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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과 나비 , 초정(艸丁) 김상옥 (金相沃)

Jimie 2024. 5. 25. 05:17

초정(艸丁) 김상옥 (金相沃)선생

김상옥(金相沃) 호는 초정 (艸丁·草汀·艸汀·草丁)


1920년  3월 15일 경상남도 통영시 함남동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시조(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낙엽)으로 등단하였다

2004년 10월 30일 :  26일 사망한 부인의 유택을 보고온 후 쓰러저

2004년 10월 31일  병원에서 별세하였다.향년 84세

 

초정 김상옥 선생은 1920년(또는 191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문학적 재능이 특출해, 1928년 동시 ‘삐비’를 지었다고 한다.  활자화된 최초 작품은 시조 ‘별을 노래함’(조선일보 1932년 3월 2일)이다.  시는 ‘무궁화’(‘아(芽)’), ‘모래알’과 ‘다방’(‘맥(貘)’ 1938년 10월과 12월)을 발표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27년 통영보통공립학교 입학하여 교지 『여황(艅艎)의 록(綠)』에 동시 「꿈」을 실었고, 1933년에 졸업하고 집안형편이 어려워 남강인쇄소 인쇄공이 되었다. 월사금이 없어 쫒겨 나서는 산으로 올라가 동요 「삐비」를 지었다.  1930∼35년 사이에 최초 시조동인지 『참새』 동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문학청년의 시절을 보냈다. 1936년 조연현과 함께 활동한 동인지 『아(芽)』에 「무궁화」를 발표하여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고  두만강 근처 함북 웅기로 유랑을 떠났다. 1938년 함북 청진 서점에서 일하면서 김용호, 함윤수 등과 『맥(貊)』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뒤에 임화, 서정주, 박남수, 윤곤강 등이 합류했다. 1939년『문장』지에 이병기의 추천으로 「봉선화」가 실렸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시조공모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1940년통영으로 귀향 남원서점을 경영하였고, 이 서점에 걸린 애국지사 이후의 우국시가 문제되어 통영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1942년에 삼천포로 피신하였다. 1945년 2월 일본헌병대의 검거 소식을 미리 알게 되어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윤이상과 함께 서울에서 피신하였다.

 

해방되던 해에 김춘수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조직 예술운동을 했으며, 11월삼천포문화동지회를 창립하여 한글운동, 교가 보급운동을 이끌었다. 1946년부터 20여 년 동안 부산,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47년 첫 시조집 『초적(草笛)』(수향서헌)의 편집, 조판, 인쇄 등을 직접했으며, 1949년 『고원(故園)의 곡(曲)』(성문사), 『이단의 시』(성문사)를 발표했다.  윤이상은 그의 시 「추천(鞦韆)」, 「봉선화」에 곡을 붙였다. 1952년에 동시집 『석류꽃』(현대사)을 출간하였다.  문교부편수국 심의위원을 지냈고, 1953년에 출간한 시집 『의상(衣裳)』(현대사)출판기념회에서 이중섭은 닭그림으로 축하를 보탰다. 1954년 충무공 이순신 시비건립을 주도했고 통영문인협회을 재건하고 『참새』지를 타블로이드판으로 복간했다. 1956년 시집 『목석의 노래』(청우출판사)출간, 1958년 동시집 『꽃속에 묻힌 집』(청우출판사)을 펴냈고, 1960년 『한국시단』 편집장을 맡았고 사회공로훈장을 받았다.

 

1963년 서울로 이주하여 골동품가게 아자방을 경영하였다. 1972년일본 도쿄에서 서화작품전을 개최하였고, 2000년대까지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73년 삼행시집 『삼행시육십오편』(아자방)을 펴냈고, 1975년 산문집 『시와 도자』(아자방)를 출간, 1980년 회갑기념시집 『묵을 갈다가』(창작과비평사)를 출간, 1983년 이호우와 함께 『한국현대문학대계』22를 저술했으며 1995년 동인지 『맥』을 재창간,  1998년 시집 『느티나무의 말』(상서각)을 출판하였다.

 

<상훈과 추모>

삼양문화상(1997), 보관문화훈장 거절(1995), 충무시문화상(1994), 중앙시조대상(1982)

노산문학상(1974)

 

<참고문헌>

『김상옥 시전집』(김상옥, 민영 엮음, 창작과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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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 1919. 11. 11. ~ 2016. 8. 27.김천 생) 시인은 평생 한국의 정형시인 시조만을 위해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정완영 시인을 통해 "이 당대, 시조 분야의 숭고한 순교자적 상(像)"(박경용)을 만난다. 시조를 말할 때 가람 이병기와 노산(鷺山) 이은상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초정(草汀) 김상옥, 이호우를 말하고, 그 뒤에 백수(白水) 정완영을 세워 말한다. "백랑도천(白浪滔天) 같은 분노도 산진수회처(山盡水廻處)의 석간수 같은 설움도 시조 3장에 다 담으셨다."(조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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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현대 문학의 거장들이 태어나고 활동한 문학의 도시다. 청마 유치환, 천재 시조시인 초정 김상옥, <>의 시인 김춘수,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 ‘마술의 펜이라 불리는 소설가 김용익 등 무수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백석, 정지용, 이영도 등 통영을 방문한 많은 작가들도 한려수도의 수려한 경관에 감탄했다. 이들에게 통영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자, 작품에 영감을 준 천혜의 자연을 품은 예술 공간이었다.

 

문화마당(윤선머리)-남망산 조각공원-김춘수 생가-김용식·김용익 기념관-세병관-충무고등공민학교(옛 통영여중)-충무교회(옛 문화유치원)-청마우체국-유치환 흉상-천부교회(옛 흑주교회)-김상옥 생가-김춘수 동상-새미집

 

 

 

초정 김상옥 시인 10주기 기념 시선집

풀꽃과 나비

 

 

                                                                                     통영예술의향기

초정 김상옥 선생과의 반세기                               

                                                                                     김재승(세동양행 대표, 해양대학교 겸임교수)

 

초정 김상옥 선생과의 반세기 인연

 

'봉선화'는 문장지(창간 1939년 2월)1권 9호(1939년 10월호)에 게재 되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표구점 아자방을 연 시기는 1963년 초봄이다. 

시조시인 이영도 여사가 쓴 "창원 성주사로 꽃구경을 가자"는 단아한 편지 한 장을 보관하고 있었다.

초정은 세 차례나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일본 경찰에 쫒기면서 유랑생활을 했다. 

 

12세에 쓴 동시 "꿈" 을  통영보통학교 프린트판 교지 <여황의 록>에 발표

14세 때인 1934년 금융조합 연합회 회보 공모전에 "제비" "연필" 등을 발표했다.  

통영보통학교 동급생 같은 반 친구 김용익은 미군정청 진해주둔 사령관 캐스턴 소령의 통역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꽃신, 뒤웅박등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두해 선배가 윤이상이고 두해 아래가 김춘수다.

 

초정의 민족정기 근원

1936년 독서회 사건으로 첫번째 투옥된 후 깜둥이 누나인 넷째 누님 김부금이 살고있는 함경도 두만강변으로 갔다. 통영 미결감에 면회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누님을 찾아 함경도 두만강변으로 갔다. 경부선-경원선-함경선-청진-나진,웅기의 변씨촌.

 

본격적인 시작詩作은 함경도 청진 "서수리"라는 동네다. 문장지(1939년 10월호)에 시조 봉선화, <동아일보> 1939년 11월 15일자 "낙엽" 발표.

 

누님의 죽음으로 1940년 통영으로 낙향. 항남동에서 "남원서점"을 열었다 낭산 이후의 우국시를 써 벽에 붙여 놓았다가 두번째로 체포됨.

 

1954년 남망산에 충무공 시비를 세움. 특히 건립 취지문은 명문으로 알려짐(노산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없는 말이라고 극찬함)

1994년 5월 진해 김구선생 글씨 비석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보러와서 해군사관학교에 글씨를 써줌(낙관을 붉은 볼펜으로 새김)

 

윤이상과의 특별한 인연

 

윤이상은 부산 대연동 '남광 보육원' 원장역임. 동아대학교 교가 작곡. 작사는 초정.

서울에서 함께 도피생활을 할 때 일본 패망 소식을 듣고 김상옥을 찾아옴.

해방후 삼천포-통영으로 귀환. 이때 각급 학교의 교가를 지어줌.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후 풀려난 윤이상에게 백자 항아리에 정원의 흙을 담아주며 

"고국의 흙으로 빚은 항아리에다 고국의 흙을 담았으니 고국이 생각나면 보라" 고 했다. 

월간 중앙 1989년 2월호에 기고글 '윤이상과의 교유기'에서 시인 이영도 여사의 기지로 윤이상의 사상 서적을 물동이에 담아 내와 가택 수색에서 일경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사연, 그와 함께 일본 헌병대를 피해 서울로 와서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던 이야기가 회상되어있다. 

 

예인의 행보

1952년 통영으로 온 이중섭과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1953년 시집 '의상'출판 기념회에 초대되어 술잔을 기울이던 이중섭은 다음날 찾아와 "나는 돈이 없어 축하금을 낼 수 없어 그림으로 가져왔다" 하며 닭 한 마리가 꽃 한 송이를 물고 있고, 오른편에는 게와 꽃잎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당시 통영시장이던 김기섭 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팔아 주었다. 

 

수상은 1974년 노산 시조문학상, 통영시 문화상, 삼양문화상, 중앙시조대상,  수상거부는 육당 문학상, 문화훈장 보관장. 

 

2004년 10월 31일 향년 85세로 별세(부인은 10월 26일 별세함)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 5일만에 죽음.

 

1945년 2월 삼천포에서 서울로 피신 하면서 청도의 이호우의 집에서 보름간 숨어 지냄.

시조시인 이영도가 윤이상의 사상 서적 숨긴 사연.

이영도 여사가 보낸 편지 내용 "창원 성주사로 꽃구경 가자' 라는 편지.

 

사향思鄕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白楊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시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봉선화

 

비오자 장독대 봉선화 반만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맘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2015.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