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불후의 명곡 '나그네 설움' 탄생 2회 친일가수 시비에 휘말리다 3회 형의 죽음으로 심화된 반일정서 4회 의인 박영호와의 운명적인 만남 5회 백년설의 사랑과 결혼 6회 성주고에 노래비와 흉상 건립 7회 자랑스러운 성주인 민족가수 백년설
백년설은 잇단 히트곡으로 인기를 얻게 되면서 국내의 유명가수와 작곡가가 함께 태평연주단을 만들어 국내는 물론 중국 만주지방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번지 없는 주막으로 부르는 노래마다 화제를 일으키는 등 그의 가치가 절정에 이른 시절이라 공연장도 늘 초만원을 이뤘다. 1941년 대구에서의 공연 시절에 만난 대구 미모의 여학생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하게 되는 과정을 주변 사람들의 구술 및 자료 등을 통해 알아봄으로써 사랑과 결혼에 얽힌 한 남자 백년설의 삶을 들여다 본다.【편집자 주】
백년설이 가수가 된 과정은 정말 우연한 기회였다.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를 만난 것이 그에겐 일생일대의 행운과 함께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이 무렵 이재호, 전기현 등 내로라하는 작곡가와 가수들로 태평연주단을 구성해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 지방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백년설이 지방공연에 떴다 하면 어디나 수많은 관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만 봐도 그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1941년 초 대구 공연 때의 일이다. 대구는 그의 고향인 성주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무렵이 그의 히트곡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래가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공연장은 초만원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공연 도중 객석에 있는 여학생에게 한 눈에 반해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
백년설은 그 날 무대에서 관객들을 훑어보며 열창하다 한 무리의 검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여러 명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화려한 가수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여성들 속에 둘러싸이다시피 했었지만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여학생에 비견할 만한 여인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한눈에 반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공연이 끝나고 백방으로 수소문 끝에 경북고등여학교의 이한옥 학생이라는 사실을 어렵게 알아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상경도 미룬 채 그녀의 뒤를 밟던 중 어렵게 그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도망치듯 피하기만 하고 백년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애간장을 태웠다. 당대의 최고 인기가수로서 무대에서는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박수를 받는 그였지만 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자가용이라고는 없던 시절 기동력을 위해 대구시내에 단 3대뿐인 영업용 택시 한 대를 한 달 동안 전세를 내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어느 날 마침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정중하게 청혼을 했다. 그녀의 집안은 대구에서도 소문난 명문가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한 달여를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던 어느 날 마침내 그녀를 택시에 태우는데 성공해 데이트할 기회를 얻었다. 그 날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 동의를 얻어내는 집념을 보여 마침내 뜻을 이뤘다. 이때 1941년, 백년설은 26세, 이한옥은 18세였다. 생전에 이한옥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는 쳐다보기만 해도 황홀하여 눈이 부신 대단한 미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슬하에 1남 3녀 두었으나 결핵으로 일찍 사별 후 당대 인기가수 심연옥과 재혼
이한옥은 학창시절에 문학에 관심이 많아 문학서적을 많이 탐독했다. 학창시절부터 써오던 일기를 결혼 후에도 계속 쓴 덕분에 문장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전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당대의 유명 시인 이육사(李陸史)로부터 선물로 받은 미발표 詩 몇 편과 함께 그 많은 일기장을 친정어머니가 엿장수에게 주었음이 밝혀져 모녀 간에 한동안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슬하에 가실, 명자, 수경, 세 딸과 아들 일정을 두었으나 1951년 결혼 10년 만에 이한옥은 젊은 나이에 결핵이 악화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 때 딸 셋은 각각 10살, 7살, 5살이었고, 아들 일정은 겨우 3살이었는데 4남매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상처(喪妻)하고 4년 후, 1955년 당대의 인기가수 심연옥과 재혼하여 부부가 1957년경부터 '여호와의 증인' 종교에 심취했다고 알려졌다.
심연옥과 사이에 딸 혜정과 아들 길영을 낳았고, 백년설은 1963년 서울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은퇴공연을 끝으로 가수활동을 접었다.
197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민을 떠났으며, 투병 2년 후 1980년 12월 6일 65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미망인 심연옥은 현재 자녀들과 미국에 살고 있다. 백년설이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냉수마찰은 평생을 계속했고, 유도가 5단으로 단단한 체력이었지만 말년에 얻은 병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얼마 전 96세로 타계한 작사가 겸 가수 반야월 선생은 생전에 "백 선생은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여 너무 일찍 타계했다"고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