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烏江과 項羽
항우(項羽)를 향한 오롯한 사랑... 우희(虞姬)의 한, 개양귀비꽃(虞美人草)
우미인 (虞美人, Yu Meijen , ? ~ 기원전 202년?) (병). Yu Meiren. (웨). Y Meijen
이름은 우희(虞姬), 초나라 때 인물로, 항우의 애첩이며,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손꼽힌다.
사면초가에서 항우는,역발산기개세를 노래한다. 항우가 마지막 술잔을 들며 우미인을 걱정하는 시를,,,
힘은 산을 뽑을 만큼 강하고 기개 역시 천하를 덮을 만한데
운이 따라주지 않고 추도 달리지를 않는구나
추마저 달리지를 않으니 어찌하여야 하는가
우여, 우여 당신은 또 어찌하여야 할꼬
항우를 바라보는 눈에 이슬이 촉촉히 맺힌 우미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여 결심을 굳히고 노래한다.
그 넓은 모든 땅을 한나라에 빼앗기고
사면 모든 곳에서 초나라 노랫소리 들려오네
내 사랑 대왕님의 의기가 모두 소진되었으니
내 살아서 짐이 되면 어찌할꼬
사면초가의 사랑하는 님을 위한 노래를 마치고 일어서 작은 칼을 꺼내 순식간에 자결을 하였다.
우미인 없는 세상에 혼자 살아 무엇하겠나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 떠난 이곳에
내 무슨 미련이 있으리오
내 그대와 함께 하리니 그대 기다려주오
붉은 석양이 타오르던 강가에서
그대와 손잡고 함께 걷던 그곳으로
내 그대와 영원히 함께하리라
초봄 바람에 바삭이는 갈대의 속삭임
철새들이 흐드러지게 하늘에서 춤추듯
나도 그대 찾아 영혼의 날개짓 비상하리니
항우는 그렇게 우미인 곁으로 갔다.
훗날 우미인의 무덤에는 예쁘고 가녀린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불렀다.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은 용문(龍門), 지금의 산시성 (섬서성) (Shaanxi, 陝西省) 한청(韓城)시 지천진(芝川鎭) 태생이다.
백성의 힘이 역사의 본류임을 강조한 사마천 의 '사기(史記) '는 불멸의 역사서이다.
'사기'는 12본기(本紀), 30세가(世家), 70열전(列傳), 8서(書), 10표(表) 등 모두 130편으로 구성돼 있는데 52만6500자라고 자신이 말하고 있다.
왕조나 황제의 기록은 수백 년에서 수십 년의 실록인데, 이것이 본기(本紀) 이다.
그러나 항우(項羽, BC232~BC202)는 나이 삼십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활동한 시기는 8년 밖에 되지 않는데도 황제 반열에 올려 "항우본기(項羽本紀) "를 기록했다. "천하를 쪼개어 왕과 후를 봉하니 항우로부터 정치적 권력이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그 시대와 공간을 이끈 세력을 가진 사람은 천명과 통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초와 한의 5년간의 대전을 유방과 함께 선도적으로 지배한 항우는 황제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마천은 왜 항우의 최후를 그토록 영웅적이면서 인간적으로 애절하게 기술하고 있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첫째, 수년에 걸친 유방과의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동정해 유방에게 단판승부를 청하는 모습은 비록 투박하지만 영웅답고 그 의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보았다.
둘째, 해하(垓下) 전투에서 패해 쫓기는데 오강(烏江)을 지키는 관리가 배 한 척을 가지고 와서 항우에게 고향인 강동으로 가기를 청했다. 이에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서 뭘 하겠는가? 또 내가 강동 젊은이 8000여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받아준다고 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나! 설사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나!"라며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이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앙모해 사당을 세우고 향을 사르며 제사를 올리는 장군은 삼국시대 의리로서 천하를 감동시킨 관우, 남송시대 흔들림 없는 충성으로 천하를 울린 악비, 난세의 영웅이었지만 교활한 유방에 비하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후덕했던 항우뿐이다.
그래서 후세의 시인과 작가들은 유방의 이야기는 뒷전이고 너도나도 항우를 소재로 작품을 지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직책인 태사령을 물려받아 태사공서를 집필하던 도중,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하자 한무제 《태사공서》가 사기(史記)다.
하일절구(夏日絶句)
이청조(李淸照, 1084~1155)
오강(烏江)
生當作人傑 살아생전에는 세상의 호걸이 되고
死亦爲鬼雄 죽어서도 귀신의 영웅이 되었네
至今思項羽 이제 항우를 사모하는 것은
不肯過江東 강동으로 건너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
不 肯 過 江 東
(肯..즐기다 ,옳이 여기다)
강동을 건너감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강동으로 건너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 .
오강은 안휘성 화현(和縣) 동북에 있는 강으로 초(楚) 왕 항우가 자결한 곳이다. 항우가 한의 추격군에 쫓겨 오강포(烏江浦)에 이르렀을 때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타고 강동(江東)으로 가서 재기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는 강동의 젊은이 8천 명을 다 잃었으니 그 부형들을 볼 낯이 없다 하여 거절하고, 백병전을 벌이다가 자결하였다.
이 시는 부패했던 송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휘종(徽宗, 재위 1101~1125)과 그 아들 흠종(欽宗, 재위 1126), 그리고 그 권속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나 뒤를 이은 고종(高宗, 재위 1127~1162)은 싸울 의지마저 잃고 항주로 천도하는 상황에서 애국심과 투지가 없는 현실을 개탄한 감동적인 작품이다.
이청조(李淸照)라는 송나라 때 여류시인이 지은 하일절구(夏日絶句)..
이청조[李淸照, Li Ch'ingchao] (병)Li Qingzhao (웨)Li Ch'ingchao. 1081 중국 산둥 성[山東省] 지난[濟南]~1150경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
이 시는 초 패왕(楚 覇王) 항우(項羽)라는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삼아 비분의 심정을 노래했다고 해석되는 시.
한나라 유방에게 대패한 후, 오강을 건너 고향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를 도모하지 않고, 자결한 항우의 기개를 칭송..
이는 구차하게 연명해 나가고 있는 나약한 남송(南宋)의 타협주의와 굴욕적 행동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청조(李淸照 ;1081~1141?)란 여인은
호(號)가 이안거사(易安居士) 또는 수옥(漱玉)으로 산동 제남 사람..
*漱玉; 빨래할 수, 구슬옥
그녀의 아버지는 예부시랑을 지낸 이격비이고, 어머니는 북송 장원왕 공진의 손녀로 시문에 능했다고...가정환경이 이러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미모까지 겸비한 이청조는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가득한 가정에서 견실한 문학적 기초를 다졌다..
21세 되던 해, 재상이던 조정지의 아들 조명성과 결혼하여 서로 시(詩)와 사(詞)를 지으면서 골동품을 수집하고, 고대금석문을 연구하는 등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그 무렵에 이청조가 지은 시와 사는 모두 젊은 날의 행복이 솟아나는 듯 매우 경쾌한 음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금석문을 연구하는 사람의 아내로 남편을 도와서 금석록을 완성을 하고 남편과 사별하고 유랑을 하며 고초를 겪으면서 살았다 한다.
오강(烏江)과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項羽)
[ 史記 . 項羽本紀 ]
項羽(前232年-前202年),名籍,字羽,以字行 ,楚国下相(今江蘇省宿遷市)人,
항우(項羽,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02년)
Xiang Yu
저 오강을 건너 강동으로 들어가면 유방에 대패하였으나 다시 재기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텐데 끝내 항우는 오강을 건너지 않고 자결함으로써 하늘 아래는 유방이라는 한 인걸로 천하를 다스릴수가 있게 되었으니 ,,,,,
결과적으로 당시 중국 땅덩어리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게 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도모할수 있게 한 결과 항우는 죽어서도 귀신들 중에 영웅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 시대를 맞아 호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진시황의 폭정으로 그가 죽은뒤 중국은 4분 5열되고 말았는데 그때 의병군들 중에 유명한 두 장수가 있었으니 항우와 유방이었다.
항우와 유방이 진나라 군을 상대로 수없이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
결국은 같은 의병군들중에서도 유방과 항우가 또 천하의 패자의 자리를 놓고 불꽃튀는 전쟁을 치루지 않을수가 없었으니 초한지의 두 주인공으로 유방과 항우가 등장한다.
본래 항우가 월등이 전력상 더 나은 상태였다.
유방이 항우를 넘어 뜨리고 한나라를 세울수 있었던 것은 유방의 강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처세술 때문이었다 한다.
유방은 그야말로 시장바닥에서 술이나 마시고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세상살아가는 처세술을 터득했던 바, 그에겐 마침내 그를 돕는 참모들이 속속 모여들어 좌우에 가득해 지고 그들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할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본래 한신 장군도 항우진영의 장수였는데 항우는 한신의 뛰어난 전술전략을 알아주지 아니하고 그를 크게 쓰지 않자 끝내 유방에게로 넘어가니 유방은 한신을 참모로 받아들이며 그로 부터 유방의 진영은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 되었다.
또 항우의 참모 중에 범증이란 유명한 천하의 책략가가 있었는데 이 범증마져도 죽여 버린 항우이었고 보면 마침내 항우는 그 전세가 기울어가고 유방은 날로 그 세력이 커져 갔으니 유방의 천하통일은 기약된 것이었다.
그런 유방과 대적하여, 너무 완벽하여 자기 자신 밖에 몰랐던 항우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던들 어이 이길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항우는 명장이다.
70전 70승, 진나라 군사들을 상대로 포악한 진나라 황권을 무너뜨리는데는 천하 명장이었으나
유방과의 전술전략에서는 따를수가 없었으니 마침내 오강에서 마지막결전을 치루고 그는 자결하고
말았다.
저 오강만 건너가면 강동땅이 나오고 그곳에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항우를 맞이 하여 줄것인데 ,,, 그곳에서 다시 유방과의 회심의 결전을 치룰수 있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하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으니 ,,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지 오래되고 민생은 파탄에 이르렀는데 다시 항우를 믿어주고 천금같은 아들을 군사로 내어줄 백성들이 그 얼마나 되겠느뇨.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유방에게 넘겨주고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강동으로 ,,,,,,,도망가지 않고 장렬하게 최후를 장식한 천하장수 항우!!!
여류 시인이 평생을 연구하여 써 놓은 금석학도 침략자 금나라에게 다 빼앗기고 나라 잃은 슬픔을 몸소 다 겪었으니, 이 청조는 남송이 금나라로 부터 옛땅을 회복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일념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남송조정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려하기는 커녕 어느새 평화에 길들여진 위정자들이었고보면 항우장수의 기개가 왜 아니 그리웠으랴.
한 여류시객의 시이지만 오강(烏江)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의 아픔을 생각했던 애국지사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우국충정의 애국시인가 한다.
영웅, 항우(項羽).
살아서도 영웅, 죽어서도 영웅,,
역발산 기개세 초패왕(楚 覇王) 항우(項羽)장수 그 이름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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