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놈들이 보물울 찾기위해 해체하고, 보수해 변형시킨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일제 초기의 한 조사기록은 경주 부근에서만도 수만 기의 삼국시대 신라고분들이 있었다고 조사돼 있다.
1915년에는 총독부 위촉으로 최초의 학술적 조사발굴이 경주 남산 밖의 황남리고분에서 이루어져 철검·철창, 기타 토기들을 출토시켰다. 같은 때 보문리에서도 또 하나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는 순금으로 된 팔찌·귀고리·반지가 발견되었다. 뒤에 이 고분은 '부부총' 으로 명명되었다.
이어서 1918년에는 경주 동쪽의 명활산 기슭에 있는 고분이 조사·발굴되었는데 여기서도 순금 귀고리, 금·은 팔지와 반지, 기타 옥류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고분의 놀라운 부장품 내막은 소위 학술적 발굴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고분 파괴자들에 의해 갈수록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그 내막은 경주지역에서 일확천금의 유물 약탈을 노리던 도굴꾼들에겐 더욱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결과를 빚었다.
무법자들을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1921년에 경주 남문 밖의 파괴된 커다란 고분 속에서 황금보관을 위시해서 역시 순금으로 된 귀고리·팔지·반지·과대·요패·은합 등이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뒤에 금관총으로 명명된 이 고분의 출토유물들은 신라미술의 극치를 집중적으로 입증시키기에 족했다. 이때의 출토품인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로, 그리고 과대와 요패는 국보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3년 후인 1924년에도 황금보관과 귀고리·요패·도제기마인물상, 기타 주형토기 등이 부장돼 있던 금령총이 발굴되었다. 이때 출토된 금관은 현재 보물 제388호, 도제 기마인물상은 국보 제91호로 지정돼 있다.
이러한 일련의 찬란한 신라유물 발굴은 도굴꾼들의 사리심을 갈수록 자극시켰다.
1925년 4월 15일자 (경성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경주지방은 신라 천년의 구도로 세인이 알다시피 최근 수년간 고분 발굴로 귀중한 출토품이 있었고, 황금의 보관·패도, 기타 고고학상 심대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근자엔 밀굴자가 많아, 어떤 소식통을 빌면 그 상습자가 약 20명에 달하고 있으며, 그 출토품(도굴폼)은 주로 일본인 고매자(고물 매수자)가 착착 구입하여 부당한 이익을 보고 있는데, 최근의 현저한 출토품으로서 '당삼채' 와 같은 항아리를 밀굴하여 수천 원에 밀매한 자가 있으나 그 항아리 속에는 또 5개의 금자(금붙이 유물)가 들어 있어 비상히 귀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일본인 고매자에 의해 대구의 호사가에게 팔려 갔다고 하는데 그러한 부정밀굴에 대해서 당국의 엄중한 취체가 기대되고 있다."
당시 대구에는 그러한 도굴행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혹은 직접 지원한 돈 많고 악질적인 일본인 수집가가 여럿 있었다.
오구라와 이치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23∼1924년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에 그들의 장물 컬렉션 일부가 소개돼 있는데 먼저 오구라에게서 전문가가 주목한 것은,
1)은제투조패식금구(완전품) 2)물고기를 물고 있는 조형토기 3)안구가 얹힌 마형토기 4)쌍배차륜토기 등으로, 출토지는 '남선(영남지역) 발견' 이라고만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치다는 역시 '남선 출토' 라는 금동관의 '조형전립금구' 와 양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칠유경' 등을 갖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1905년 가을에 수학여행이란 명목으로 한국에 건너와서 고대 역사유적을 답사하며 유물 실태도 조사했던 동경제국대학의 사학도 하나가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다.
그는 경주에 이르러 남산 쪽에서 신라시대의 와당과 토기, 기타 불상(석불이었던 듯)의 파편을 채집했고 사천왕사 근처에서는 보상화문이 나타나 있는 전과 10여 장의 와당을 주워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으로 갖고 갔다고 여행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당시의 도굴실태를 기록하고 있다.
"소생은 대형 고분 하나와 중형의 것을 몇 기쯤 조사했는데, 그중 하나는 이미 발굴(도굴)되어 내부가 교란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서는 83개의 고기(토기)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주의 신라고분들은 근년에 와서 한국정부의 정령문치의 결과, 소생이 여행할 당시는 도굴이 끊임없이 행애져 그 발굴품은 모두 일본인 상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고분 속에서 꺼내진 유물이 부산과 대구에 나와 있어 소생은 비교적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발견품(도굴품)은 거의 토기 뿐이지만 이 토기들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면 극히 우수한 작품이다.
소생이 여행할 당시는 고분 도굴이 성하진 않았으나 개성 부근에서의 고려시대 분묘 도굴이 크게 유행하자 그후 경주에서도 맹렬히 발굴되어 소생은 작년(1909년)에 대구에서 그런 발굴품이 고물상의 손에 적취함을 보았는데, 2∼3점의 철기 외엔 토기들이었다."
이 이마니시의 기록은 1905년 당시 이미 신라고분의 도굴이 착수되고 있었고, 출토유물들은 모조리 일본인 상인(골동항) 수중에 들어가고 있었음을 명백히 알려준다. 그리고 1909년에는 부산과 대구의 일본인 골동상이 신라와 가야고분에서 도굴한 토기와 철기들을 산적해놓고 있음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다가 총독부의 학술조사와 발굴로 촐토된 황금빛 보관·순금귀고리·팔지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도굴은 극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풍부한 재력으로 마음껏 도굴품을 사들이고 또는 뒤로 돈을 주어 계속 도굴해 오도록 지원했던 악명 높은 수집가 오구라가 아주 작고 완전한 순금관을 입수한 것도 그때였다. 국보급인 이 작은 순금관은 현재 일본에서 '중요미술품' 으로 지정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물론 소장자는 '오구라 컬렉션' 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한 경주지방의 유적 파괴와 고분 도굴은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25년 8월의 일이었다.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의 하라라는 교수가 신라시대의 정원을 조사·연구한다고 경주를 찾아왔었다. 그는 총독부의 사전 승인도 받지 않고 현지의 고적보존회를 움직여 인부를 사서 임해전지(현재 사적 18호)의 유구를 함부로 출토시키고는 큰 발견이라고 떠들었다.
그리고는 파헤친 자리도 그대로 버려둔 채 도쿄로 돌아가버렸다. 물론 그가 빈손으로 갔을 리는 없었다.
그의 불법적인 발굴은 물론 뒷수습조차 하지 않은 그의 처사는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게 했던 듯, 총독부가 뒷조사한 보고서에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자였다. 엄중한 취체가 있어야겠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
1934년 4월에는 같은 임해전지에서 또다시 매장문화재를 무더기로 도굴한 경주 거주의 일본인 무뢰한이 있었다. 다음은 그때 경주박물관이 서울 총독부박물관에 보고한 내용이다.
"최근 석빙고 근방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임해전지 부근의 토지를 발굴하여 전돌과 기와 등을 채취했음을 탐지하고, 즉시 현지 도굴상태를 조사해 본 바, 도굴자는 인왕리 입구에 거주하는 하시모토라는 자로서 목하 경찰에서 취조 중임. 도굴 유물은 화강석 석재 이백 수십 개, 전돌 188개였음."
출처-이구열, 한국 문화재 수난사
'History & Human Geogra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star is built: New Zealand's first nuclear fusion reactor takes shape (0) | 2024.05.17 |
---|---|
석굴암 백년의 빛 (0) | 2024.05.17 |
[모던 경성]‘사랑의 전령사’ 메신저를 아십니까 (3) | 2024.05.17 |
울부짖는 두 여인에 "괜찮나"…박정희, 혁명가답게 떠났다 (0) | 2024.05.17 |
1919년 전국서 울린 만세 소리...당시 언론은 "소요 사태" 폄훼 (0) | 2024.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