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처벌받지 않는다는 신화’ 사라져야
정원수 사회부장 입력 2021-07-12 03:00수정 2021-07-12 03:02
거물급 인맥 공개 뒤 “검찰서 진술” 조사 거부
경찰, “게이트 아닌 해프닝” 피의자 논리 깨야
정원수 사회부장
“요즘도 이런 검사가 있나요?”
서울경찰청이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의 피의자 신분인 A 검사의 서울남부지검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자 검찰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경찰이 확보한 구체적 진술과 증거 등으로 압수수색영장은 반려되지 않았고, 법원에서도 그대로 발부돼 검찰 중간 간부 인사를 이틀 앞둔 지난달 23일 영장이 집행됐다. 경찰청이 1991년 옛 내무부 치안본부에서 독립한 뒤 30년 만에 경찰이 현직 검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불명예 1호 기록’을 갖게 된 A 검사는 굳이 분류하자면 엘리트 검사에 가까웠다. 반부패 수사를 담당한 경력이 있고, 부장검사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서울남부지검의 핵심 부서까지 맡았다. 인사 발표 전에는 서울중앙지검의 요직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있었다. 예상과 달리 A 검사는 부장검사에서 지방 소재 소규모 검찰청의 부부장검사로 강등 발령이 났다. 동료 검사 몇 명이 깜짝 놀라 서울남부지검에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검찰 인사를 총괄하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조차 “그 검사 경력을 보면 아주 화려하다”면서 “제가 받은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배 한 척 없던 가짜 수산업자 김모 씨(43·수감 중)의 금품 로비 의혹에 박영수 전 특별검사, 정치인 등이 연루된 과정을 보면 더 어처구니가 없다. A 검사는 국정농단 사건의 특검팀에 두 차례나 파견 근무를 했는데, 그때 인연을 맺은 박 전 특검이 ‘(A 검사가) 전보를 가는 지역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인물’로 김 씨를 A 검사에게 소개했다. 박 전 특검은 2016년 국회의원 총선거 예비후보였던 B 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변호 활동을 했는데, B 씨와 김 씨가 수감 생활을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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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특검은 B 씨, A 검사는 박 전 특검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김 씨는 정치인과 검사, 경찰 등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콕 집어 더 소개받으면서 인맥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방대 법대를 중퇴한 김 씨는 30대 초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이라고 속여 서민 36명에게 1억6000여만 원을 뜯어내던 생계형 사기꾼이었다. 그런데 2017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박 전 특검 등 ‘힘을 쓸 수 있는 배경’을 알게 되면서 ‘1000억 원대 재력가’ 행세를 했다. 돈 문제로 형사사건과 민사소송 등에 얽혀 있던 김 씨가 이들에게 고급 차량을 제공하고, 골프장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접대를 한 것을 선의로만 보기는 어렵다.
30년 동안 경찰은 검사 비위를 수사하려다 여러 번 좌절했다. 2012년 조희팔 사건 수사 때 경찰이 부장검사의 금품수수 증거를 일부 확보했는데도 검찰의 송치 명령에 수사를 접어야 했다. 김 씨가 유력 인사들에게 보낸 선물 등을 사진으로 찍어 휴대전화에 남겼다고 하지만 이번 금품 로비의혹 사건에도 장부나 명단이 있는 건 아니다.
거물급 인맥이 공개된 이후 김 씨는 “경찰이 진술을 강요하고, 휴대전화를 위법적으로 압수수색했다”며 출석 통보에도 불응하면서 구치소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경찰에서 진술하면 손해고, 검찰에서 말해야 조그만 혜택이라도 볼 수 있다는 피의자들의 오랜 통념이라고 볼 수 있다. 경찰이 피의자의 수사 비협조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은 피의자의 바람대로 “게이트가 아닌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부 특권층은 수사도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신화가 앞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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