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아침숲길] 봉선화 꽃물 들이며

Jimie 2024. 5. 25. 05:15

초정(草汀) 김상옥 (金相沃)선생

 

김상옥(金相沃) 호는 초정 (草汀)

1920년  3월 15일 경상남도 통영시 함남동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시조(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낙엽)으로 등단하였다

2004년 10월 30일 :  26일 사망한 부인의 유택을 보고온 후 쓰러저

2004년 10월 31일  병원에서 별세하였다.향년84세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 1919. 11. 11. ~ 2016. 8. 27.김천 생) 시인은 평생 한국의 정형시인 시조만을 위해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정완영 시인을 통해 "이 당대, 시조 분야의 숭고한 순교자적 상(像)"(박경용)을 만난다. 시조를 말할 때 가람 이병기와 노산(鷺山) 이은상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초정(草汀) 김상옥, 이호우[李鎬雨,호는 이호우(爾豪愚) ]를 말하고, 그 뒤에 백수(白水) 정완영을 세워 말한다. "백랑도천(白浪滔天) 같은 분노도 산진수회처(山盡水廻處)의 석간수 같은 설움도 시조 3장에 다 담으셨다."(조오현) 

 

***

이호우[李鎬雨1912~1970]의 본관은 경주(慶州). 아호는 본명에서 취음하여 이호우(爾豪愚)라 하였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 아버지는 이종수(李鐘洙), 어머니는 구봉래(具鳳來)이며,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1916~1976)는 그의 누이 동생이다.

 

[아침숲길] 봉선화 꽃물 들이며

국제신문 | 2022.07.26 19:08

 

올해도 박 시인의 시골집에 봉선화가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왔다. 한 시간의 거리를 단숨에 달렸다. 연분홍 다홍 보라 하얀빛의 봉선화가 나를 맞는다. 작년,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자연 발화하여 무더기로 자란 어린 봉선화를 일정한 간격으로 옮겨 심어 더욱 튼실하다. 대 아래쪽엔 벌써 붉은 물이 올랐다. 올해는 장독대 주변이 온통 봉선화밭이다. 장독의 짙은 빛깔에 무성한 초록 잎, 그리고 점점이 박힌 꽃의 색깔, 그 조화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매년 봉선화를 가꾸고 꽃이 피면 불러주는 박 시인의 정성이 내 마음에 꽃물을 들인다. 굳이 봉황을 닮은 꽃이라는 그 이름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봉선화는 내 어린 시절과 함께 핀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김상옥의 시조 ‘봉선화’)

 
아버지는 마당에 봉선화를 심고 아침마다 내게 물을 주게 하셨다. 언니와 나는 봉선화를 따서 손톱에 물을 들였다가 아버지께 혼이 났다. ‘꽃도 생명이다. 꺾으면 아프다’는 아버지의 철학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고 예쁜 손톱을 가지고픈 딸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다. 매니큐어가 귀했던 시절이었다. 그 후 언니와 나는 꽃잎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려 꽃물을 들였고 간혹 아버지 몰래 꽃을 따놓고 꽃이 진 것처럼 시치미를 떼기도 했다. 그걸 또 눈감아 주셨던 아버지다.

초정 김상옥은 봉선화를 통해 시집간 누님을 그렸지만 나는 봉선화에서 아버지를 기억한다. 박 시인의 텃밭에서 봉선화 꽃잎을 딸 때 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미안해, 오래도록 보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내 손이 조심스럽다.

초록 잎 몇 장, 각양각색의 꽃잎 여러 장, 거기에 백반을 조금 넣고 빻아 손톱에 올린다. 일회용 비닐장갑을 잘라 손가락을 감싸고 실로 친친 동여매면 손톱보다 손가락에 붉은 물이 먼저 든다. 그 상태로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봉선화 꽃물 들이는 날은 늘 잠을 설친다. 동여맨 실을 푸는 아침은 설렌다.

이런 번거로운 일을 연이어 두 번은 해야 손톱에 예쁜 꽃물이 든다. 물론 손가락에 든 붉은 물을 한동안 감내해야 한다. 손톱이 조금씩 자라면 손가락의 붉은 물도 점점 옅어지고 어느새 온전히 손톱에 봉선화 꽃물이 예쁘게 앉는다. 그때부터 손톱 깎기가 아쉽다.
 
딸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 기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바꿀 수 있는 매니큐어가 있는데 왜 굳이 한번 물들면 지울 수 없는 봉선화 꽃물을 매년 고집하느냐고 묻는다. 디지털시대를 넘어 AI시대에 아날로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단점이 장점이 된다. 한번 꽃물이 들면 벗겨질 염려가 없다. 손톱이 자랄 때까지 오래도록 한결같은 색이 유지된다. 화학약품이 아니라서 음식을 하는 데 걱정이 없다.


요즘 ‘네일 아트’가 성행이다. 손톱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보석을 달기도 하고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단순히 매니큐어를 바르는 시대에서 이제 꾸미는, 아니 손톱에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아트의 경지에 이르렀다.

빠르고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것도 좋지만 느린 것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봉선화 꽃물은 나만의 ‘네일 아트’이다. 내가 매년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이는 것은 아버지와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금이 간 손톱으로 밤낮없이 벗기셨다/한 움큼 고구마 줄기 명줄처럼 붙잡고/자줏빛 천연 염색을 한/울 어머니 네일 아트” (황영숙의 시조 ‘네일 아트’)

내가 내 어머니 세대의 자줏빛 네일 아트를 기억하듯 먼 훗날 내 아이들도 봉선화 꽃물로 나를 기억해 주면 좋겠다.

정희경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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