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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파 [靑鹿派] 박목월(朴木月)

Jimie 2021. 2. 16. 05:16

청록파 [靑鹿派] 박목월(朴木月)

 

조지훈이 ‘민족’, 박두진이 ‘기독교’에서 삶의 궁극의 가치를 찾았다면, 박목월(朴木月, 1916~1976)은 ‘일상’에 많은 비중을 둔 시인이다. 박목월의 시 세계가 청록파의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스케일이 작고 소박한 것도 이런 성향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박목월 또한 주로 자연에서 시의 소재를 찾으며 창작 활동에 나선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같은 청록파라고 해도 세 사람의 시 세계 속에 나타난 자연은 조금씩 빛깔이 다르다. 박목월의 자연은 전통 율조와 회화적인 감각, 그리고 향토성이 짙게 배어 있는 자연이다. 청록파의 다른 두 시인에 비해 그의 시가 좀더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고, 한결 부드럽고 섬세하며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청록파 가운데 가장 늦게 나와 다른 누구보다 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시를 선보인 박목월

 

박목월은 본명이 영종(泳鍾)인데, 1915년 경주 서면 모량리에서 태어나 건천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아버지 박준필은 수리조합 이사였고 대구로 나가 중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유지였다.어머니는 보통학교 4학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신앙은 이후 목월의 정서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에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그는 경주에서 좀 떨어진 보통 학교를 졸업한다. 1930년 대구 계성중학에 들어간 그는 하숙 생활을 하며 습작기를 보낸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1932년 아동잡지 [아이생활]에 투고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 공모에 당선되어 발표되었다.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 『신가정』에 「제비맞이」라는 글이 실리면서 아동 문학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지만,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집안이 기울어 고향으로 돌아와 동부금융조합에서 일하기도... 도일(渡日)하여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하였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山雅房)·창조사(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목월(木月)이라는 필명은 그가 좋아하던 수주(樹州) 변영로의 아호 중 수(樹)자에 포함된 ‘목(木)’과 소월(素月)로부터 ‘월(月)’을 따서 지은 것이다. 1939년 『문장』에 작품 '길처럼' 을 투고해 청록파 시인 중에서 가장 늦은 1940년 9월에 등단하는데, 이 때 그는 정지용으로부터 “북의 소월, 남의 목월”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기성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소월의 툭툭 불거지는 삭주 귀성조(朔州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 민요풍에서 시에 발전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소월이 천재적이요, 독창적이었던 것이 신경 감각 묘사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민요”에 시종하고 말았더니 목월이 요적(謠的) 뎃상 연습에서 시까지의 콤포지순에는 요(謠)가 머뭇거리고 있다. 요적 수사(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 시이다.

정지용, 『문장』(1940. 9.)

 

1946년 『청록집』을 낸 뒤에 그는 금융 조합 일을 그만두고 대구 계성중학교와 서울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어 출판사 ‘산아방(山雅房)’의 경영을 시초로 1950년에는 ‘여학생사’의 주간으로 잡지에도 손을 대나 실패한다. 곧 조지훈 · 박두진 · 이한직과 함께 『시문학』에 참여하지만, 이것도 6·25 때문에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만다. 1953년부터 그는 다시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는 등 교직에 몸을 담으며, 1954년에는 시집 『산도화』를 펴낸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리 //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시집 『산도화』에 실린 「나그네」의 전문이다. 「나그네」는 민요풍의 리듬과 보편적인 향수의 미감 등이 어우러져 단순한 구조 속에 그 나름의 완성미를 구현한 작품으로, 널리 애송되는 시편 가운데 하나다. 향토색 짙은 서정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 시에 나타난 자연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자연’이다. 그 자연에 굽이치는 것은 유전(流轉)하는 삶에 대한 향수와 슬픔이다.

〈나그네〉가 실린 〈산도화〉

 

이처럼 자연에서 출발한 박목월은 후기로 넘어오며 차츰 현실적 삶의 애환을 노래하게 된다. 그는 세상살이를 바라보면서 현실 속의 갈등이나 초극의 의지를 보여주기보다는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는 데 힘을 기울인다.

초기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산도화』를 낸 뒤 그는 1956년 ‘한국시인협회’의 출판 간사를 맡아 협회의 기관지인 『현대시』와 연간 시집 『시와 시론』을 발행한다. 1959년에는 시 세계의 전환과 함께 일상의 자잘한 편린에 관심을 기울인 시집 『난(蘭) · 기타(其他)』를 내놓는데, 많은 평자로부터 섬세함과 고유한 정서로 리리시즘을 구현해냈다는 찬사를 듣는다.

사소한 일상에 관심을 기울인 시집 〈난 · 기타〉

 

1962년에 그는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며, 1963년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개인 교습을 맡기도 한다. 1964년에는 과거의 정형률에서 벗어나 서술체를 사용, 자연을 현대 감각으로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집 『청담(晴曇)』을 내고, 이 시집으로 1968년 대한민국 문예상 본상을 받는다. 1968년에 펴낸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에서는 의문과 자아 확인을 동시에 내포한 “뭐락카노.”라는 시구를 비롯한 경상도 방언을 통해 시인이 고향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향으로의 회귀란 곧 삶의 본질을 찾아 시공을 거슬러오르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짙은 허무가 배어나기도 하지만, 그 허무의 끝에서 좌절이나 체념을 넘어 삶과 죽음을 여유 있게 바라보는 달관의 자세를 만나게 된다. 1970년대 초반에 나온 「사력질(砂礫質)」 연작은 그의 후기를 대표하는 시로, ‘자연’에서 출발해 ‘일상’과 ‘가족’을 우회한 끝에 그가 안착한 ‘사물의 본질의 세계’에 대한 냉철한 통찰을 담아낸다. 「사력질」에서는 아울러 그 통찰을 통해 유한한 삶에 내재된 한계성과 비극성을 간결하게 보여준 박목월 후기 문학의 진경이 펼쳐진다.

1970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 자택 서재에서

 

1973년 9월 그는 박남수 · 김종길 · 이형기 · 김광림 · 김종해 · 이건청 등이 참여한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한다. 이후에도 시집 『무순(無順)』을 펴내는 등 1976년 삶을 다하기 전까지 박목월은 출판인으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청록파’라는 이름을 지상에 남긴 한 시인으로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다. 그는 시집 외에도 수필집 『구름의 서정』 · 『토요일의 밤하늘』 · 『행복의 얼굴』 · 『보랏빛 소묘』,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 · 『초록별』 · 『사랑집』 등을 남긴다.

박목월의 수필집 〈토요일의 밤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