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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노란 샤쓰의 사나이'

Jimie 2021. 7. 31. 07:55

 한명숙 l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노래 l

한때 애국가보다도 많이 불리던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 발표 50년,

 

2010년 10월 20일, KBS홀

'한명숙 헌정음악회'에 부쳐...

 

60년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흐름을 바꾼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등장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주인공,

가수 한명숙의 등장은 60년대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른바 '미성(美聲)가수들의 시대'에서 '개성시대'로의 전환점이 되었고

미8군 무대가수들이 대거 일반무대로 진입하는 자극제가 된 동시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가요의 주류로 부상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이 노래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를 강타, 이른바 '한류 1호'로 평가받고 있는 동시에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에서도 널리 애창되었던, 말하자면 민간외교에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한때 애국가보다 많이 불렀던 노래로 기억되는 이 노래를 시작으로

한명숙은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 아름다운 노래로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 한명숙 스토리.

 

1. 가수 한명숙이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

 

많은 국민들이 기억할 것이다.

최근 몇 년 전 원로가수 한명숙씨(75)가 본의 아니게 정치권의 공방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것을.

진원지는 속칭 '강-부-자 내각'이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던 청문회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Y장관 후보자는 자신의 140억 재산에 대해

'연기생활 35년이면 그 정도 모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한류스타 욘사마의 예를 들어 해명한 데 대해 야당 측으로부터

"배용준은 보이고, 사글세도 제대로 못내는 가수 한명숙은 보이지 않느냐"는 공방으로 이어졌다.

 

청문회 일거수일투족이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시점에 돌출된 이 발언은 예상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때가 2008년 2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갑자기 불우한 연예인의 대명사가 된 한국의 원로가수',

그 당사자인 한명숙씨의 입장은 정작 어떠했을까...

 

"갑자기 찾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전화벨도 쉴 새 없이 울렸고...

정치권으로 부터도 많은 전화가 걸려오는 등 이러저러한 도움을 주겠다는 분들이 꽤 많았지요.

무엇보다 늘어난 건 공연요청이었죠."

 

실제로 이 무렵부터 3개월 간, 한명숙은 무려 다섯 차례나 무대에 선다.

그해 4월, 평창동 김준재즈카페에서의 소규모 콘서트 형식의 공연을 비롯해

다음날 이틀 연속 '쌍문동 재개발 경로잔치공연' 등등.

필자 또한 매 공연 현장에 함께 있었다.

 

데뷔곡이자 대표곡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끝날 때마다 특히 많은 앙코르가 쇄도했다.

한 중년은 큰절과 함께 술잔을 건네며 한때 자신이 입에 달고 다녔던 노래의 실제 주인공을 만났다는 것에 감격해 했다.

이 노래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애창곡이었다고 했다.

 

주거니 받거니 많은 일화들이 쏟아졌다.

당시 이 노래가 얼마나 유행을 했던지 한 외국인이 길가다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오자

갑자기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던 일화도 나왔다. 그 외국인은 이 노래가 대한민국의 애국가인 줄 알았다는 것.

 

한명숙 또한 몇 가지 일화를 털어놓았다.

"당시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관광 기념으로 이 음반을 사가는 경우도 많았지요.

언젠가 대만사람들이 '노란 샤쓰의 사나이'와 '빨간마후라'가 자기네 나라 노래라고 우기는 거예요.

워낙 대만에서도 응원가로 사용되는 등 널리 불리어졌으니 당연히 그렇게 여겼겠지요.

그 무렵 북한을 비롯해 공산권에서도 널리 애창되었으니 저로써는 민간외교에도 한몫했던, 그야말로 애국자가 된 기분이었죠."

 

인사 청문회로 불거진 한명숙의 어려운 생활이 화제가 될 무렵 언론에는 한 거물 정치인과 만난다, 는 뉴스도 떴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권에서 직접 찾아왔다거나 도와준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정작 도움을 준 이들은 평소 그를 따르던 후배가수들이었다.

가수 최백호씨가 원로 돕기 자선공연을 펼쳐 수익금 전체를 건넸고

또한 (사)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가 마련한 '원로가수 돕기 아름다운 콘서트'도 펼쳐졌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후배가수 최선미(최수진)씨가 TV를 본 뒤 연락, 5천 불을 보내오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실제로 찾아온 경우는 없었지요. 아마도 내 생각에는 얼마를 도와야할 지 판단이 어려워 그랬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어쨌든 위로전화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지요."

-담담한 어조로, 그리고 남을 헤아리는 평소 마음 씀씀이 그대로 필자에게 털어놓았던 말이다.

 

당시 심경을 묻는 질문에는 한사코 답변하기를 내내 망설였다.

무엇이든 숨김없이 털어놓겠다던 평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미안했던지 어느 날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때 특별히 해줄 말이 없었어요. 부끄러우니 감추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내 말을 듣고 나면 같이 속 상해할까봐서...

그저 속상한 일은 나 혼자 꾹 참으면 되지..."

 

노란샤쓰의 사나이 1961 한명숙

손석우 작사 작곡

1962년 영화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주제가

 

https://www.youtube.com/watch?v=rhCkpxj-Gns 

 

한명숙(韓明淑, 1935년 12월 1일 ~ )은 대한민국 가수 영화배우이다.

 

생애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하였고 평안남도 용강에서 성장하였으며 한국 전쟁 당시 월남하여 이후 경기도 인천에 정착하였다. 1953년 주한 미8군 무대에서 가수 첫 데뷔하였고 8년 후 1961년 허스키한 목소리로 손석우가 작곡한 <노란샤쓰 사나이>를 불러 대히트시켰다. 〈노란샤쓰 사나이〉는 동남아에도 진출하여, 대한민국의 외부에서 히트한 최초의 가요이다.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감사패, 2012년 제12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원로가수상을 받았다.

 

가족 관계

부군 故 이인성은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상사 출신이자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였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기타

노란 샤쓰 사나이는 1962년 3월 엄심호 감독의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영화 제목은 약간 바뀌었다)로 만들어지기도 하였고 한명숙이 이 영화의 단역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