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에 언론중재법 있었다면 박종철 고문치사 취재 어려웠을 수도”
- 경향신문
- 입력2021.08.24 16:46최종수정2021.08.24 17:18
도종환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 시키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보도를 못 했을 가능성이 있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최초 보도한 신성호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전 중앙일보 기자)는 24일 ‘국회 논의 중인 언론중재법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어땠을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신 교수는 “1980년대 보도지침이 물리적으로 겁을 주는 것이었다면 이번 개정안은 돈으로 법적 책임을 물어 취재를 위축하는 것”이라며 “1987년에 이런 법 규정이 있어서 기자와 언론사가 거액의 손해배상 위험까지 염두에 뒀다면 진실을 밝히려는 적극적인 취재에 나서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이 입법을 강행 중인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시민사회와 언론계의 비판이 거세다. 언론개혁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해직 기자 등 원로들까지 우려를 표했다. 개정안의 핵심 조항인 징벌적 손해배상과 추상적인 고의·중과실 추정이 언론사의 권력 감시 및 견제 기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 비리 보도, 판결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권력형 비리 보도는 대개 의혹 보도로 시작한다. 언론은 수사기관과 달리 증거 확보나 관련자 조사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건의 전모를 단박에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최초 의혹 보도는 팩트의 불완전한 조각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언론의 의혹 제기가 여론의 반향을 얻어 수사·재판을 통한 사건의 실체적 규명을 ‘견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원 판결을 통해 혐의가 확정되기 전까지 의혹을 받는 당사자들은 보도 내용에 대해 ‘오보’라거나 ‘허위사실’이라고 대응하는 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최초 보도 당시 경찰은 “명백한 오보”라며 기사를 빼지 않으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했다. 추후 물고문 보도 등으로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정부는 해당 사실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알린 ‘최순실 보도’도 비슷한 경우이다. 당시 여러 언론사가 국정농단 관련 의혹 보도를 한 시점은 2016년 10월쯤부터인데 박 전 대통령이 기소된 것은 2017년 4월, 최종 판결은 올해 1월에 마무리됐다. 2016년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입수해 공개하기 전까지 청와대는 최씨의 대통령 연설문 수정 의혹에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완강히 부인했다.
이번 개정안은 ‘허위·조작보도’를 “허위의 사실 또는 사실로 오인하도록 조작한 정보”로 정의해 징벌적 손해배상 등 규정을 두었다. 전문가들은 개정안이 권력형 비리에 대한 최초 의혹 보도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권력 비리는 정말 강고하게 밀폐된 공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첫 보도는 근거가 미약한 경우도 있다”며 “한 언론사의 기사에 정정보도가 내려지면 이후 여러 언론사의 의혹제기가 모여 진실이 밝혀지는 길도 막힐 수 있다”고 했다. 신 교수는 “(권력형 비리 보도의 경우)완벽하게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증거가 사라질 우려도 있다”고 했다.
■모호한 규정들…‘전략적 봉쇄’ 더 늘 수도
개정안 제30조2의 ‘허위·조작보도에 관한 특칙’도 모호하다는 의견이 있다. 개정안은 ▲보복적·반복적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 ▲정정보도·추후보도 이후에도 인용 ▲제목·시각자료로 기사의 본질적 내용 왜곡 등 경우에 명백한 고의·중과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의혹을 받는 당사자들이 이를 근거로 “보복적이거나 반복적인 보도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남발해 보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정안은 고위공직자와 대기업 관계자는 손해배상 청구 대상에서 제외했다. 권력형 비리 보도를 틀어막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한 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고위공직자와 대기업만 대형 비리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연구부정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이 최초 제기한 의혹은 나중에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지만, 황 교수가 “보복적 보도로 인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주장했다면 후속 보도가 어려웠을 수 있다. 국정농단 의혹의 당사자인 최순실씨 역시 고위공직자가 아니었다.
명확하지 않은 열람차단 기준도 악용 소지가 있다. 개정안 제17조의2는 “언론보도가 사생활의 핵심영역이나 인격권을 계속 침해하는 경우 열람차단을 청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예를 들어 최순실씨 측이 이 조항을 근거로 딸의 승마 특혜·입시부정 의혹 보도를 문제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조항의 “제목 또는 전체적인 맥락상 본문의 주요한 내용이 진실하지 아니한 경우”도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법원은 ‘공익성’ 인정하지만…취재 위축 가능성 높아
보도의 공익성 등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법정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언론중재법 제5조는 “보도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서, 진실한 것이거나 진실하다고 믿는 데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책임을 면제한다. 김성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유명인들이 이미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지만 많이 기각당하고 있다”며 “제5조의 면책 조항 때문에 (개정안 통과 이후에도)법정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안 제30조2도 공익침해행위와 부정청탁 및 그에 준하는 공적 관심사는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에서 제외한다.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 이은주 원내수석부대표, 장혜영 의원과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회장, 방송기자연합회, 한국PD연합회 소속 회원들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강행 처리를 중단하고 사회적 합의 절차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에 대해선 법원의 판단과 별개로 소송 가능성 자체가 취재·보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신성호 교수는 “기자가 발표나 보도자료만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한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 고의성은 없다고 하더라도 과실 위험성은 상존한다”며 “징벌적 배상으로 위축까지 된다면 적극적 보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홍성철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언론중재법 개정이 선량한 사람들의 피해 구제를 위한 개정인지 권력자 자신에 대한 취재를 막기 위한 개정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를 제한한 것과 맞물려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피의사실 공표를 제한하는 대신 탐사보도를 활성화하는 것이 언론개혁 방향에 부합하는데, 개정안은 도리어 탐사보도마저 위축시킬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손지원 사단법인 오픈넷 변호사는 “(개정안이)자유롭고 신속한 의혹제기 환경을 위축시킬 수 있는데, 피의사실공표죄 문제도 있으니 진행 중인 사건의 실체에 대한 보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권력형 비리 등에 대해 사법부 판단 전까지는 보도하지 말라거나, 국가기관이 공식 확인한 내용 외에는 보도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보인다”고 했다.
조해람·강은·강한들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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