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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의 시인 -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

Jimie 2021. 9. 23. 15:35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은 ‘깃발’의 시인이다.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 나르는 한문 투성이의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든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있다. 그의 목소리는 남성적이며, 높고 준열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야 흔드는 /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표(標)ㅅ대 끝에 /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국정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널리 알려진 시 「기(旗)빨」이다. 이 ‘깃발’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하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이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은 생명의 원형(原型)’이었을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중앙 문단과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외롭게 시를 쓰던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불멸의 에피그램을 남긴다.

준열한 삶의 의지를 노래하는 한편, 사랑에 관한 불멸의 에피그램을 남긴 청마 유치환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군 태평동에서 한의(漢醫)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극작가인 유치진은 그의 형이다. 그의 아버지는 본디 거제 사람이지만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익힌다. 어릴 적에 그는 말이 통 없었다고 한다. 유치환은 심지어 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 없이 조용한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간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의 일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같은 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내향성은 중학교 시절에 더욱 심해진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기보다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뭘 쓰는 일에 열중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듬해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는데, 당시 유치환은 무고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학살되는 것을 목격한다. 이 무렵 그는 주일 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거의 날마다 신문을 보낸다. 유치환은 그의 아내가 되는 권재순(權在順)을 이렇게 만난다. 도요야마중학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해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동래고보를 나온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지만 학교의 경직된 분위기에 회의를 느끼고 중퇴한다. 정지용의 시를 좋아하던 유치환은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여러 신문의 학생란에 시를 투고하고 1929년에는 고향에서 『생리(生理)』라는 동인지를 내는 등 오랫동안 문학 수업을 쌓는다.

또다른 생명파 시인 유치환의 육필

 

1928년 유치환은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당시에는 보기 어렵던 신식 결혼식을 올린다. 이 결혼식 때 신랑 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아이 중의 하나가 뒷날 시인이 되는 김춘수다. 이윽고 유치환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시인들과 정지용의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다. 그는 이 무렵 통영에서 또래의 문학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한다. 1931년 그는 『문예월간』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이후 사진 기술을 배우거나 백화점 직원 또는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틈틈이 시를 쓰는 생활이 이어진다.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한 아내의 설득에 못 이겨 한때 유치환은 평양으로 가서 사진관을 차린다.

 

그러나 경영이 여의치 않자 곧 사진관을 걷어치우고 시작에 매달린다. 아내는 평양의 신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1934년 유치환은 직장을 구해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1935년 『신동아』에 「도시 시초(都市詩抄)」 5편(‘빌딩’ · ‘가로수’ · ‘구세군’ · ‘자동차’ · ‘비렁뱅이’) 등을 발표한 그는 1936년 『조선문단』에 시 「깃발」을 내놓게 된다. 애수에 싸인 채 유토피아적 세계를 희구하는 강렬한 생명의 의지를 노래한 「깃발」로 유치환은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또는 인생파의 중추로 떠오른다. 이로써 시인 유치환의 입지가 확보되는데, 이 무렵 그는 부산의 화신연쇄점 직원으로 일한다. 그는 첫 시집 『청마 시초(靑馬詩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사실 나는 해방 이전에는 문단적 교유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미염(米鹽)을 벌이하던 화신(和信) 관계로 부산에서 조벽암(趙碧岩)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소운(素雲), 지용(芝溶), 이상(李箱) 제씨가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 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해방 후에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김소운의 주선으로 나오게 된 유치환의 첫 시집 〈청마 시초〉

 

어느 날 김소운은 충청도 서천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는다. 김소운은 화신연쇄점에 있던 유치환을 불러낸다. 다방에서 유치환과 마주앉은 김소운은 전보를 내민다. 전보를 본 유치환은 얼마면 되느냐고 묻는다. 수중에 돈이 있느냐고 묻자 유치환은 저는 가진 게 없으나 아내에게 부탁해보겠다고 한다. 유치원 보모로 나가던 권재순의 월급이 40원이던 시절이다. 유치환은 곧 20원을 구해 김소운의 손에 쥐어준다.

 

1937년 그는 고향의 협성학교에 자리를 얻어 통영으로 간다. 유치환이 그 동안 쓴 「깃발」과 「일월」 등을 묶어 첫 시집 『청마 시초』를 펴낸 것은 1939년의 일이다. 이 시집은 김소운의 주선으로 화가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출판사 ‘청색지사(靑色紙社)’에서 나온다. 청색지사는 시집 『청마 시초』의 본문 용지로 파지를 이용한다.

 

1940년 봄, 유치환은 가족을 이끌고 만주 옌서우현(煙首縣)으로 가서 산다. 해방 직전 귀국한 그는 1946년 고향의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있던 중 한국문학가협회가 주는 제1회 ‘시인상’을 받는다. 1947년 그는 「바위」 · 「광야에 살리라」 등이 수록된 시집 『생명의 서』를 펴낸다. 이어 1948년에는 『울릉도』, 1949년에는 『청령 일기』를 발간, 3년 연속으로 시집을 내는 기록을 남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유치환은 문총구국대의 일원으로 종군하고, 1951년에는 이 때의 체험을 담은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발간한다. 이어 1953년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을 펴내고, 1954년에는 『청마 시집』을 내놓는다.

  • 1〈바위〉 · 〈광야에 살리라〉 등이 수록된 〈생명의 서〉
  • 1949년에 나온 〈청령 일기〉

전쟁 뒤 그는 1955년부터 10여 년 동안 다시 교육계에 몸을 담아 안의중학교, 경주중 · 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등을 거친다. 아울러 한국시인협회의 협회장으로 있으면서 1957년 『제9시집』, 1958년 『유치환 시선』, 1960년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1964년 『미류나무와 남풍』, 1965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 많은 시집을 발간한다. 시뿐 아니라 1958년 『자유공론』에 소설 「시위하는 악마」를 선보이고, 1959년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내놓는 등 유치환은 문학의 여러 부문에서 끊임없이 창작욕을 불태운다.

 

만주 옌서우현에서 농장 관리인으로 일하던 유치환은 1945년 6월 갑자기 귀국길에 오른다. 그가 북만주 언 땅에 외아들을 묻고 귀향한 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었다. 꿈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한다며 남편을 채근한 것이다. 유치환이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일제 강점기는 막을 내린다. 당시 문학 청년이던 김춘수는 친구와 함께 고향의 시인을 찾아간다. 점심때였는데, 시인은 ‘유(柳)약국집’ 마루에 혼자 앉아 파쌈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켜고는 파쌈을 고추장에 찍어 입 안에 욱여넣는 청마······. 결벽증이 있던 문학 청년의 눈에 청마의 모습은 너무 ‘세속적’으로 비쳐 실망감이 컸다. 그러나 김춘수는 이런 느낌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는다. 김춘수가 유치환을 만나고 돌아간 뒤 이내 ‘통영문화협회(統營文化協會)’가 결성된다. 이 협회는 유치환이 대표를 맡고, 윤이상 · 전혁림 · 김춘수 등이 간사를 맡는다. 통영문화협회는 문맹자를 위한 한글 강습, 시민 상식 강좌, 농촌 계몽 연극 등의 활동을 펼치는 지역 문화 운동 단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유치환이 이윤수 등과 함께 『죽순(竹筍)』 동인을 꾸린 것은 1946년의 일이다. 대구 서문로에서 ‘명금당(名金堂)’이라는 시계점을 내고 있던 이윤수는 1946년 5월 1일자로 해방 이후 최초의 시 동인지인 『죽순』 창간호가 나오자 점포 앞에 ‘죽순시인구락부’라는 간판을 내건다. 11월이 거의 저물 무렵 대구 명금당에 나타난 유치환은 동인들과 사나흘 같이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그가 시조 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죽순』 동인 활동을 통해서다.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남편을 결핵으로 잃고 혼자 살다가 그를 만나게 된다. 그 뒤 유치환은 경북대학교 문리대에 나가 얼마 동안 시론을 강의한다. 그는 향촌동에 있던 백구세탁소 2층에 세들어 사는데, 추운 겨울이면 잉크가 얼기도 하는 허술한 방을 거처로 삼는다. 이 무렵 경북대학교 의대를 나온 문학 청년 허만하는 혼자 청마를 흠모하며 시를 쓰고 있었다.

해방 뒤에 나온 최초의 시 동인지인 〈죽순〉창간호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숱한 편지를 보내고, 또 이영도를 향한 숱한 연모의 시를 쓴다. 그 사랑은 가슴속에 늪처럼 고인, 매우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쉬이 잊으리라 / 그러나 쉬이 잊히지 않으리라”. 두 사람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시인의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연정의 조각”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를 찌른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룽”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낳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 /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비귀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느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1960년 봄, 문학 청년 허만하는 대구 경북여고 언저리 육군 관사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유치환의 집을 찾는다. 자유당 정권에 의해 실직한 유치환이 신경통으로 한쪽 다리를 앓아 나들이마저 자유롭지 못하던 시기의 일이다. 햇볕이 따뜻한 마루 끝에 걸터앉은 허만하가 얘기 중간에 문득 묻는다. “선생님,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 끼라.” 유치환은 서슴없이 말한다.

 

1967년 2월 13일, 유치환은 교통 사고로 세상을 뜬다. 그날은 고등 학교 후기 입시가 있던 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유치환은 그날 학교 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난다. 그들과 어울려 술집을 몇 군데 들르나 유치환은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 사이다를 마신다. 술값을 치르고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유치환은 좌천동 앞길에서 내려 길을 건너다 시내 버스에 치여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 숨진다. 밤 9시 30분경이었다. 

 

청마는 부산 사하구 하단동의 산록에 묻혔다.

 

청마 유치환은 의도적인 기교를 몹시 싫어한 시인이다. 그는 다듬지 않은 자연스러운 시어로 인생에 내포된 사랑을 표현하고 허무와 절망의 극복을 치열하게 추구한다. 특히 유치환의 사랑은 해방 이전에는 일제에 순응하지 않는 애국 정신으로, 해방 이후에는 이성을 향한 연애 감정으로 드러난다.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사랑에 빠지곤 하는데, 그가 죽은 뒤에 나온 몇몇 얘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여자와 결혼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면서도, 해방 뒤 문학을 매개로 만난 시조 시인 이영도를 연모하는가 하면, 50대에 들어서도 역시 문학을 매개로 만난 반희정과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주로 편지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유치환 사후에 각각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와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엮여 나와 다시 한 번 세인들의 눈길을 끈다.

반희정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유치환 사후에 발간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