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꼬꼬무] 94회: 조폭의 고백 - N 호텔 살인청부의 진실 주먹계의 대부 김태촌|작성자 마띠
출처: SBS
2023년 9월 14일(목)에 방송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93회는 주먹계의 대부, 서방파의 두목 <김태촌>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대한민국 조폭의 대명사 김태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은밀한 거래
1986년 7월, 강남의 한 고급 안마시술소 VIP 룸.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두 사람은 혈서를 쓰기 시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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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청부
살인청부 부탁을 받은 '형님'은 이 제안을 수락하고 배신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혈서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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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파의 두목 김태촌과 박 검사
김태촌
[김태촌]
70~80년대 대한민국 주먹계를 평정한 서방파의 두목 김태촌. 그는 조폭 최초로 회칼, 낫, 도끼 등 연장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김태촌은 상대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하기로 유명하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주먹계 선배들을 다 정리했다.
[박 검사]
대한민국 검사. 서울 고등검찰청 박 모 부장검사
김태촌 (2005년 당시)
김태촌 (2005년 당시)
"혈서를 어떻게 썼고 무슨 약속을 했고 내가 왜 이렇게 18년 동안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됐는가 이제는 정말 진실을 밝혀야 한다."
김태촌은 박 검사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을 수기로 남겼다.
주먹계의 대부 김태촌
1950년 전남 담양 출생, 그는 어린 시절 광주 서방면으로 이사를 한다. 김태촌의 조직 서방파의 유래이기도 한 곳.
일찍 건달 생활을 시작한 그는 17살부터 교도소를 들락날락한다. 소년원에서 서울 출신 깡패들을 만나고 출소 후 본격적으로 서울 형님들을 따라 깡패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1976년 봄, 26살이 되던 해 그는 엄청난 제안을 받게 된다. 모 국회의원 사위였던 선배가 김태촌에게 깡패를 최대한 많이 모아오라는 부탁을 하는데... 김태촌은 광주로 달려가 300명을 모아 서울로 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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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5월 22일.
8대의 버스를 끌고 서울의 한 건물로 향한다. 그곳은 당시 제1야당 신민당사.
신민당사
신민당사 습격사건
300여 명의 깡패들과 함께 김태촌은 신민당사 건물로 쳐들어가서 국회의원들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전화기를 부수며 정문 셔터까지 내리는데...
깡패들의 습격으로 신민당사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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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
그는 3층 총재실에서 다른 의원과 회의 중이었다. 직원들의 만류에도 도망가지 않으려 했던 김영삼 총재를 의원들이 창밖으로 떠밀어 옆 건물 지붕으로 향하게 했다.
김태촌의 목표는 김영삼 총재가 아니었다.
그는 '신민당 직인'을 찾기 시작했다. 총재가 당 대표로 의사결정을 할 때 쓰는 도장을 찾은 것이다.
YS 낙선 공작
YS 낙선 공작
며칠 뒤 신민당의 새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 사건은 김영삼 총재를 낙선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던 것이다.
김영삼, 이철승
김영삼 VS 이철승
(당시 신민당 총재) (당시 신민당 소속 의원)
직인이 없으면 당선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김태촌에게 직인을 가져오라고 시킨 것이다.
김영삼,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선명야당
이철승, 협력하는 사쿠라 야당
사쿠라
1960~ 80년대에 야당 내에서 정권과 손잡고 일하는 걸로 여겨지던 정치인을 비하하던 용어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의 중심으로 이 공작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김태촌 수기]
"우리들은 무서울 게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이철승 의원이 사람만 죽이지 않는다면 아무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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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촌 패거리는 밤새 신민당사를 수색했다. 밤 11시, 김태촌 패거리는 스스로 당사를 걸어 나왔다. 100여 명의 청년들이 줄줄이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현직 국회의원 폭행과 당 총재를 다치게 했지만 이 청년들에게 내려진 조치는 전원 훈방.
풀려난 김태촌 패거리는 돌아가지 않고 종로로 향했다. 3일 뒤 예정된 전당대회, 그 전당대회를 치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측은 서울 깡패 300명을 동원하여 전당대회에서 맞서게 된다.
1976년 5월 25일, 신민당 전당대회 당일
승리한 쪽은 김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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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을 들고 나선 김태촌은 각목을 무기로 사용했다. 맨손으로 나선 김영삼 측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투표 결과 이철승 의원 승!
화려한 데뷔 전을 치른 김태촌 서방파는 단번에 국내 3대 조직으로 떠오른다.
김태촌의 서방파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
전부 호남 출신의 조직이다.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70년대에는 굵직한 국가사업이 대부분 영남에 집중되었다. 상대적으로 개발이 적었던 호남 지역, 서울로 진출한 호남 출신 깡패들이 성공한 것을 보고 서울로 모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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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언론에는 <조직폭력배>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80년대 조폭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렇게 1986년 김태촌은 주먹계의 삼국통일을 이룬다. 당시 김태촌의 나이 36세였다.
검사와 조폭
김태촌이 삼국통일을 이룬 배경에는 인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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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촌과 박 검사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1985년, 김태촌이 출소를 얼마 안 남기고 있을 시점에 누군가가 찾아온다. 박 검사였다.
부장 검사가 다녀간 후 교도관들의 태도가 바뀌는데...
김태촌은 출소하자마자 박 검사를 찾아갔고 그렇게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가 된다.
김태촌이 개최한 조폭 단합대회에는 박 검사뿐만 아니라 전직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축사를 했을 정도다. 게다가 김태촌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잘나가는 인맥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박 검사를 만난 뒤 그렇게 김태촌의 인생은 순조로웠다
김태촌 수기 속 그날
그러던 어느 날,
박 검사가 처음으로 김태촌에게 부탁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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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검사는 초등학교 동창 황 사장이 운영하는 인천의 한 호텔에 투자를 했다. 무려 4800만 원이다. 그러나 호텔이 적자가 나면서 원금 회수도 못하는 상황이다.
김태촌은 부하를 끌고 인천으로 향했다.
돈을 갚겠다고 약속을 한 황 사장!
그러나 그 후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김태촌이 다녀간 뒤 황 사장이 검찰에 진정서를 넣었던 것이다. 박 검사가 깡패를 동원해서 자신을 협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 검사는 조사를 받은 상황!
분노에 찬 박 검사는 김태촌에게 황 사장을 살해할 것을 부탁했고, 증거로 머리카락 몇 개만 뽑아오라고 했다.
N 호텔 사장 피습 사건
김태촌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김태촌은 박 검사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1. 절대 사표를 쓰지 말 것. 현직 검사로 남아 사건을 수습할 것.
2. 행동 대원 2명을 곧바로 자수 시킬 테니, 3년 정도의 징역형을 보장하고 매월 생활비와 옥 수발비를 대줄 것.
3. 만일 내가 구속된다면, 석방되는 그날까지 매달 가족생활비를 대줄 것
4. 이 약속을 지킨다는 증표로 혈서를 쓸 것
김태촌의 수기에는 그렇게 혈서를 쓴 것이라 했다
신의
신의
1986년 7월 26일.
김태촌은 호텔에 있던 황 사장을 습격했다. (뉴송도호텔 피습 사건) 괴한들은 도망쳤고 황 사장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김태촌은 황 사장을 죽이진 못했지만 평생 걸을 수 없게 만들었기에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했다.
열흘 뒤,
경찰 수십 명이 김태촌에게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박 검사가 나타난 경찰을 막아선 이후, 그들에게 신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그. 러. 나.
상황을 반전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조폭들의 집단 살인사건,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이것은 황 사장 피습 사건 20일 후에 일이다.
서울의 한 룸살롱에서 조직폭력배끼리 싸움이 붙었다.
서울 목포파 VS 맘보파
시작은 이러했다. 맘보파 행동대장이 서울 목포파 조직원의 뺨을 때렸다. 고향 선배를 보고 인사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양 조직원이 우르르 나와 싸우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이 칼을 꺼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룸살롱은 아비규환이 되고 맨손으로 싸우던 맘보파 조직원 7명 중 4명이 사망했다.
맘보파는 서방파의 하부조직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맘보파의 배후로 김태촌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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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틈을 기회로 삼아 황 사장은 병실로 기자들을 불러 인터뷰를 진행했다.
신의의 배신- 뉴송도 호텔 사장 피습 사건
이후 김태촌뿐만 아니라 박 검사까지 수사선상에 오르게 되고. 경찰은 즉시 김태촌 수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전국을 수배했으나 김태촌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박 검사에 대한 검찰 조사도 있었으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박 검사는 황 사장 피습 사건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자 사표를 제출했다.
김태촌을 배신한 것이다.
김태촌 검거 직후
김태촌 검거 직후
"(황 사장과) 사업을 동업하기로 하고 약정서를 작성했는데 개업한 지 한 달 만에 약속을 파기하고, 내가 전과자라는 점과 (황 사장이) 처남에게 빌린 돈을 안 주기 위한 작전과 나를 호텔 사장에서 몰아내기 위한 작전으로 (황 사장이) 모든 일을 와해시켰다."
제주도에서 피신해 있던 그는 박 검사가 사표를 냈다는 기사를 보고 배신감에 서울로 올라오다가 검거되었다. 그러나 김태촌은 검거 직후 박 검사와 관련 없는 일이라며 잡아뗐다. 나름 박 검사와의 신의를 지킨 것이다. (김태촌의 주장)
징역 5년, 보호감호 7년
게다가 2년 후, 감옥에서 폐암 선고를 받게 되고.
결국 형 집행정지로 나오게 된다. 대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수술 이후 그는 새 삶을 얻었다.
김태촌은 경기도의 한 기도원으로 들어가 기도모임을 만들고 주먹계 후배들과 봉사활동을 다니며 기부활동도 했다.
범죄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 선포
1년 후,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동원된 경찰만 16,000여 명이다.
2년간의 치열한 검거 끝에 274개 조직, 1421명의 조직원이 검거되었다. 놀랍게도 명단에는 김태촌의 이름이 있었다
김태촌
폐암 수술 후, 종교에 귀의한 척하면서 국내 유명 호텔들의 도박장 운영권을 강탈하고 다녔던 것.
검거 당시,
김태촌에게는 현금만 무려 2억 1,800만 원이 있었다. 폐암 수술 후 1년 4개월 만에 이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것이다.
그는 결국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김태촌의 나이 40세였다.
진실공방- 뉴송도 호텔 사장 피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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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김태촌은 뉴송도 호텔 사장 피습 사건에서 검사의 살해 지시가 있었다며 발표했다.
김태촌 (2005년)
김태촌 (2005년)
"이제 와서 증거 인멸할 것도 없고 나만이 갖고 있는 한이라는 게 있다. 그 한을 풀어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진실을 밝히자"
그 무렵 박 검사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 검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는 18년 만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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