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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朴載弘)의 삶의 발자국

Jimie 2021. 2. 12. 20:36

박재홍(朴載弘)은 1924년 4월 7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109번지에서 출생.

 

1---가수 박재홍씨의 고향은 경기도 시흥군 복면 시흥리로 현재는 서울시에 편입되어있다.

1924년,4월 7일 부친 박순학씨와 모친 이순이씨 사이에 4형제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세살때 아버지등에 업혀서 이북땅으로 갔다. 아버지 직업이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감독으로 일하시는 관계로 한곳에 정착해 살아보지 못했다.

해서 그가 철이들어 이사 다니던곳,학교는 함남신흥 보통학교 를 졸업했던 희미한 유년시절 뿐이었다한다.

 

2---해서 박재홍씨의 어린시절 은 세가지추억으로 요약될수있다.

유난히 배가 고팠다는것, 집과 학교를 자주 옮겨다녔다는것, 그리고 남달리 노래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유난히 배가고팠던것은 수력발전소 하청작업 전문인 부친이 몸져 눕기라도하면

그나마 식량배급도 잘안주고 밀려났으니 어린 마음에 늘 잘사는 일본사람들이 부러웠다한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집안에 낡은 포터블축음기 한대가있어서 유성기를 통해 노래듣는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는 어릴때부터 음악교육, 음악성이 발달했었다고나 할까 살림이 어려워저 축음기를 내다 팔려할때

축음기를 껴안고 하소연하며 뗴를썼던 기억을 더듬곤 했다.

 

3---보통학교를 졸업, 강계에 있는 수력전기공사에 입사시험을 치렀다.

합격과 동시 연구생으로 기숙사생활을 시작했다.

1940년,2월 10일 조선총독부에서 정해놓은 창씨개명법에 따라 기바나-목화 라는 일본식 성씨를 서야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치욕스런 일제치하에서 날마다 술로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어느날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간 각종가요사 책에 언급이 생략된 일이기도하다 !!!

당시 함경남도 도청 소재지 였던 함흥시에서 ok-record 가  주관하는 전국 가요콩쿠르대회의 지방예선이 열렸었는데

그는 예선에서 뽑혀 서울에서 거행되는 본선대회 출전권을 획득하였다.

 

4---본선대회 장소는 일인들이 거주하던 명치좌극장 -후일 시공관, 국립극장이 있던 곳- 이었다

당시 본선대회 특별출연으로는 홍도야우지마라의 김영춘씨, 뗏목이천리의 이해연씨가 있었고

특히 아코디언반주를 해주던 작곡가 손목인씨가 인상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때 그의나이 17살이였고 신청곡을 부른다음 일본가요를 한곡 부르게한것은 다분히 일인들을 의식한 일이었다.

꼭 가수가 되겠다고 참가한것은 아니였으나 본선 낙방은 박재홍씨의 기분을 자극했다.

1941년,12월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이른 바 태평양전쟁이 일어날  즈음 가족은 평북 강계로 이사가서 살게 되었다.

그가 수력공사시험에 합격 기숙사 생활를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폴리돌레코드사 연예단이 공연중 그 유명했든 폴리돌문예부장 왕평씨가 신카나리아씨와 무대에서 남매를 공연중 쓰러져서 세상을 떠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폴리돌 실연단을 조직 1940년 4월27일부터 조선북부 공연길에 올라 ,7월경 평안도서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고

그달 31일 문제의 장소에서 공연을했다.

 

5---태평양전쟁이 서서히 종말로 치닫을 즈음 회사-평북강계소재 수력전기공사-연구생에서 정사원으로 대접을 받을 시 일본군 입대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왜군대에 가는것은 총알받이가 되어 헛죽음 이라는 부친의 말에 도피를했다.

허나 그에겐 해방이라는 더 큰물살이 밀어닥쳤다.

당초 기대와는 정반대로 북한의 소련 점령하에선 하루하루가 공포의 도가니였다.  해서 목탄 트럭을 한대 동네사람들과 함께 구입, 식구들을 싣고 남하하기 시작 . 도중에 소련군들에게 시계며 중요생필품을 뇌물로 주고 38선을 넘을 수 있었다.

 

6---가족들과 함게 무사히 서울에 왔지만 생계를 이어갈 길이 막막 , 궁하면 통한다듯이 전기기술에 재능이 있는 박재홍씨는 당시 대한전선의 전신이던 조선전선에 운좋게 입사시험을 쳐서 무난히 합격했다.

서서히 생계가 안정이 되어갈 무렵 해방후 처음 신인가수 모집 콩쿠르대회 광고가 나붙었다.

헌데 이광고가 1946년, 1947년설 두가지 기록이 존재 정밀한 확인작업이 있어야한다.

 

하여튼 서울 중앙극장서 3일간 열린 것으로 알려진 ok-record 주최 신인가수 콩클대회가 박시춘, 김해송,

가요황제 남인수씨 까지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가운데 열렸는데,

참가자4000여명 중 박재홍씨가 -- 영등포예선에서 1위로입상 참가했는데 -- 서울본선에서도 또 1위를했다.

허나 상기 콩쿠르 참가 심사위원의  다른 주장도 있다.

 

7---이때 상황을 kbs전속가수였던  원방현씨는 "개성있는목소리로 노래의 기교도 나무랄데가 없었다.

2,3위입상자는 그후 가요계에 재등장치 않았고 4등입상은 군사우편의 유춘산씨였다.나도 참가했으나 낙방 후 kbs 전속가수로 채용되었다 " 고 증언했다.

그렇다고 당장 새노래 취입기회가 오는건 아니였다.

그의 최초녹음은 1948년 새롭게 부활된 ok-record에서였다 .즉. 옥두옥과 함께부른 눈물의 오리정에서였다

 

도련님 만나자 이별이 웬말이요 꽃다운 이팔청춘 이별이 웬말이요

독수공방 긴긴 밤에 나혼자서 어이새나 짝잃은 외기러기 짝잃은 외기러기

우는소리 어이듣느냐

 

춘향아 우지마라 우지마라 춘향아 가면은 아주가며 간다고 잊을소냐

사창에 달밝거든 나본듯이 보아다오 옥가락지 둥글듯이 옥가락지 둥글듯이

우리사랑 끝없으리라--후략--김초량사, 박시춘곡 눈물의 오리정,

 

8---1948년 <눈물의 오리정>을 옥두옥(1927~ )과 듀엣으로 취입, <불사른 일기장>도 취입하였다.

1949년 서울레코드가 창설되자 전속하여 같은 해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 <마음의 사랑>을 취입하였다.

 

1950년에는 반야월이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하자 단원으로 활약하던 중, 반야월이 작사한 <울고 넘는 박달재>를 고려레코드에서 취입하였다.

 

그러나 이 노래 취입 한 달 만에 6.25 전쟁이 터졌고,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에서 쇼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해방 직후에는 부산의 미도파레코드와 대구의 서라벌레코드에 전속으로 있으면서 <경상도 아가씨>, <비 내리는 삼랑진>, <번지없는 항구> 등을 취입하였다.

 

1954년 말에는 부산의 도미도레코드에 전속하여 <물방아 도는 내력>, <향수>, <슬픈 성벽> 등을 취입하였고, 1956년경부터 신신레코드 전속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 이후 아세아레코드에서 활약하였고, 1960년대에도 꾸준히 곡취입을 했다.

또 1960년대 초, 오아시스쇼단을 창설하여 단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부터는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80년대 본격적인 TV쇼시대가 열리면서 원로가수격으로 방송출연도 활발히 하였다. 그러던 중 1989년 3월 21일 오랜 지병으로 인하여 향년 66세로 타계하였다.

 

유정천리 - 박재홍

 1959

작사:반야월 작곡:김부해

 

https://www.youtube.com/watch?v=obnZKn3vn1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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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레방아 도는 내력` 과 함께 박재홍의 대표 곡이라 할 수 있는 이 `울고넘는 박달재` 는 한동안 대유행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때의 추억을 아쉬워 하고 있는 박재홍이 그 무렵의 얘길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시방도  6·25 때  만큼은 잊어지지가 않는군요. 한 두어달 됐는데 유행이 한참 되고서 6·25가 터지지 않았어요? 그래 이제 다들 피난 보따리를 다 메고 애들 데리고 나가는데 실질적으로 제가 박달재를 부르긴 했습니다만은 박달재가 어디 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나가는 길에 그리로 좀 가볼까 했는데 경상북도 어디 뭐 문경 쪽이라고 그래서 가보지도 못하고 피난민 하고 같이 내려 가면서 그 사람들이 박달재를 불러요. 그럼 나도 따라서 같이 부르지요. 그래 그 사람들은 내가 부른건줄 모르니까. 그래서 부산까지 내려가느라고 고생도 했습니다만 그 당시에 뭐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그래서 그 박달재가 특히 그 6·25 때 나왔기 때문에 아주 그 잊혀지지가 않아요.

 

- 서울 레코드에서 고려 레코드로 옮긴 후 6·25 동난을 맞이한 박재홍은 부산으로 피난을 해서 한때 국제시장에서 유신전기상회라는 상점을 차리고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별명이 물소인 박재홍, 박재홍은 그야말로 물소처럼 말수도 적고 화내는 법이 없었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을 때에도 박재홍의 가게는 화재를 면했는데 주위에서는 박재홍이 물소처럼 다소곳 하고 또 온정이 있어서 아마도 신이 지켜주었을거라고 하리만큼 박재홍은 온화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전기상회를 하다가 도미도 레코드에서 `물레방아 도는 내력`, `향수` 등 일대 히트곡을 낸 박재홍은 다시 미도파 레코드로 옮겨가서 `경상도 아가씨`, `비에젖은 주막집` 등을 내놓아 더욱 놓은 인기의 정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미도파 레코드에서 100여곡을 취입한 박재홍은 서울로 돌아와서 신신 레코드 소속이 됐는데 그 때 재정난으로 쓰러져 가는 신신 레코드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 때문 이었습니다..
`돌아가자 하동포구`, `꿈에 본 대동강` 등과 함께 신신 레코드에서 `유정천리` 를 불렀던 그 시절을 지금의 박재홍은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 있습니다.

- 제가 이 가수 생활을 하기 전에는 닭 같은거나 이 무슨 하여튼 이런걸 내 손으로 잡기도 했지만은 시방은 버러지를 내 손을 하나도 죽이질 못해요.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고, 이 여러 그 우리 같은 서울의 시민들이 울고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그냥 보고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유당 말기 때도 그 당시에 뭡니까 그 해공선생이 돌아가시고 또 얼마 안돼서 또 이 조 박사님이 돌아가셔서 참 아주 슬픔에 잠겨있을 때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참 무대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 많이 울었지요. 울면 이제 학생들도 많이 같이 따라서 부르고 막 울다시피 해서 하는데 가사를 실질 제가 바꾸지 않았는데 학생들이 많이 바꿨어요. 뭐 조기선거 왠 말이냐 하면서 뭐 또 벽사지공 왠말이냐 해서 자유당에 비가 오고 민주당에 꽃이 핀다고 한건 제가 한게 아닌데 부산 극장에서 한번 하는데 부산에 내려가서 그 당시에 ....김 선생님이 같이 내려갔을 땐데 아 학생들이 그냥 그 가사 바꾼걸로 한번 하라고 소동을 해서 한번 제가 바꿔서 한번 해본적이 있어요. 이러니 그냥 전 관중이 아우성을 치는데 좋다고 하지만은 끝나고 나오는데 모퉁이에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냥 대가리를 뭐가 치는데 보니 몽둥이를 쳐서 내가 까무라친 적이 있는데 그래서 한 이틀 출연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제가 많이 좀 자유당 한테 혼도 좀 났고 그래서 `유정천리` 잊어지지 않고, 그 당시에 4·19 학생들은 제가 나가면 아이 저기 `유정천리` 온다고 그럽니다. 하하하.

- `유정천리` 에서 히트를 한 박재홍은 다시 신신 레코드에서 `휘파람 불며 언덕을 넘어가자` 그 밖에 200여곡을 취입 했으며 얼마 후에는 박노식, 최성호, 강미혜, 최지희, 배수남, 임희춘, 서영복, 고대원, 금사향, 방태원 등 지금도 쟁쟁하게 이름을 날리는 황금 멤버로 `오아시스 쇼` 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단장으로 있으면서 흥행에도 열의를 보였던 박재홍. 박재홍은 너무나도 다정다감해서 노래를 부를 때는 그야말로 수도승과도 같이 몰아경의 표정으로 함께 슬프고 함께 눈물을 머금으며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박재홍의 노래는 모두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파람을 불며 가자 언덕을 넘어 송아지가 엄마 찾는 고개를 넘어 아가씨가 그네 뛰는 정자나무 지나서 휘파람을 불며 가자 어서야 가자 아카시아 꽃잎 향기 풍기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
박재홍이 불러주는 경쾌한 노래 `휘파람 불며 가자`

- 우리에겐 고유의 가요가 없다고 아쉬워 하고 있는 박재홍. 그래서 건전한 창작 가요가 나오기를 염원하고 있는 박재홍. 모방을 하는 가요에는 발전이 없다고 갈파하는 가수 박재홍. 어지러운 가요계의 풍토를 개탄 하면서 유능한 가수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가수 박재홍은 최갑식, 은방울 자매, 박경원 등의 후배 가수를 마음껏 지원 하기도 했습니다. 19세의 전기기사였을 때 16세 나는 아가씨와 친척의 중매로 결혼한 박재홍은 20세에 첫 애를 두어 지금은 이미 손자가 있는 할아버지 이기도 합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멀리 일본에 가서 여러번 교포 위문을 했고 이번 8월 12일에 또다시 일본으로 교포 위문을 떠난다는 가수 박재홍의 자녀 6남매는 모두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음악 가족이기도 합니다. 섭섭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래를 부르는 자녀는 없지만 피아노와 전자 오르겐을 하는 6남매와 함께 박재홍은 78세의 노모를 모시고 정성을 다하는 효자 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신촌에 있는 양옥에 살면서 레코드 재료를 무역하는 사업을 하는 한편 아직도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 박재홍은 역시 아직도 다정다감 하고 물소처럼 화를 내는 법 없이 정다운 노래를 불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건전한 창작 가요와 유능한 후배 가수가 나오기를 염원 하면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 입니다.

(입력일 : 2007.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