을 자 그 누구냐? (중략) 자유의 기치 높이 날리자 / 아, 나팔소리 울린다. /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 (중략) 앞으로, 앞으로 우리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 밖으로!
오늘날 중국 국가(國歌)인 '의용군 행진곡' 다음으로 널리 연주되는 ‘인민해방군가’는 300만 중국군이 조석(朝夕)으로 애창할 뿐만 아니라 주요 국가행사 때 빠짐없이 연주되는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바로 팔로군 행진곡'이다. 이 노래는 1945년 10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8년 7월 25일에 등소평이 공식적으로 ‘중국인민해방군가’로 확정한다.
바야흐로 연안은 혁명의 심장부가 되고 있었다. 당시 연안은 중국 공산당 혁명의 근거지로 거대한 병영(兵營)이었고 작열하는 용광로였다. 정율성은 이곳에서 팔로군 군인으로 소속돼 생활하면서 뜨거운 혁명의 열기를 음악의 선율로 담아낸다.
연안 이곳에는 병력이 모이기만 하면 노래로 행사를 시작했다. 당시 연안은 서북의 작은 산성(山城)이었지만 노랫소리로 가득찬 ‘음악의 도시’였으며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 이곳에서 부르면 저곳에서 따라 부르고 수만 명이 합창을 하면 연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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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중일전쟁이 폭발한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홍군(紅軍)'의 일부가 팔로군(八路軍)으로 편입되었다. 팔로군은 일본군이라는 시대사적 산물과 접전하면서 장개석의 추적과 탄알을 피해 장장 2만5천리 대장정의 신화를 일구어냈다.
[Modern] Anthem of the Eighth Route Army [八路軍軍歌] | WWII Chinese song
https://www.youtube.com/watch?v=KcamlT5kKIk
《八路軍大合唱》中的一首進行曲。公木作詞、鄭律成譜曲,作於1939年秋。
팔로군(정식 명칭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국민당에 의해 궤멸 직전이던 중국 공산당이 일본과의 항전을 명분으로 성사시킨 제2차 국공합작(1936년-1945년 사이에 있었던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연합 전선)의 소산이었다.
1937년 국민당 정부가 국공합작(國共合作)을 받아들이자 중국공산당은 홍군을 팔로군과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해 각각 화북(華北)과 화중(華中) 지역에 투입했다. 중국공산당으로선 전화위복이자 원기회복의 절호 기회였던 셈이다.
그런데 팔로군이 중국공산당의 정예부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눈부신 활약이 컸다. 실제적으로 일본군에게 대타격을 입힌 것은 팔로군의 한 지대인 ‘조선의용군’의 무장저항이다. 팔로군의 통일전선 파트너였던 조선의용대는 대일 전선에서 스파이와 배후교란 등 매우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맡았다.
심지어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태향산 십자령(十字?) 전투에선 팔로군 사령부를 구해내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20개 사단 40만 명과 전차, 비행기까지 총력 동원하여 팔로군에 대한 대대적 섬멸작전을 펼쳤다. 특히 팔로군 사령부는 십자령에서 일본군 2만 명에 포위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 포위망을 단 30명의 조선의용대가 뚫어낸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그 후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다가 1944년 일본군이 물러나자 연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들 중 일부는 한반도로 돌아왔으나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숙청당하고,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매도돼 극심한 고초를 겪는다.
'팔로군대합창'은 건조한 산야에 불붙듯 삽시간에 퍼지면서 모든 중국인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진바, 1988년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군가로 공인받는다. 정율성이 2만5천리 홍군의 대장정을 직접 답사한 뒤 그 감흥을 바탕으로 '팔로군 대합창'의 위대한 탄생이라는 불멸의 대위업 기적을 펼친 것이다.
八路军军歌
https://www.youtube.com/watch?v=hu8FcnT084s
1949년 동북(東北)과 화북(華北) 지역에서 국민당 군대를 연파한 인민해방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베이징(北京)을 포위했다. 국민당의 주력부대가 중원(中原)과 화동(華東)지역에 발이 묶인 사이 장개석의 허를 찌른 것이다. 베이징의 국민당 군사령관 푸쭤이는 고심 끝에 인민해방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푸쭤이는 공산당 지하당원인 딸의 설득에 넘어가면서 인민해방군은 자금성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백만이 넘는 목소리가 이 노래를 합창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49년 10월 1일 천안문광장 누각에서 신중국 탄생을 선언했고, 중국 공산당은 1921년 7월 창건 이후 28년 만에 국민당을 몰아내고 대륙의 패자가 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북경 천안문 광장에 홍기가 나부끼면서 울려 퍼진 힘찬 선율이 바로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대합창)였다.
1990년 9월 22일에는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 첫 프로그램에서 인민해방군 군악대의 ‘팔로군대합창’의 힘찬 연주가 울려퍼졌다.
아울러 제1·2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서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할 때에는 정율성이 작곡한 또 하나의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이 평양 하늘에 울려퍼졌다. 중국의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극찬한다.
1942년 폐결핵을 앓고 있던 정율성은 조선의용군 ‘무정(武亭) 장군’을 따라 태항산으로 들어가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군정학교 등을 조직하는데 참여한다.
정율성은 일제가 패망한 후 해방이 되자 북한의 황해도 해주에서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에는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장을 맡았는데, 당시 정율성은 ‘조선해방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훗날 ‘조선인민군가’가 되었다. 이 곡은 지난 2006년 6월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한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했다.
北韓에서 5년,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 10여곡의 작품을 창작한 정율성은 1951년에 33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돌아가 귀화하면서 음악에 몰두하여 수많은 오페라, 항일가요, 군가, 서정가곡, 민요, 동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총 360여곡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1952년부터 북경인민예술극원으로, 이후 중앙악단에서 전문 작곡가로 활동했다.
생존자들이 회상하는 정율성은 "자유주의자였으며, 깔끔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회고한다.
郑律成 墓
혁명음악가이자 항일투사 정율성은 1976년 베이징에서 고혈압으로 사망. 북경 ‘팔보산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정율성(鄭律成)의 비문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人民은 영원하며, 율성 同志의 노래도 영원하다. 中國人民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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