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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중학교 선생님의 詩, 「 봉선화」

Jimie 2024. 5. 25. 05:24

투병 중에도 절실히 시만 생각했던 시인 박재삼 


 
박재삼 시인(1933.04,10~1997.06.08)은 살아생전 제1시집 『춘향이 마음』(신구문화사.1962)을 비롯하여 시집 15권(시조집 1권 포함)과 8권의 시선집, 제1수필집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경미문화사, 1977) 등 9권의 수필집. 3권의 수필선집, 그리고 『바둑한담』을 남겼습니다.  
 
한빛 문학관에서는 시선집 『박재삼 시집』(범우사.1987)에서 연보를, 제2수필집 『빛과 소리의 풀밭』(고려원, 1978)과 차영한 한빛문학관장님의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삶의 흔적을 더듬어보고, 등단작을 중심으로 얘기해 볼까 합니다. 
 
박재삼 시인은 1933년 4월 10일 일본 도쿄부 미다미다마군 이나기촌 야노구치1004번지(日本 東京府 南多摩郡 稻城村 矢野口 1004番地)에서 아버지 박찬홍(朴瓚洪)과 어머니 김어지(金於之) 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1936년 7월(4세)에 가족과 함께 그의 어머니 고향인 삼천포 팔포 서금동(八浦 西錦洞)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아버지는 지게 품팔이를 하셨고 어머니는 도붓장사로 생선을 팔며 생계를 겨우 꾸려 나갑니다. 
 
한빛 문학관 차영한 관장님은 그의 연보에서 중요한 오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박재삼 시인 관련 현존하는 모든 시집에서, 아버지 성명을 박찬홍(朴贊洪) 즉, 도울 찬(贊), 넓을 홍(洪)이라고 이름을 밝혀두었는데, 실제 호적부를 대조한 결과 박찬홍(朴瓚洪) 즉, 제기 찬(瓚), 넓을 홍(洪)이었다고 하는군요. 
 
한빛 문학관 차영한 관장님은 스무살 청년 시절, 한 살 연상인 박재삼시인의 누이동생 박순애(朴順愛)와 친구였던 팔촌 누님을 따라, 그의 집을 한두 번 놀러 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장님의 기억으로는 바다를 등진 시내 쪽 방면 둘째 안골목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면, 길가 왼쪽에 대나무 사립문이 있었고 집은 대지 사십여 평 남짓한 초가삼간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박순애의 증언에 의하면 6.25 한국 전쟁 때, 불탄 집을 옛날 모습대로 다시 지었다고 했다는군요. 
 
박재삼 시인은 어릴 때 워낙 가난하여 야간 중학교에 다니면서, 낮에는 삼천포여자중학교에 급사로 일했습니다. 당시 그 학교에는 초정 김상옥 선생님이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골 중학 선생님의 시 「봉선화」가 교과서에 실려있는 것이 아주 대단하게 생각되었고, 선생님이 우러러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시집 초적(草笛)을 빌려 노트에 시를 베껴 쓰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군요.  
 
이후 그는 삼천포 고등학교를 2학년에 편입하여, 1953년에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박재삼 시인은 중학교 때 학비를 무료로 해 주었던 정현주 교장 선생님의 부산 집에 잠시 머무릅니다. 그때 간혹 바둑을 두러 들리던 조연현 선생을 뵈었다고 합니다. 박재삼 시인은 조연현 선생에게 시 네댓 편을 보여드렸는데, 그중 시조 「江물에서」가 ⟪문예⟫지(1953년 11월호)에 모윤숙 시인의 추천 작품으로 발표됩니다.  
 
江물에서/ 박재삼 
 
무거운 짐을 부리듯 
 
강물에 마음을 풀다 
 
오늘, 안타까이 
 
바란 것도 아닌데 
 
가만히 아지랑이가 솟아 
 
아득하여지는가. 
 
물오른 풀잎처럼 
 
새삼 느끼는 보람, 
 
꿈 같은 그 세월을 
 
아른아른 어찌 잊으랴, 
 
하도 한 햇살이 흘러 
 
눈이 절로 감기는데… 
 
그날을 돌아보는 
 
마음은 너그럽다. 
 
반짝이는 강물이사 
 
주름살도 아닌 것은, 
 
눈물이 아로새기는 
 
내 눈부신 자욱이여! -박재삼 시인의 「江물에서」-전문 
 
이 시를 읽어보면, 현실의 무거운 마음을 풀고 강물을 바라보니, 옛 생각에 마음이 아득해지는군요. 그런데 그토록 가난하고 힘겨웠던 세월이 돌아보면 강물처럼 반짝이는군요. 하지만 마음은 분명 너그러워지는데 눈물이 절로 고이는 이 아픔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 시는 시적 화자의 한(恨)을 전통적 가락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으로 읽힙니다.  
 
1954년 박재삼 시인은 서울로 상경하여, 은사 김상옥 선생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하게 됩니다. 창신동 꼭대기에서 친구와 자취생활을 하는데 가난은 여전히 발목을 잡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1955년 『현대문학』에 시조「섭리(攝理)」가 청마 유치환 선생의 추천으로, 시 「정적(靜寂)」이 미당 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공식 등단하게 됩니다.  
 
섭리(攝理)란 원래 기독교사상에서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을 말함인데요, 흔히, 자연의 섭리 즉 음양을 고르게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죠, 그런 의미에서 이 시도 겨울을 지나면서 봄을 맞는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을 가락에 담은 시조로 읽힙니다.  
 
바위는 바위로 더불어 반석(盤石)의 부피를 갖고 모질게 서로 악물고 있었다. 고운 살결이 서로 닿는, 또는 입을 맞출 때 같은 감촉(感觸)의 간극(間隙)이 마련되었다. 비로소 거기에서는 구천(九天)의 물이 스며나고 있었다. 아직 여울을 이루지는 않은, 그 스며나기 뿐인 물에서는 거품 같은 것이 일지 않았다. 
 
그 다음, 이 점경(點景)과 나와의 또한 압축된 정적(靜寂)의 간극(間隙)에서도 무엇인가 본연(本然)한 것이, 저 물 같은 것으로 스며나올 법도 한 일이나 그것을 미처 세심히 알아 차리기 전에 나는 이미 낭자한 새소리에 귀가 돌고 있었다. -박재삼 시인의 「정적(靜寂)」-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입맞춤처럼 맞물려 있는 바위틈에서 스며 나오는 물을 바라보고 있네요. 화자는 마치 없는 듯 있는 듯 스며 나오는 물과 바위의 간극을 생각 해 보네요. 
 
그리고 이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간극을 생각해 보며, 무언가 본연의 숙연함 같은 것이 스며 나올 법도 하다고 여기지만, 이내 화자는 세파에 쉽게 휩쓸리고 마는 인간인지라 낭자한 새소리에 귀가 돌고 있다고 말하네요. 이 시는 정적과 낭자한 새소리를 대비시켜 자연의 순리와 쉽게 변질하는 인간의 틈을 보여주는 시로 읽히네요. 박재삼 시인은 1959년 2월 ⟪사상계⟫에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울음이 타는 강」을 발표합니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춘향이 마음』(신구문화사.1962)에 수록됩니다. 
 
박재삼 시인의 시는 크게 ‘유년의 기억과 첫사랑의 추억’, ‘설화의 차용’, ‘자연모방의 정신’, 이렇게 세 가지 특징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삶의 애환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물’이라는 이미지를 생명의 근원으로 삼아, 우리 가락에 얹어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해안 지방의 구어체를 적절하게 섞어, 눈물 자국 위로 사랑과 슬픔을 한(恨)으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그의 문장은 단조롭지만, 진실이 묻어 있기에 다감하고 자상합니다. 어찌 보면 한국 전통적 서정의 기법을 고집스럽게 이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애절한 시인의 노래는 한빛 문학관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통영여행] 봉수로 토영이야기길 산책🐥걷기 좋은 따뜻한 동네골목(전혁림 미술관/한빛문학관)

 

 

울음이 타는 강/박재삼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 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자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한국 대표 명시 3, 빛샘]===
박재삼 시인(나무위키에서 발췌)
 
1933년 4월 10일 동경에서 출생하여 3살 때,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시 서금동 72번지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박재삼 시인의 아버지는 지게 노동으로, 어머니는 생선 행상으로 가족을 부양하였다고 한다. 1946년 수남초등학교를 졸업 후 3천 원이 없어 신설 삼천포중학교에 진학 하지 못하고 신문배달을 하던 중 삼천포여자중학교의 가사 담당 여선생의 도움으로 그 학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고 교장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947년 삼천포중학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여중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일하고 밤에는 수업을 들었다. 1948년 교내신문 “삼중(三中)” 창간호에 동요 ‘강아지’, 시조 ‘해인사’를 발표했다. 1949년에는 경영부진으로 야간중학교가 폐쇄되어 주간 중학교로 흡수되었는데 이때 야간 중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한 덕택에 학비를 면제받고 주간 중학교 학생이 되었다. 삼천포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조시인 김상옥에게 시를 배웠다고 한다. 제1회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 ‘한글 시 백일장'에서 시조 ’촉석루‘로 차상으로 입상했다. 1950년에는 김재섭, 김동일과 함께 동인지 『군상』을 펴냈다. 1951년 4년제 중학 졸업 후 삼천포고등학교 2년에 편입학 하였다. 1953년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 졸업(제1회) 한 후 피난지 부산 동광동에서 제2대 민의원이었고 중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정헌주(鄭憲住) 선생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했다고 한다. 1954년 은사 김상옥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 1955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997년 6월 8일 지병인 고혈압, 만성신부전으로 향년 64세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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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큰집에 모여
강가에 해지는 석양을 보는 것으로 시가 시작됩니다.
저녁놀은 하루의 끝무렵, 사랑 이야기를 합니다.
가을 강에 하소연합니다.
저것 봐 저것 봐 하면서
어쩌면 체념하는 마음이 더욱 아프게 하는군요.
또 박재삼 시인님의 성장 과정을 보며,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고학, 독학.....
고통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라지만 
아픔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아있습니다.
 
8월의 첫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름답고 고운 한 달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토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