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維新回天の風雲兒

Jimie 2024. 5. 17. 02:15

維新回天の風雲兒

Jimie 2020. 6. 30. 06:17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에도 시대의 영웅

 

坂本龍馬

(사카모토 료마)

유신회천(維新回天)의 풍운아(風雲兒)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중에 항상 1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의 생애는 너무도 짧고 굵고 간단하다

탄신일과 암살당한 날이 같아서 꼭 31년의 짧은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사심없이 근대국가 일본의 초석을 놓으려

유신회천에 목숨을 건(維新回天 命を賭け賭けた......)革命家,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꽃피운 일본개화기 풍운의 무사정객

 

 

坂本龍馬[さかもと りょうま;天保6年(1836) 11月15日- 慶応3年(1867)11月15日]

 

(1836.11.15 ~1867.11.15)

維新回天の英傑 坂本龍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에도 시대(江戶時代)에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로 열어 일본을 개화시킨 혁명가로 이른바 유신회천(維新回天)의 풍운아다. 일본이 쇄국 정책을 행하면서 우라가(浦賀, 현 카나가와현 쿠리하마)에 쿠로후네(黑船, 서양 배)가 내항한 후부터 막부(幕府;정부를 집행하던 곳)가 점점 약체화되어 간 시대였다.

 

당시 막부로부터 감시의 대상으로 몰려있으면서 견원지간이었던 사츠마 번(薩摩藩, 현 카고사마현)과 쵸슈 번(長州藩, 현 야마구치현) 사이에 들어 삿쵸 동맹(薩長同盟)을 체결시키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사람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인 것이다.

1835년 11월 15일, 그는 토사 번(土佐藩, 현 코우치현)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공부도 잘 못 해서 선생님이 포기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19살 때 에도로 올라가 검술을 배우며,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개국에 반대하여 외국을 배제하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조정의 힘을 빌려 막부를 재건하려는 <공무합체(公武合體)> 두 가지의 사상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존왕양이(尊王攘夷)>는 쵸슈 번, <공무합체(公武合體)>는 사츠마 번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막부나 번말고 ‘일본이란 나라’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한다!“

 

페리 내항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시대. 당시 존왕양이 파였던 료마는 일본이 외국이 시키 대로 행동하고 있는 원인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카츠 카이슈(勝海舟)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그를 죽이러 가지만 반대로 그의 "일본은 외국의 발달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 는 이야기로 계발되어 그 후 료마는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 후 카츠의 영향을 받아 해운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게된 료마는 해운 무역 회사 가메야마조합「龜山社中(후에는 海援隊)」를 설립하게 된다.

서로 대립하는 사츠마 번과 쵸슈 번이었지만 료마와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들 양자를 체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龜山社中를 통해 당시 막부로부터 무기 수입이 금지되어 있던 쵸슈에는 사츠마에서 무기를, 쌀이 부족하던 사츠마에는 쵸슈에서 쌀을 지급시키는 것으로 삿쵸 동맹을 체결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막부를 쓰러뜨리기 위해 양자가 한 공동체가 되며, 그 다음에는 막부와 각 번을 하나로 하기 위해 정권을 막부에서부터 조정으로 반환시킬 <타이세이 호칸(大政奉還)>을 추진하였다.



<타이세이 호칸(大政奉還)>의 한 달 뒤인 1867년 11월15일 그는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에 있는 오우미야(近江屋)에서 암살 당하였다. 그 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맞이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그의 큰 특징은 양이 파, 개국 파 등 사상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과 접한 것이다. 그는 통일성이 없었던 일본을 한 국가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넓은 시야를 지니며 원활하게 정권 교체를 실현시킨 사카모토 료마. 그의 외교적 수완은 높은 평가를 받아 일본인에게 No.1의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도 매년 11월15일에는 교토에서 위령제가 행되며 전국에서 많은 료마 팬들이 모여온다.

 

 

大政奉還 (たいせいほうかん)

慶応3年(1867)10月14日、15代将軍徳川慶喜は、朝廷に大政奉還を行います。

* 徳川慶喜とくがわよしのぶ]、政治つかさどる権利朝廷ちょうてい]に返したことを言います。これによって、鎌倉時代から続いた武士の時代終わりになります

 

 

 

船中八策(せんちゅうはっさく) 宣言碑

坂本龍馬 船中八策宣言の碑(京都嵐山)

 

「船中八策」とは、1867年(慶応3年)6月9日、長崎から京都へ向かう藩船「夕顔丸」の船中で、龍馬さんが、一緒にいた後藤象二郎氏(土佐藩参政)に示した、新しい国家思想です。

同じく一緒にいた、海援隊書司・長岡謙吉氏がそれを書き留め、文章化したと言われています。

 

*船中八策の原文*

一策 天下ノ政権ヲ朝廷ニ奉還セシメ、政令宜シク朝廷ヨリ出ヅベキ事二策 上下議政局ヲ設ケ、議員ヲ置キテ万機ヲ参賛セシメ、万機宜シク公議ニ決スベキ事三策 有材ノ公卿諸侯及天下ノ人材ヲ顧問ニ備ヘ、官爵ヲ賜ヒ、宜シク従来有名無実ノ、官ヲ除クベキ事四策 外国ノ交際広ク公議ヲ採リ、新ニ至当ノ規約ヲ立ツベキ事五策 古来ノ律令ヲ折衷シ、新ニ無窮ノ大典ヲ撰定スベキ事六策 海軍宜シク拡張スベキ事七策 御親兵ヲ置キ、帝都ヲ守護セシムベキ事八策 金銀物貨宜シク外国ト平均ノ法ヲ設クベキ事

 

 

龍馬 船中八策 手稿

船中八策(せんちゅうはっさく)は、土佐藩脱藩志士坂本龍馬江戸時代末期(幕末)の慶応3年(1867年)に起草した新国家体制の基本方針とされるものの俗称。後世の創作である、という説が有力である。

 

 

오미야 사건(近江屋事件)

오미야 사건(近江屋事件)은 게이오 3년 11월 15일(1867년 12월 10일)에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교토 가와라 마을(河原町) 오미야(近江屋), 이구치 신스케(井口新助)의 저택에서 암살된 사건을 말한다. 교토 미마와리구미 의 소행이라 여겨지고 있다.

 

료마는 여태까지 숙소로 하고 있던 데라다야 막부 에 찍혔기 때문에, 11월 3일에 오미야로 옮겼다. 11월 13일, 이토 가시타로가 찾아와, 신센구미 가 노리고 있으니 도사 번 저택으로 옮기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료마는 당일 감기가 걸려 오미야에 머물렀다.

11월 15일, 저녁 무렵에 나가오카가 오미야를 방문, 산조 제찰 사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밤이 되어 손님이 오미야를 방문, 토쓰카와 고시(十津川鄕士)라고 신분을 말하고 료마를 만나고 싶다 하였다. 씨름꾼이었던 야마다 도키치(山田藤吉)는 손님을 료마에게 만나게 하려 하였지만 뒤에서 베이고 만다.(하루 뒤 사망)

 

이 때, “으악!! (ぎゃあ!!)”하고 큰소리를 낸 야마다에게 료마는 “ほたえな!(도사 사투리로 ‘떠들지 말라’라는 의미)”라고 말해, 자객에게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게 된다. 자객은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장지문을 열어 방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료마는 이마를 베였다. 료마는 몽롱한 의식 중, 나카오카의 정체가 들킬 것을 염려하여 나카오카를 “이시카와, 칼은 없는가.”라고 가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료마는 흉부 등 수 군데를 베여 결국 사망. 나카오카는 살아남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틀 후에 구토가 일어난 뒤 사망하였다.

 

메이지4년(1871년) 8월 20일에 료마의 핏줄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천황의 명에 의해 누나인 치즈루의 장남

다카마츠 타로가 '사카모토 나오'로서 료마의 뒤를 이음.

 坂本龍馬像は台座込みの高さ13.5m、龍馬像のみでも5.3mと予想以上にでかい!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금속공출에도 이 동상만은 공출을 면한다.

 

高知市 . 桂浜と坂本龍馬像 

 

 桂浜は浦戸湾の入り江に面した長さ500mほどの小さな砂浜で、大きく弧を描くように伸びる砂浜の美しさや坂本龍馬像が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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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本龍馬(Sakamoto Ryoma) (1836.11.15 ~1867.11.15)

幕末의 志士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말기의 존왕파 지사(志士).

 

 

바쿠후말(幕末)의 유신지사. 도사한 출생. 정식이름은 나오나리(直柔, 이전에는 나오카게 直陰). 제일 낮은 사무라이 계급(카시, 下士) 출신이다. 바쿠후를 조정에 권력을 반납시키는 사건인 일명 대정봉환의 구상을 제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바 료타로에 의해 전면적으로 역사에 떠오른 인물.

 

1836년, 1월 3일(일력은 1836년 11월 5일)에 현재의 고치현 고치시인 도사한의 사카모토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공부에 관해선 소질이 없었는지 선생에게서도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거기다 겁도 많은데다 행동도 또래아이들보다 다소 뒤떨어져 거의 집안에서 내쳐진 자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료마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누나 오토메가 그를 검도를 배우게 하였는데 검술에 관해서는 천재적 소질이 있었는지 커서는 도쿄로 검술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될 정도였다. 이 검술은 료마의 성품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켰으며 또한 소질까지 있어 훗날 검술대회에서 우승까지 할 정도였다.

 

1846년, 어머니 사치(幸)가 사망했다.

1847년, 쿠스야마(楠山塾)쥬쿠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나 친구와 심하게 다투어 퇴학당하였다.

1848년, 고치성 아래의 히네노벤지(日根野弁治)의 도장에 입문하였다. 하급무사가 배우는 오구리류 병법을 익혔다.

 

1853년

3월, 히네노 벤지에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을 하사 받았다.

4월, 에도로 지바사다키치가 가르치는 후쿠신잇토류란 검술을 배우러 가게 된다. 이 검술유학은 료마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당시 도사한 이외에도 많은 한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에도로 검술 유학을 보냈기 때문에 근처 도장에서 젊은 엘리트 층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다른 도장에서 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렌베이칸의 가쓰라 코고로(훗날의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등이 있었다.

 

6월 3일, 페리가 쿠로후네라 불리는 배4척을 이끌고 일본의 에도근처 바다에서 통상을 강요한 일명 ‘흑선내항’이라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검술을수업 마치고 도사한에 돌아와 검술외엔 사실 정치쪽에는 소양이 없으리라던 그가 손노조이(尊王攘夷)와 바쿠후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본격적인 운동을 한 것을 볼 때 분명 이 사건은 어느정도의 계기로는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6월 22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가 사망했다.

11월 23일,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 가 쇼군선지를 받았다.

12월, 사쿠마쇼잔의 사숙에 다녔다.

 

1854년, 6월 23일에 검술수업을 마치고 도사로 귀환하였다. 도사에서 가와다 쇼류로부터 서양사정에 대해 배우게 된다.

1855년, 12월 4일 에 아버지 핫페이(八平)가 사망하였다.

 

1856년 8월 다시 에도로 검술수업을 받기 위하여 상경했다.

9월 에도에 도착하였다.

 

1857년, 밤에 주운 시계를 팔아먹으려다 불법이 되는 바람에 할복 상태에 놓은 사와베 타쿠마를 탈출시키는데 협조했다.

 

1858년 1월 치바 사다키치에게 후쿠신잇토류의 면허를 받은 뒤 검술수행을 끝내고 에도로 돌아왔다.

11월 미토 한시(藩士)와 대면하였다.

 

1861년 3월, 4일 에 이쿠치무라 칼상처 사건이 발생한다. 상급무사의 편만 든 한의 행동은 료마를 리더로하는 하급무사층을 분개시켜 도사근왕당을 결성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친우 다케치 즈이잔이 이끄는 도사근왕당에 가담. 그러나 적극적인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10월, 다케치의 밀사로 죠슈에 파견되었다.

 

1862년 2월, 구사카 겐즈이를 만났다.

3월, 24일에 사와무라 소노죠와 함께 도사한을 탈번하였다. 신분이 들킬 것을 염려하여 사이타니 우메타로라는 가명을 썼다. 탈번하여 에도에서 평생의 스승인 가쓰 가이슈를 대면. 그의 견식에 탄복하며 제자로 들어갔다. 바쿠후가 설립한 코베의 해군조련소에 들어가 설립에 참여하는 등 어느 정도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 시절은 료마가 해군을 중심으로 한 사설 무력집단을 건설할 결심을 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8월 18일의 정변을 계기로 해군조련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긴 기간동안 활동하지는 못했다.

 

1863년, 가쓰 가이슈의 소개로 정한론으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도움으로 사쓰마한의 보호아래 놓이게 된다.

 

1865년

1.카메야마 조합-사쓰마한의 도움으로 카이엔타이라 불리는 카메야마 조합을 설립하여 물산 무기 무역업을 하려 했으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무역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활동은 하지 못했고 주로 정치활동을 했다.

2.고위인사와의 만남-이 해에 마쓰다이라 슌카쿠를 알현하고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탈번의 죄를 용서받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3.다케치 한페이타 할복-윤5월 11일(양력 7월 3일)에 다케치 즈이잔이 군주에 대해 불경의 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할복하였다.

 

1866년 1월, 교토에 도착한 기도 다카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아 동맹이 진전되지 않은 걸 알고는 사이고를 책망하였다. 사이고는 료마의 질책을 듣고 떠나려는 기도를 붙잡았고 1월 21일(日歷) 마침내 시마즈가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모리가의 기도 다카요시간의 사이를 주선하여 조슈와 싸스마간의 동맹을 맺게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삿초동맹으로 그 당시 료마가 사쓰마한의 보호아래 놓여져 있었기에 사쓰마한에 의해 움직여진 것으로 하나 사실은 어쨌든 간에 대정봉환과 더불어 료마 최대의 공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1월 23일(日歷)에 데라다야로 막부측 집단이 습격을 하자 료마의 애인인 료가 알몸으로 료마에게 달려가 위험을 알려 여관밖으로 대피하게 했다는 로맨스로도 유명한 사건인 데랴다야 사건 발발, 이는 삿초에게 바쿠후 공격의 명분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된다.

 

1867년 1월, 13일 에 도사한 산세이(土佐藩参政) 고토쇼지로와 회담을 가졌다.

3월(日曆 2월), 도사한으로부터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탈번죄를 용서받았다.

4월, 초에 가메야마 사츄를 카이엔타이(海援隊)로 개편하였다.

 

6월 22일, 삿도맹약(薩土盟約)을 주선하였다.

자신이 죽는 이 마지막 해에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내고 만다. 선중팔책(船中八策, 배안에서 구상한 8가지 계책이란 것으로 국가의 기관, 정체(政體), 정책(政策) 등 다양한 요소에 대해 설명한 계책)이라 불리는 정부일원화와 바쿠후의 권력반환을 중심으로 한 계책을 고토 쇼지로 등의 도움을 얻어 도사의 실권자인 전 한슈 야마우치 요도에게 제안하였다. 한슈는 그 당시 사쓰마와 조슈의 갑작스런 득세를 견제하고 아직 미약한 유신세력의 순조로운 혁명 그리고 바쿠후의 보존을 위해 교토쇼지로의 의견(실질적으로는 료마의 구상)을 받아들이고는 이 계책을 신하인 로쥬 이다쿠라 가쓰키요를 통해 바쿠후에 제안한다. 바쿠후는 이런 요도의 제안을 그럴 듯 하게 여겨 권력을 반환하더라도 권력이 합치된 조정내에서 다수의 세력을 확보하여 일본내의 패권을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요도의 진언을 받아들여 마침내 바쿠후의 권력을 조정에 11월 9일(양력, 日曆 10월 14이)에 반환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이호칸)이다. 그 후 신정부 내각의 구성을 논의하며 지내다 11월 15일(양력) 자객에 의해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암살당했다. 향년31세.

 

明治維新の志士を始め 坂本龍馬の眠る墓

 

坂本龍馬の墓.京都

 

소년시절 무예훈련(특히 검술)에 열중하여 1853~54, 1856~58년에 에도의 지바 슈사쿠[千葉周作] 도장에서 수련을 쌓았다. 그곳에서 서구와의 조약체결과 쇼군[將軍] 계사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끊임없는 정쟁을 목격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하는 양이론자(攘夷論者)가 되어 도사로 돌아와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참여했다.

1862년 다시 에도로 가서 개국론의 옹호자로 알려진 가쓰 가이슈 [勝海舟]를 암살하고자 했으나, 군비부족상태에서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서양에 대항할 만한 군비를 갖추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설명한 가쓰에게 설득되었다. 1864년 가쓰가 창립한 해군조련소에 그의 부관으로 입소했으며, 가쓰를 통해 새로운 정치형태에 대한 구상을 듣는 등 식견을 넓혔다. 그러나 같은 해 가쓰가 파면되자, 사쓰마 한[薩摩藩]으로 탈주하여 부관시절에 알게 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의 도움을 얻어 직접적인 개인행동에 나섰다.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나가사키[長崎]에서 나가사키와 사쓰마, 조슈[長州] 간에 서양식 총포를 거래하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도사의 전 한슈[藩主] 야마노우치 도요시게[山內豊信]의 탄압을 피해 근왕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1838~67]와 재회하여 함께 활동했다. 1866년 교토에서 사이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77]와 함께 삿초 동맹[薩長同盟]을 맺어 바쿠후 타도운동의 적극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동맹 성립 직후 바쿠후의 포위망을 벗어나, 삿초 동맹의 성립 등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던 도사 한으로 돌아가 거주허가를 받았다(1867. 4). 이후 도사 한의 원조를 받아 해운과 무역을 담당하는 해운회사를 가이엔타이[海援隊]로 개칭하고 이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7월에 나카오카는 이와 병행하는 리쿠엔타이[陸援隊]의 창립 허가를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도사 한은 과거 한을 탈출한 로닌[浪人]의 도움을 얻어 사쓰마 한과 협력해 왕정복고를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나아가 사카모토는 가쓰에게 의탁하고 있던 시기에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권을 조정에게 반환'하고 '공의(公議)에 기초하여 의정국(議政局)이 정무를 결정'한다는 구상을 포함한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제시했다. 이것이 바로 야마노우치가 1867년 10월 3일 로주[老中]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靜]를 통해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제출한 대정봉환(大政奉還)에 대한 건백서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요시노부가 조정에 대정봉환을 상주(14일)하고 삿초 양 한이 바쿠후 타도에 성공하기 전에 나카오카와 함께 교토에서 바쿠후 지지파에게 암살당했다.

 

高知市 .桂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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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영웅' 풍운아 료마

일본의 봉건 막부정권을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정치가이자 협상의 귀재, 근대 일본의 첫 벤처 기업가.

수식어의 주인공은 19세기 중반 일본 개화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 다. 아사히 신문이 밀레니엄 특집으로 조사한 설문에서 일본인들이 지난 1천년간 가장 좋아하는 정치지도자로 뽑혔다. 2, 3위에 각각 랭크됐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를 앞섰다. 6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연히 눌렀다.

일본인들은 왜 31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를 좋아할까.

신간 『사카모토 료마』(전3권) 는 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책은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개화를 추진하다 끝내 암살되기까지 결코 짧지만은 않은 삶을 조명한 역사소설이다. 알고보니 일본에서 그는 료마라는 호칭으로 통한다.

성 대신 이름을 불러 친근감을 표시하는 관습 때문이다. 벤처기업가 손정의씨도 얼마 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료마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통과 현대가 맞부닥친 격동기를 헤쳐간 유연한 사고, 그리고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이 벤처정신을 요구하는 이 시대 정.재계 리더들의 감수성을 자극한다고 볼 수 있다.

료마라는 한 개화기 리더의 성장과 모험,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일본의 서양식 근대화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비해 빨랐던 배경을 발견한다. 쇄국과 개국의 갈등을 소모적으로 재연한 우리에 비해, 일본은 함포를 앞세운 서양에 맞서 초기의 치열한 쇄국.개국 논쟁을 료마와 같은 협상가의 헌신적 노력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이후의 전개과정은 우리가 안다. 일치단결해 근대화를 앞당기는 방향으로 매진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우리로선 결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료마식의 일본 근대화가 제국주의 야만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적 근대성의 명암을 우리 입장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소설은 1853년 미국인 페리 제독이 군함 4척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하며 일본에 상륙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본을 일대 변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이른바 '구로후네(黑船) 사건'이다. 무력(武力) 으로 협박하는 외세 앞에 막부 정권은 무력했다.

무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쪽과 서양을 적극 배워야 한다는 두 파로 갈리며 갈등이 첨예화된다. 소설은 주인공 료마가 양이(攘夷) 파에서 개국(開國) 파로 변신하며 근대화를 추진해가는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로 읽힌다.

일본 전역은 서양인들의 신식 무기는 물론 그들의 체격조건에 놀란다. 약간 모자라고 어리숙하게 보일 정도로 평범했던 19세 청년 료마가 사무라이로 성공하기 위해 에도(江戶) 로 검도 유학을 온 것도 이 때다. 검술을 배우는 데만 열중하던 청년 료마는 처음에는 동시대 젊은이들이 막부정권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탄식 앞에 한소식을 깨우치는 모습이 묘사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1백60㎝를 염두에 두고 검술을 갈고 닦은 사람이 2m 가까운 서양인을 대상으로 칼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라는 우스개 일화가 소개된다.

칼에서 총으로, 총에서 대포로 발전한 시대적 변화 앞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료마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기는 개국파의 거두 가쓰 가이슈를 만나고부터다. 가쓰를 암살하러 갔던 료마가 오히려 개국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는 가쓰에게 설복당한 것이다.

이후 료마는 항해술 등 문물을 배우고, 일본의 새로운
 국가체제를 모색하며 맹렬히 활동하다 31세 생일날 정적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 책은 일본 독서시장의 롱셀러 『도쿠가와 이에야스』(솔,전32권) 를 쓴 야마오카 소하치의 말년 작품이다. 80년대 초반에 나온 이 책보다 앞서 일본 사회에 료마 선풍을 일으킨 책으로는 시바 료타로의 1966년작 『료마가 간다』를 들 수 있다.

아직 국내에 제대로 번역.소개되지 않은 시바의 책에 대해 최관(고려대 일문학과) 교수는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를 지나치게 소설적으로 미화해, 그 결과 일본인의 영웅인 료마가 한국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료마는 일본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생각했을 뿐, 그러한 방법이 다른 국가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선 무관심했다"며 최교수는 "료마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근대 일본의 이해와도 직결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료마를 경제.경영 측면에서 재해석한 또 다른 책 『사카모토 료마』(도몬 후유지 지음.지식여행) 도 참고할 만하다.

료마를 '성공 신화의 CEO'로 묘사한 이 책에서 도몬 후유지는 "오다 노부나가가 폐쇄상황을 타개한 창업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람들의 융화를 모색한 관리형,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냉정한 조직관리자로서의 수성(守城) 형이라면 료마는 스스로 변화와 개혁을 통해 '제3의 길'을 개척한 인물이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잘못을 즉각 수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