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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今笑叢

Jimie 2020. 5. 28. 07:18

고금소총(古今笑叢)은 《동국골계전(《태평한화골계전》으로도 알려져 있음), 《촌담해이》, 《어면순》, 《속어면순》등의 기존 이야기 모음집에 전해내려온 갖가지 우스운 이야기들과 음담패설을 내용으로 하는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내용이 상스럽고 천한 육담과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많지만 양반사회를 풍자한다든가 위선적인 사회모습을 해학과 교훈적 풍자의 이야기로 담고 있다.

 

민간에 전래하는 문헌소화(文獻笑話:우스운 이야기)를 집대성한 설화집으로, 대략 19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속에 수록된 소화집의 편찬자는 대개 알려져 있다. 1947년송신용(宋申用)에 의하여 ‘조선고금소총(朝鮮古今笑叢)’이라는 제목으로 제1회 배본에 ≪어수록 禦睡錄≫이, 제2회에 ≪촌담해이 村談解頤≫·≪어면순 禦眠楯≫이 한 권으로 묶여 정음사(正音社)에서 출판되었다.

 

조선 양반들의 性談論

■갓쓴 양반들의 性담론

점잖게 갓을 눌러 쓴 채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사랑방에 정좌하고 있었을 것만 같은 조선시대의 양반들. 주야장천, 사시사철 늙어 죽을 때까지 그들은 ‘사서삼경’에 이(理)와 기(氣),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어떻다는 둥 성현의 말씀만 되풀이 읽게 돼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양반들은 자신을 스스로 독서인이라는 뜻에서 선비(士)라고 불렀다. 양반들이 평생 되풀이 읽었다는 책들은 무미건조하다.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책들만 상대해 그렇겠지만 양반들이 남긴 문집도 품위와 격조는 높지만 딱딱하기 그지없다. 양반들은 간단한 안부 편지 한 장을 쓰더라도 <시경>과 <서경>을 인용했고, 사소한 일에도 격식을 갖추기에 부심했다.

양반들의 생활의식 속에는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변되는 엄한 내외법(內外法)이 단단히 자리했다. 바깥양반은 사랑채에, 안주인은 안채에 따로 기거했다. 설사 부인과 동침할 경우에도 몰래 안채로 들어갔다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사랑채로 나와 의젓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이것이 예법에 맞은 생활이었다. 19세기 후반 명문가 여성들이 진술한 양반가의 생활상을 읽어보면 가정이라는 협소한 공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격리돼 있었다. 조선사회는 공적 영역에서 남녀간의 성관계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양반들에게도 이른바 골계(滑稽)라는 것이 있었다. ‘골(滑)’은 ‘어지럽게 한다’는 뜻이고, ‘계(稽)’는 ‘같다’는 의미다. 따라서 골계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진위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풀이된다.

유명한 골계집으로는 강희맹의 <촌담해이>,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 송세림의 <어면순>, 성여학의 <속어면순> 등이 있다. 이런 책들은 <고금소총>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기도 했다. ‘고금소총’이란 예와 오늘을 통틀어 웃기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책에 대해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골계는 양반들이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지은 육담(肉談)에 불과했고 한낱 우스갯소리일 뿐이라고. 양반의 엄격한 생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학자들은 이른바 육담에서도 풍자로 세상을 바꾸려는 선비의 높은 기상이 보인다고 한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다.


저 고운 딸년이 그 맛도 못 보면

<고금소총>에 담긴 양반의 골계·육담·소화에는 양반들의 성 담론이 숨어있다. 체면을 무척 중시하던 시대, 점잖은 그들로서는 차마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심각한 논의를 골계에 담았다.

화자 또는 작자인 양반이 청중 또는 독자인 다수의 다른 양반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자기의 느낌과 주장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주고받은, 그래서 수정과 덧붙임이 가능한 담론이었다. 그것이 원맨쇼가 아닌 토크쇼였다는 점은 우선 골계의 내용에 드러나 있다.

골계의 상당수는 어느 사랑방에서 벌어진 토론의 종합 또는 꽤 널리 알려진 소문에 대한 의견의 취합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양반들 공동의 관심사, 무거운 고민, 쓴 경험과 성공담이 골계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포장된 것으로 보인다.

어느 경우든 양반의 성 담론은 반드시 깃털처럼 가벼운 언사로 정리돼야 했다. 번득이는 재치와 너스레라야 했다. 이것은 공자?맹자의 진중한 말씀도, 예학도 이학도 아닌 내용이어서 심각함을 드러냈다가는 도리어 외면당하거나 패가망신하기 십상이었다.

강희맹?서거정 같은 큰 학자들이 어찌 그만한 지혜가 없었겠는가? 그들은 무거운 이야기, 심각한 고민, 절절한 인생사일수록 가볍게, 그야말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흘릴 줄 알았다. 행여 누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심심풀이 붓방아였다고 변명할 만한 건더기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표연말 같은 정통파 성리학자는 골계를 썼다는 이유로 서거정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 일로 서거정의 명예가 실추되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의 골계는 문체상으로 완벽했다. 차마 공론화하기 어려운 성 담론을 어렵게 꺼내면서 양반들은 가볍고 익살스러운 글쓰기 전략을 추구했다. 이제 그 전략을 역으로 치고 들어가 담론의 실체를 밝힐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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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어느 곳에 경진사라는 양반이 있었다. 마침 그의 딸이 나이가 꽉 차 이웃 고을 임생원 아들을 신랑감으로 맞이해 예정된 날짜에 화촉을 밝혔다. 그런데 신랑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필 배꼽 아래 종기가 생겨 그 중요한 일을 전혀 치르지 못하고 신부집에서 허송세월한 뒤 하릴없이 부모님께로 돌아갔다.

16세기 중반에 쓰인 이 이야기는 대강 그렇게 시작된다. 만일 당신의 딸이 첫날밤을 치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딸을 불러 첫날밤 경험을 직접 물을 것인가? 또는 당신의 아내에게 묻게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딸의 눈치만 볼 것인가? 또는 신랑에게 대놓고 물어볼 것인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때 골계는 비로소 담론으로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경진사의 결정은 당신의 예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는 딸을 불러 직접 질문을 던졌다.
“임서방이 그 일을 알더냐?”
조선의 양반이 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아버지가 그런 질문을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조선 후기에도 경진사의 그런 질문은 삭제되지 않은 채 계속 필사됐고 많은 양반에게 읽혔다는 점이 중요하다. 골계는 반드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필요가 없다.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더라도 ‘실은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을 때 담론은 더욱 성공적이다. 좀더 부풀려 말하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중요한 논의가 골계의 탈을 쓰고 등장할 때 청자나 독자는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딸은 울면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러자 경진사는 걱정이 돼 다음 수순을 밟는다. 이미 결혼한 지 오래여서 알 것을 다 아는 큰딸을 불러 사정을 알아보라고 명령한 것이다.
큰딸로부터 답이 왔다. 작은딸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망쳤어. 신랑은 사내 구실을 못하는 병신이야!”
혼전 성경험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은 딸은 신랑과의 동침이 성적 쾌락을 가져다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자 신랑에게 그 까닭을 물을 수도 없어 신부는 무조건 부모를 원망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혼처를 정해 버렸기 때문에 부모야말로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봤던 것이다. 사실 조선사회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는 당일까지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혼인은 양가의 부모, 특히 아버지들의 의사대로 결정되었다. 이른바 ‘주혼(主婚)’이 결정할 일이었지 당사자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첫날밤을 기대했던 경진사의 딸은 혹시 혼전 성경험이 있었을까? 그러나 양반집 규수가 어떻게 혼전 경험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라면 혹 모를까, 조선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상이다.

조선사회에서는 여성의 정절을 무척 중시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억지로 손목을 잡혔대서 그 손목을 자르

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양반들은 자기네 딸들의 혼전 경험을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얼굴과 몸매가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그의 나이 18세가 되자 부모는 서둘러 혼처를 정해 뒀다. 시집가기 전 어느 날 밤, 처녀는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뒷집에 들렀다. 마침 그 집에는 총각이 있었는데, 그는 처녀를 보자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충고했다.


처녀에게 요본과 감창이 미흡하다 지적

“이제 곧 시집가게 되었다지? 미리 꼭 배워야 할 일이 있지. 미리 배워두지 않으면 소박을 맞을 거야.”
‘소박’이라는 소리에 처녀는 그 일을 반드시 배우기로 했다. 처녀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간 총각은 성교를 가르쳤다.

총각은 성행위에서 여성이 선사할 ‘6희’를 논했다. 총각은 이름만 총각이었을 뿐, 이미 성에 도통한 성 전도사였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총각은 단 한 차례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입을 빌려 양반들은 ‘6희’에 여성의 행불행이 달렸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를 양반들이 수백 년 동안 주고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반들이 자기네 역할을 이야기에 등장하는 교활한 총각으로 설정해 놓고 가상의 공간에서 순진한 처녀를 유혹해 마음껏 음행을 즐긴 것이다.

총각이 말한 6희는 남성의 입장에서 본 성적 만족의 조건이었다. 착(窄, 좁고)?온(溫, 따뜻하고)?치(齒, 꼭 물 것이며)?요본(搖本, 몸뚱이를 흔들다가)?감창(甘唱,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속필(速畢, 빨리 끝낼 것)이라고 했다. 총각은 처녀에게 요본과 감창이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처녀는 밤마다 총각을 만나 그 기술을 연마한다.

그러다 시집간 첫날밤, 신부는 요본에 감창까지 모든 능력을 발휘한다. 신랑은 신부가 처녀가 아님을 눈치챘고, 신부는 울며 친정으로 쫓겨 온다. 딸을 붙들고 어머니가 다그쳐 묻는다. 딸은 뒷집 총각 이야기를 실토한다. 어머니는 “이것아. 어째 그런 기술을 써먹었느냐”며 화를 낸다. 친정어머니를 빙자해 양반들은 자기네 속내를 토로한다. 신부는 만에 하나 성적 경험이 있을지라도 아닌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교육이 없지 않았다. 그 핵심은 성적 만족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아들만이 가문을 빛낼 수 있고 부모의 노후를 보장했기 때문에 결혼 적령기의 딸들은 어머니에게서 귀숙일(아들 잉태하는 날)을 배웠다.

일례로 봄에는 갑(甲)과 을(乙)이 든 날을 귀숙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래도 안심이 안 돼 귀숙일을 적은 달력을 시집가는 딸의 손에 몰래 쥐여주는 친정어머니도 많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은 임신 최적기를 판단하는 방법이었다. 월경이 끝날 무렵 무명조각을 여성의 성기에 부착해 뒀다 그 빛깔이 금색이면 씨를 내릴 최상의 시기로 봤다.

그때부터 나흘 안에 교합하는데, 홀수 날 씨가 내리면 아들, 짝수 날은 딸이라고 점쳤다. 득남에 관한 이런 상식은 남성들도 모두 배웠다. 남성은 서당에서 <논어>를 뗄 무렵 훈장에게 성생활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습득했다.

보정(保精)이라는 이름으로 건강을 지키면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집안에서도 장가가기 직전 어른들로부터 ‘상투 탈막이’라는 글을 배웠다. 역시 정력을 유지하며 똑똑하고 힘찬 사내아이를 얻기 위한 비법이 요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혼전에 남성을 알았던 여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상당한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양반의 부녀를 성적으로 의심하는 듯한 말을 직접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이겠지만 양반들은 자기네 체면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여성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스님을 화자로 설정해 놓고 부정한 여성들의 고백을 받아내는 방식이었다.

어느 절에 음흉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아랫마을 사는 박씨·김씨·이씨와 아주 친했다. 언젠가 한번은 두부를 만들어 세 집 부인들더러 가져가라고 했다. 절에 온 부인들에게 스님은 말한다.
“절의 음식을 가져가려면 먼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잘못을 고백해야지, 아니면 큰 벌을 받습니다.”


스님을 화자로 등장시킨 이유?

부인들은 계속 망설였다. 그러자 스님의 명으로 불상 뒤에 미리 숨어 있던 사미승이 부처님 흉내를 낸다.
“너희가 간음한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어서 사실대로 말하라.”

부인들은 사시나무 떨듯 했다. 박씨의 아내가 고백한다.
“저는 시집오기 전 집에 드나들던 총각과 숲에 가서 정을 통했어요.”

김씨의 아내가 말을 잇는다.
“한 동네 사는 남자가 첫날밤을 보내는 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저를 유혹했어요. 그러다 아이까지 갖게 되었어요. 아이를 부모님이 파묻으시고 김씨에게 저를 시집보냈어요.”

조선시대 남성들은 규방에 갇혀 지내던 처녀를 만날 길이 거의 없었다. 생각다 못해 그들을 만날 기회를 찾아낸 것이 심부름이고, 말을 붙인다는 것이 예법의 강습이었다.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했을 일탈인 셈이다.

양반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낯모를 처녀와의 성적 만남을 상상하고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네 딸들에게 음심을 품을지도 모르는 친척과 친구들을 경계했을 것이다. 끝으로, 이씨 아내도 자백한다.

“저희 집에는 남편 친구 한 사람이 자주 오는데, 그와 눈이 맞아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어요. 남편은 전혀 모르지만 이게 어디 제 잘못인가요?”
갈수록 태산이다. 갓 쓴 양반들의 심사를 알 만도 하다. 친구 집에 갔다 그 아내가 예쁘면 음심을 품기 일쑤, 제 아내에 대해서도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부처님은 과연 자비로우시다.

“죄를 솔직히 고백한 그대들을 모두 용서하노라.”
사미승이 낸 소리였다. 스님은 곧 불상 앞에 꿇어앉아 부처의 영험함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남편들에게 고백할 때라고 말했다. 부인들은 애원했다. 제발 그 말만은…. 스님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부인들을 골방으로 안내하여 차례로 즐기더니 많은 시주를 약속받았다.

스님은 누구인가? 따지고 보면 이야기에 참여한 양반들 자신이다. 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직접 들려줬을 턱이 없고, 양반의 부인들이 그런 과거사를 스님 앞에서 고백했을 리도 없다. 양반들이 멋대로 그렇게 짐작한 것이다.

이야기에 개연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여성의 정조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양반들의 담론일 뿐이다. 여성은 바로 그처럼 과장된 감시 속에 처해 있어 때로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은장도를 뽑아 자해했던 것은 아닐지.


아들의 혼전 경험은 무죄

양반들을 대표해 오늘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경진사는 숨김의 미덕을 잘 알았을 법하다. 설사 딸의 혼전 성경험이나 혼전 임신 같은 일이 있었더라도 알아서 뭉갤 만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목하 그의 당면과제는 새신랑 임서방이 과연 성불능이냐 하는 문제였다. 경진사 부부는 거듭 대책을 숙의하던 끝에 바깥사돈 임생원에게 항의편지를 보낸다. 구실은 아주 유교적이다. ‘신랑이 사내구실을 못해 외손자 볼 희망이 없다. 그래서 원통하다’는 것이었다. 임생원도 기대 이상이다. 임생원은 즉각 반박성 편지를 보내온다.

‘사돈이 언제 우리 아들 양물을 봤다고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오? 요전날 다리 밑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우연히 봤소만 참 큽디다. 왼손으로 가리면 오른쪽이 남고, 오른손으로 가리면 왼쪽이 남습디다. 어디 그뿐이오. 우리 이웃 김호군네 막덕이란 계집종을 진즉 첩으로 둬 벌써 2남매를 낳았소. 내 아들놈이 고자라니, 섭섭하오. 장가가던 날 손이 들어서는 쪽으로 출행했기에 그런 거라오.’

조선시대 지배층의 일원인 임생원은 천연덕스럽게 아들의 혼전 경험을 떠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사회에서 미혼 남성은 성적으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동일 계층인 사족의 부녀와 접촉하는 것은 엄금되었으나 신분이 낮은 계층의 여성을 희롱하거나 취첩(取妾)하는 것은 관용되었다. 게다가 창기(娼妓)와 같은 특수여성이 있어 성적 욕망을 해소할 길이 열려 있었다.

서양에서도 남성의 성은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특히 18세기에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특이한 것은 미혼의 아들이 성적 욕망을 키우도록 어머니가 가르쳤다는 점이다. 어머니 또는 가까운 친지 가운데 교양 있는 여성들이 이제 갓 청년기에 접어든 남성을 성적으로 도발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아이 취급을 하면서 실제로는 청년의 정욕을 자극했다.

그가 빤히 바라보는 앞에서 일부러 나체가 되어 여성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보고 즐기게 했다. 그런 방식으로 여성의 몸에 익숙하게 만든 다음, 청년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하녀를 소개해 성욕을 해소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갓 쓴 양반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경진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내에게 편지의 내용을 알렸다. 아내는 더욱 현실적이었고 매우 신중했다.
“아무 증거도 없이 사돈의 말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이오? 바깥사돈은 분명히 아들 체면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노부부는 수심에 잠겼다. 그때 맏사위 우서방이 등장한다.
“이거 큰일났네. 둘째사위 임서방이 아무래도 고자가 분명해!”

며칠 뒤 새신랑 임서방이 다시 처가에 들렀다. 우서방은 임서방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때려눕힌 다음 양물을 손수 점검한다.

“장인, 장모님! 신부는 복이 터졌습니다. 임서방 물건이 참 큽니다!”
큰 동서가 작은 동서의 양물을 직접 검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는 갓 결혼한 작은딸의 성적 만족이 그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 또는 경진사 일가 전체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명분이 있었기에 친정부모, 시집간 언니, 형부, 바깥사돈까지 모두 동원돼 그 문제를 푸는 데 골몰한다.

밤이 되었다. 경진사는 신방에 불을 밝힌 다음 신랑 신부를 들여보내고 몰래 뒤꼍으로 가서 창문에 구멍을 뚫어놓고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그새 임서방의 종기는 다 나았다. 아버지 임생원의 꾸중도 적지 않았다. 방사(房事)는 강하다 못해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그날은 둘째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첫날밤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벌써 무아지경이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10대 후반의 과감한 신부

어쨌거나 경진사는 허겁지겁 안방으로 뛰어든다.
“여보, 마누라! 신랑이 그 일을 해, 참 잘해! 시렁 위에 얹은 고리짝을 내려오오. 얼른 홍시를 갖다줘야지.”

이야기 속에서 임서방이 종기를 이유로 성교를 피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음직도 하다. 조선시대의 건강서적인 <수양총서>에 보면 종기가 다 아물지 않았을 때는 성적 교접이 금지되어 있다. 혈기가 흐트러져 종기가 터진다고 봤던 것이다. 이처럼 건강상의 이유로, 남녀간의 성생활에는 금기가 많았다.

성적 경험이 없는 남녀에게 첫날밤이란 실은 매우 초조한 시간 또는 악몽일 수 있다.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무아지경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이 생각하는 첫날밤은 매우 달콤한 것이었다. 첫날밤 신부가 오르가슴을 느꼈다는 것은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양반들은 이미 성경험이 많은 중년 남성의 시각에서 첫날밤의 특별한 장면을 연출하고, 함께 즐겼던 셈이다. 양반들은 첫날밤 신부가 얼마나 긴장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테지만, 굳이 완벽한 결합이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양반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양반들도 알고 있었다. 첫날밤이 반드시 달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양반들이 보기에는 신랑의 책임이었다.

머리가 좀 부족한 총각이 장가를 가게 됐다. 첫날밤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서 신랑은 신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멍청한 그는 가슴을 등으로 알고 두 젖가슴을 혹으로 생각해 놀랐다. 엉덩이 밑을 손끝으로 탐색하던 신랑은 구멍을 찾지 못했다. 신랑은 화가 나서 신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신부 집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딸에게 물었다. 신부는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우습구나, 어리석은 낭군 도망친 꼴 / 참 맛은 당연히 앞쪽에서 구하련만 / 헛되이 잔등만 더듬다 땀만 흘렸네.’
신부 집에서는 그 시를 신랑의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것은 꼭 경진사가 바깥사돈 임생원에게 편지를 보낸 꼴이다. 양반들의 문제 해결 방식이 통상 그랬다는 이야기. 그 다음도 역시 비슷하다.

방금 예로 든 경우와 달리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랑이 너무 어리면 그렇다. 양반들은 조혼이 가지고 있는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조혼 풍습이 시작된 것은 원나라가 해마다 많은 공녀를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관행으로 존재했다.

1911년 국세조사를 보면 결혼한 남녀 각 1,000명 가운데 15세 미만에 결혼한 이가 남자는 217명, 여자는 638명이었다. 나의 짐작과 달리 조혼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어떤 양반이 열 살이 좀 넘은 어린 아들을 장가보냈다. 신부는 그보다 대여섯 살 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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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문육보 (陰門 六寶)

먼저 여자방술사가 되기 위한 음문육보 즉 여섯가지 보배로움은 일 착(笮) 이 온(溫) 삼 요(吆) 사 요본(搖本) 오 감창(甘唱) 육 속필(速畢)이다. 풀어 설명하면 음도(陰道)가 감기듯 달라붙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따뜻함, 셋째는 깨물듯이 자근자근 조이는 것, 넷째는 엉덩이를 흔드는 기술이고, 다섯째는 듣기 좋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여섯째는 빨리 끝내는 것. 빨리 갈 수 있어야 상대남자에게 자신감·자존감을 키우는 심리치료가 가능하다.

여성이 성적으로 흥분하면 42겹의 주름으로 이루어진 음도는 자율신경의 지배를 받아 저절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특히 여성이 절정에 이르면 음도의 입구부분은 저절로 수축한다.

임신을 위해 남자의 정액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물주께서 그리 만드셨다. 여자의 몸이 본디 이리 생겨먹었으니 누구나 제항기공(制肛氣功)만 열씨미 수련하면 3부분으로 구분하여 조이고 푸는 것을 맘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원하는 대로 원하는 시간에 절정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빨리 가는 거, 이거 제대로 알고 쫌만 훈련하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제항기공이 뭐냐고? 케겔운동이 제항기공 3단계 가운데 1단계와 비슷하다. 2단계는 바로 허리돌리기기술인 요본, 즉 요분질이 추가된다. 그 냥 조이는 게 아니라 골반강 내부압력을 이용해 조여 당기면서 휘돌리는 기술이다.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수축력이 관건이다.

 

양물육보 (陽物 六寶)
일 앙(昻) 이 온(溫) 삼 두대(頭大) 사 경장(莖長) 오 건작(健作) 육 지필(遲畢)이다. 첫째 생김새가 강건하게 하늘을 우러러 솟아오름이고. 둘은 따뜻함이고, 셋째 송이버섯 갓 꼴인 귀두가 큰 것이고, 넷째 줄기가 긴 것이고 다섯째 제대로 작동함이고, 여섯째는 더디게 끝나는 것, 마찬가지로 원하는 시간에 끝낼 수 있는 능력이다.

일어섰을 때 아랫배와의 각도가 45도 전후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에 사마귀까지 하나 달리면 속칭 명도(名刀)라 불린다.

명도가 펼쳐내는 신기(神技),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전희. 상대가 좋아하는 맞춤형 애무법을 찾아내 충분히 황홀하게 해주어야 하고 다음엔 귀두부분으로 음핵을 비롯 음문입구를 정성껏 오래오래 문지르는 게 핵심기술.

다음은 삽입기술로 좌 3·3(9회) 우3·3(9회) 상하7·7(49회) 중8·8(정조준 64회). 한 세트로 부족하면 두 세트까지 구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전설이 된다. 그러다가 상대가 절정에 도달할 것 같으면 은근하면서도 강한 3~4회의 맷돌질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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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중종(中宗) 때 명기(名妓)인 황진이(黃眞伊)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가 합궁한 뜻을 아는가?

 

황진이는 당시 고려에 고승으로 명성을 떨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공손히 법문을 요청하면서 유혹의 색기(色氣)를 총동원했다. 황진이는 그동안 고려에 내노라하는 사대부들에 색기로 유혹하여 충견(忠犬)처럼 황진이의 아랫도리에 향취를 맡게 하는 것은 물론 절정고수(絶頂高手)인 천재였다. 황진이는 이 세상 어느 놈이던 충견처럼 아랫도리에 향취를 맡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쳤다. 어느 날 그녀에게 지족선사의 명성이 들려왔다. 청정 비구승이요, 고승이다.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찾아가 우선 핑계로 고준한 법문을 듣고자 한다고 간청하여 법문을 들으면서 충견 만들기 작전을 벌인 것이다. 이 때 고승인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계책을 파악하고 법문의 여러 말을 늘어놓을 것 없이 황진이를 방안에서 내쫓아 내는 것이 최고의 법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작금의 승려들에 법문을 듣고자 한다면서 유혹하는 여인을 보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며 법문 끝을 말하고 보내버린다.

 

지족선사는 황진에게 자신이 깨달은 무진법문(無盡法門)을 힘차게 들려주고, 황진이는 갈고 닦은 무형내공(無形內功)의 색기를 지족선사를 향해 발사하여 유혹했다. 그 대결은 싱겁게 황진이의 승리로 끝났다. 법문을 하던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아랫도리 냄새를 맡는 충견으로 돌변했고, 황진이의 배위에서 감격에 찬 감창(甘唱)의 신음소리를 내 질러 댄 것이다. 연속하여 합궁을 하자고 졸라대는 지족선사를 밀치고 황진이는 깔깔깔 웃어대고 치마를 입고 방문을 나서며 황진이는 법문같이 다음의 일언(一言)을 남겼다.

 

“헛된 명성이었구먼. 공부 좀 더 해!”

 

금강경의 “모든 것이 허망하다(皆是虛妄)” 속에 지족선사는 황진에게 충견 노릇 한 번에 이 땅에 불교가 망해 없어지는 그 날까지 불교계는 물론 세상에 웃음꺼리가 되어 버렸다. 황진이는 개성 도처에서 지족선사는 법문 도중 자신의 아랫도리 향취에 빠져 인사불성이듯 했고, 배위에서 감창 소리를 질러 댔다는 보고서 아닌 소문을 퍼뜨리면서 깔깔깔 댔다. 개성의 여인들과 남성들은 황진이의 체험 보고에 일제히 박장대소(拍掌大笑)로 번져 전 고려는 물론 오늘까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일평생 수도하여 깨달은 고승도 예쁜 여인의 아랫도리에 코를 박았네.”

 

지금에도 황진이 같은 일부 여성은 분명 존재한다. 명성을 떨치는 고승을 찾아 법문을 간청하고서는 끝내는 합궁하고, 명성에 먹칠을 해버리는 간증을 해대는 여성들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지족선사의 행위는 오늘의 조계종 규율을 담당하는 호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씻을 수 없는 “해종행위(害宗行爲)를 한 중징계 대상”이라고 논평할 수 있다.

 

황진이는 보통여자가 아니었다. 지족선사에게 충견처럼 자신의 향취의 냄새를 맡게 하고, 배위에서 감창(甘唱)의 신음소리를 내 지르게 한 것은 무료봉사(無料奉事)였다. 황진이는 “한 번만 더”를 간청하는 지족선사에게 정색하여 “공부 좀 더 해!”라는 훈시를 남기고 떠난 낭만적인 여성이었다. 단 개성으로 돌아가 개성 주민들에게 자신의 지족선사에 대한 체험보고를 한 것이 지족선사는 물론 불교계에 먹칠을 한 것이 과오일 수 있을까?

 

지금에 일부 여성 가운데는 황진이 같이 명성있는 고승들을 찾아 법문을 빙자하여 가까이 앉는 수법을 부린다. 황진이 뺨치는 수법으로 무형내공(無形內功)인 색기(色氣)를 근엄히 법문하는 고승에게 보내다가 돌연 고승을 충견처럼 여인의 아랫도리 향취에 빠지게 하는 데, 황진이처럼 낭만적인 목적이 아니다. 화대(花代)같은 큰 돈이 목적이다. 황진이 처럼 일회용으로 하고 떠나면서 “공부 좀 더 해!”라고 떠나지 않고, 돈을 바치는 성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수가 종종 있다.

 

사찰에 고급 외제차를 타고와 주지스님을 찾아 자신이 1천억이 넘는 재력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며칠 후 수십억의 시주를 할 것처럼 언어의 마술로 홀린 후 충견처럼 여인의 아랫도리 향취에 빠지게 하고, 급전(急錢)을 3-5억 쯤 빌려 사라지는 미인들이 있다는 보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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