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하늘(故郷の空)
작사 윤복진 작곡 박태준
노래 리기복
1927年大邱で作られたこの童謡は、1930年には既に日本に住む人達の中で歌われて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故郷を追われた幼き人達の情緒を真実に反映した歌です。
고향 하늘
노래 남성, 녀성, 혼성
1927년 대구에서 만들어진 이 동요는 1930년에는 이미 일본 거주 조선인들에게 불려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고향에서 쫓겨난 어린이들의 정서를 진실하게 반영하는 노래다.
고향 하늘(故郷の空)
1927
작사 윤복진 작곡 박태준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 하늘 그리운 하늘
언제나 고향 집이 그리울 제면
저 산 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후렴~
< 2 >
새파란 저 하늘 그 아래는
나서 자란 고향 집이 기다린다오
고향을 떠나온지 그 몇 해인가 ?
저 하늘만 바라보면 가고 싶어요.
~후렴~
< 3 >
궂은 비 내릴 때나 함박눈 올 때
고향 하늘 볼 수 없어 애를 태워요
울고 있는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박꽃 피는 고향 집을 그려 봅니다.
~후렴~
자나 깨나 잊지 못한 그리운 고향
그 언제나 다시 찾아 돌아들 가리?
▲ 작곡가 박태준(1940년, 대구 계성고보 재직시절)
◆ 박태준 (朴泰俊, 1900년 11월 22일 ~ 1986년 10월 20일) 성악가·작곡가(동요)·합창지휘자. 연세대(延世大) 음대 교수.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졸업(1921). 경상북도 대구(大邱) 출생. 호는 금호(琴湖).
1900년 11월 22일 대구 제일교회의 세례교인이자 포목상을 운영하던 박순조(朴順祚)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구 계성(啓星)학교를 거쳐 1921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찬송가를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에 접했다. 계성중학 시절 영어웅변에도 나가는 등 음악보다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숭실전문에 입학한 후부터 음악적 재능에 꽃을 피웠다. 숭실전문 재학 시절 선교사 말스배리를 만나 화성학 등을 배워 음악가의 기반을 다졌다. 같은 대구 출신으로 2년 후배인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음악부에서 중요한 몫을 다했다. 1920년 6월에 열린 평양음악회에서 그의 독창은 만장의 갈채를 받았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 "가을밤"(이태선 작사)·"꽃봉투"(윤석중 작사)·"가을"(박목월 작사)·"꼬부랑둔덕"(서덕출 작사)·"고기잡이 할아버지"(윤석중 작사)·"골목길"(김영일 작사)·"꽃밭"(장효섭 작사)·"나비와 잠자리"(윤석중 작사)·"내 방패 연"(윤석중 작사)·"눈꽃"(김영일 작사)·"눈이 오는 밤"(홍은순 작사)·"물새"(윤석중 작사)·"우리나라 기"(윤석중 작사) 이상 13편을 작곡하였다. 1922년 이은상의 시 4편을 가사로 가곡 "미풍" ·"동무생각"(일명 사우)·"님과 함께"·"소낙비" 및 1927년 자작시를 가사로 한 가곡 "금주가"는 초기 가곡작품이다. 1924년 "오빠생각"(최순애 작사)·"오뚜기"(윤석중 작사)·"맴맴"(윤석중 작사)을 작곡하였다.
1929년 박태준의 동요곡집 『중중 때때중』이 발간됐다. 빅타음반에 "오빠생각"·"사우"·"오뚝이"·"맴맴"이 취입됐다. 1931년 5월 두 번째 창작동요집 『양양 범벅궁』을 출간하였다. 숭실전문 재학시절 이미 "물새"를 비롯한 13곡의 동요를 작곡했다. 1921년 졸업하자 이듬해 마산(馬山)의 창신학교의 교사생활을 하면서 1922년 "동무생각"·"미풍"·"님과 함께"·"소낙비" 등 네 곡의 예술가곡을 작곡하였다. 1924년 대구 계성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이 시기에 동요 "오빠 생각"·"맴맴," 가곡 "동무 생각"(일명 사우) 등을 작곡했다.
1929년부터 일본빅타축음기주식회사가 발매하기 시작한 조선음반에는 그의 "오빠생각"·"사우"·"맴맴" 등이 취입되었다. 1929년 출간된 『중중때때중』은 박태준의 동요집이다. 이 동요집에는 "가을밤"·"꽃봉투"·"가을"·"꼬부랑 둔덕"·"고기잡이 할아버지"·"골목길"·"꽃밭"·"나비와 잠자리"·"내 방패연"·"눈꽃"·"눈이 오는밤"·"물새"·"우리나라 기," 이상 열세 동요가 수록되었다. 1931년 동요곡집 『양양 범벅궁』을 발간했다.
1932년 도미(渡美)해 터스칼럼(Tusculum)대학에 입학했으나 작곡과가 없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음대로 옮겨 교회음악과 작곡을 전공해 음악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임생각"을 비롯한 몇 편의 가곡을 작곡했고, 해방 전까지 무려 70여 편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1936년 귀국해 숭실전문 교수로 부임했고, 1938년까지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1938년 고향 대구로 내려가 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개최를 갖는 한편 다시 계성학교의 교사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의 동요곡집 『중중 때때중』(1929)과 『양양 범벅궁』(1931)을 출간한 후, 1939년 6월 8~9일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全朝鮮作曲發表大音樂祭) 때 "산울림"·"호박타령"·"아 가을인가" 및 합창곡 "평화"·"부활"(復活)을 발표했다. 동요곡집 『물새발자욱』을 출간하였다. 윤복진이 작요(作謠)하고 그가 작곡한 "기러기"의 오선보는 『어린이』(1930) 8권 7호에 발표되었다.
『三千里』(1932) 4권 2호에 소개된 박태준의 약력은 같은 숭실전문학교 출신 양악인 현제명·차재일의 것과 함께 약술(略述)됐다. 그가 작곡한 "부끄러움"·"고향 하늘"이 김영길독창회에서 공연됐다는 소식은 『博文』(1939) 6호의 음악실에 소개됐다. 그는 조선일보사 주최 제4회 음악콩쿠르 성악부 심사위원으로 『朝光』(1939) 43호의 광고에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 그가 작곡한 "순례자"(巡禮者)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하고, 그가 작곡한 "옵바(오빠)생각"·"오뚝이"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1939년 가곡집 『물새 발자욱』을 발간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설하여 1973년까지 이끌었다. 1947년 30곡을 실은 『박태준 동요곡집』을 발간했다. 1946년 경성여의전(京城女醫專) 교수를 거쳐 1948년 연세대로 옮겨 1974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있었다. 1952년 미국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55년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창설했다. 1957년 12월 17일 연세대음악회가 시공관에서 열렸을 때 출연했고, 1964년 음악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초대학장이 되었다. 1960년부터 1968년까지 한국음악협회(韓國音樂協會) 이사장, 예술원(藝術院)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예술원회원과 연세대 교수를 지냈으며, 1969년 제1회 서울음악제 때 가곡 "연못가에서"·"너는 돋는 해"·"아침해"·"바다는"을 발표하였다. 1971년 제3회 서울음악제 때 가곡 "집 생각"을 출품했다. 1972년 12월 11일 오라토리오합창단 창립27주년기념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11월 21일 한국성가작곡가협회의 제5회 한국신작성가작곡발표회 때 출품하였다. 제6회 서울시 음악문화상(1957)·제6회 예술원 음악공로상(1960)·대통령상 문화훈장(1962)·국민훈장 무궁화장(1970)을 받았고, 1982년 MBC에서 제정한 제2회 가곡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제7회 월남상(月南賞)을 수상했고, 1984년 한국아동음악 공로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 가곡 "미풍"(1922)·"집생각"(1970), 동요 "가을밤"(1920), 성가 "부활"(1935) 등이 있다. 현재도 애창되는 창작동요는 "가을밤"(윤복진 작사)·"고향하늘"(윤복진 작사)·"누나야 보슬보슬 봄비 내린다"(윤복진 작사)·"등대"(윤복진 작사)·"말 탄 놈도 꺼떡 소 탄 놈도 꺼떡"(윤복진 작사)·"스무하루 밤"(윤복진 작사)·"오빠 생각"(최순애 작사)·"종달새"(윤복진 작사)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겨레음악인 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 38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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