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유천 비파강(동창천) ,멀리 청도의 문필봉이 보인다.
사뭇 삼엄한 여류시조시인의 介潔한 詩風, 詩情이 ~
글공부가 높고 재능이나 재주가 빼어나고 또 미모·인품 등이 뛰어난 젊은 여자를 규수(閨秀)라고 이른다.
규방에서 시와 글씨와 그림을 익혀 이름을 남긴 신사임당이 있고, 허 난설헌 , 황진이. 이옥봉. 매창같은 규수시인들이 밤을 낮삼아 짜낸 사랑의 시들은 우리 문학사에 넘실대는 강이 되고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 ~ 1589년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황진이의 맥을 이을 여류시인을 기다리던 조선시단에,
우리나라 100년 시조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여류시조시인,
정운 이영도(丁芸 李永道 :1916~1976)가 조선 여인의 정갈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나타났으니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누이동생이다.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정운(丁芸). 할아버지는 이규현(李圭峴)이고, 아버지는 선산 군수 이종수(李鐘洙)이며, 어머니는 구봉래(具鳳來)이다. 오빠는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이다. 딸은 박진아이다.
이호우, 이영도 남매시인의 생가
이영도(李永道)[1916~1976]는 1916년 10월 22일 경상북도 청도군 대성면 내호동 259번지[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59-24]에서 한학하는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지방군수로 밖을 나돌 때 할아버지의 엄한 훈도아래 자라났다.
밀양보통학교[현 밀양초등학교]를 거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자고등학교] 졸업전인 1935년 대구시 인교동의 부호(박기주)와 결혼하여 1937년 10월 10일 외동딸 동지(진아로 개명)를 낳고, 결혼 9년만인 1945년 8월 10일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결핵으로 잃었다.
이후 그녀는 시를 쓰며 어미의 길을 지켰고, 작품을 통해 세상을 향한 흉금을 털어놓는다.
단란(團欒)
스물여덟에 청상[靑孀]이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당대의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단란〉에서는 어린 딸과 단 둘이 사는 처소에 어두운 밤이 내려 등잔불 밝히고 아이는 글을 읽고 정운은 수를 놓는 모습이 보인다. 청상의 슬픔과 외로움이 방 한켠에 드리워져 있지만 등잔불빛같이 번지는 모녀의 곱고 따스한 정, 단란(團欒) 을 느끼게 한다. 이 시 한편이 청상의 아름다운 시인을 향한 뭇사람들의 연민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삶과 글이 다르지 않은 孤高하고 介潔한 삶의 향기 남겨
초등학교 졸업장의 그녀가 중등학교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총명한 데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가정교육을 받으며 할아버지(이규현)가 지역 인재 발굴을 위해 세운 의명학당에서 공부하면서 쌓은 내공에 발군의 자수 실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호리 앞 비파강 물소리를 들으며 자란 이영도는 결혼후 불어닥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시조에 목숨을 기대고 꼿꼿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살다간 향기로운 여류시조시인이다.
첫 시조집 ‘청저집’ 책머리에서 이영도는
“따로 하늘 창창한 그리움이 있어 황홀한 무지개를 엮어 가다가도 그냥 자꾸 서럽기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저의 성품인가 봅니다. 이 분하고 슬픈 동경이 무슨 증세처럼 알려질 때 이 시조를 써온 것이니 하잘것없는 노래쪽인들 그대로 호젓한 생애의 반려요 의지였습니다”
“이들을 내보낸다는 것은 제 안에 숨 쉬는 온갖 애환을 일일이 들추어 남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라고 적고 있다.
이영도에게 시는 생명줄이자, 의지처요 삶의 기둥이었다.
목화솜을 잣는 물레 소리와 타작마당의 도리깨꼭지에서 시조의 가락을 익히고, 몰래 숨어서 문학 책을 탐독하였다. 혼인한 뒤에도 불빛을 가린 채 팔목이 시도록 책을 읽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시에 담았고, 평생 마음속에 간직한 소중한 인연을 시에 담아냈던 것이다.
1945년 12월 이윤수(李潤守)가 이끄는 대구의 시조 동인지 『죽순』에 「제야(除夜)」, 「바위」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영도는 뜨겁고도 매운 여류시조의 한 폭을 그려내며 본격적인 시조 창작에 나섰다. 이영도가 문학가가 된 것은 시조 시인인 오빠 이호우의 영향이 컸다.
1945년 대구여자보통학교[현 대구서부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5년제)로 옮겨 1953년 5월까지 가사교사로 근무하였다. 작곡가 윤이상(尹伊桑)과 시인 유치환(柳致環)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였다.
정운이 부임하자 통영의 멋스러운 남정네들은 자못 긴장하기 시작한다.
박재삼시인은 "정운을 만날때는 내 몸에서 먼지라도 떨어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한복을 즐겨 입던 정운은 여고 가사선생님으로 지나치리만큼 깔끔했고 무엇 하나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조각보나 그릇받침 같은 것도 손수 만들어 썼다고 한다.
고운 얼굴에 티없는 옥처럼 깍고 다듬는 옷매무새까지 갖췄으니 길을 가는 이들인들 어찌 눈을 뺏기지 않았으랴
이 시기에 폐침윤에 걸려 마산결핵요양원에서 휴양하였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953년 5월부터 1954년 10월까지 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때 거주하던 집에 수연정이라는 당호(堂號)를 붙였다.
1954년 10월 폐침윤이 재발하여 휴양을 겸하여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로 옮겨 1956년 9월까지 근무하였다. 이때의 당호는 계명암이었다.
1956년 9월 부산여자대학 강사가 되어 1959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이영도는 동래 온천장 부근으로 거처를 옮겨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으로 지었다. 이 시기에 가장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64년 5월부터 1967년 10월까지 부산어린이집 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시조 동아리인 꽃무리회를 이끌며 「꽃무리회가」를 지었고, ‘달무리회’를 만들어 회원들과 함께 시조를 가꾸었다.
서울로 이사한 뒤에도 부산에서의 인연이 이어져 박옥금, 이채란, 조규근 등이 문단에 진출하도록 도왔으며 박시교, 김현, 이우걸, 임종찬, 박영교, 권도중, 김영재[이상 남자], 김남환, 전연욱, 정표년[이상 여자] 등을 지도하여 문단에 데뷔시켰다.
이영도에게서 시조를 배운 제자들이 현대율동인회를 조직하여 동인지 『현대율』을 2호까지 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1970], 한국여류문인협회 부회장[1974],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1975]을 지냈으며 제1회 대통령 출제 민족 시[시조] 전국 백일장 대회 심사 위원장[1975]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 무렵 중앙대학교 문예 창작학과[1974. 3~1976. 3] 강사도 하였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청마가 향년 59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자, 1967년 부산을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긴 정운은, 20여년 모아둔 5000여 청마의 시편 중에서 200여 수를 담아, 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 )를 출간.
시집이 출간되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 닥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무명의 중앙 출판출사는 유명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