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국가원로회 서신 142호 戰士와 戀人

Jimie 2024. 5. 11. 06:17

2023.03.28

 

[펌] 국가원로회 서신 142회 - 전사와 연인(2).

국가원로회 서신 142호
-  戰士와 戀人(2) -

    잘못된 싸움

중대장을 한번의 발 타격으로 가볍게 쓰러뜨린 '평양사람'은 감히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매서운 눈길로 대대장을 쏘아 보았다.

"내가 평양에서 3일전에 내려온 사람이고 27년 만에 고향을 찾은 아들입니다. 나한테 볼일이 있습니까?''

당사자가 나타나서 순식간에 한방으로 중대장을 기절시켜 버리자 대대장도 그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렸던지 조금 전에 소리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순간적으로 자세가 굳어지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대대장은 한 개 중대라는 수적 우세가 있다는 것을 믿었는지 이내 자기를 수습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도발적으로 나왔다.

"내가 대대장이다. 네가 열차 안에서 우리 사람들을 때린 놈이냐?''

"때린 것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 앞에서 행동을 너무 무례하게  하는 것 같아서 버릇을 가르쳐 줬을 뿐입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잘못한 정도가 아니라 인민군대를 때렸잖아 이 새끼야!''

대대장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그의 얼굴에 삿대질을 해댔다.

"그럼 대대장은 인민군대가 백주 대낮에 열차 안에서 상관을 구타하고 여성안내원을 발가벗기는 것이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양사람'의 행동이나 말투는 비교적 겸손하고 양보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누가 봐도 한눈에 품위나 예의가 돋보일 정도로 단정해 보였다.

 

 

이때 소대장이 신경전을 벌리고 있는 그들 두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대대장한테 열차 칸에서 있었던 일은 소대장인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자, 대대장이 단박에 그의 면상을 후려갈기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병신 같은 새끼, 대원들을 만신창이 되도록 맞아 터지게 만들어 놓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끼어 들어. 저리 비키지 못해?''

화해를 시키려다가 생각지 않게 한방 얻어 맞은 소대장은 두번 다시 말을 붙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대대장 동무, 내용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열차 안에서 잠깐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 화해하고 다 풀었습니다.

 

대원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저도 이해가 갑니다. 서로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 말고 좋게 해결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좋을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화를 푸시고 들어가서 술이나 한 잔 하십시다.''

'평양사람'은 한발짝 양보하면서 대대장에게 깍듯이 양해를 구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는데 '평양사람'이 수그러드는 행동을 보이자 대대장은 오히려 기승을 더 부리면서 지휘관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거칠게 나왔다.

"야, 평양, 너  금방 몸을 놀리는 거 보니까  어디서 몇 동작 좀 배운 것 같던데 한번 움직여 보지? 우리 얼마든지 받아줄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 이 거지같은 새끼야!''

"대대장 동무 내가 양해를 구했습니다. 병사들한테 손을 댄 것은 제 실수였습니다. 잘못은 무조건 내가 했으니까 여기서 그만하고 서로 화해를 합시다.''

대대장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투를 던졌지만 '평양사람'은 이번에도 얼굴 모습 하나 달리하지 않고 진정으로 화해를 요청했다. '평양사람'이 매번 겸손한 자세로 나오자 중대병사들 속에서도 웅성거리면서 그를 동정하는 눈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평양사람'이 자기보다 한수 위의  태도로 나오는데다가 중대병사들까지 수군거리면서 한풀 죽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자 대대장의 태도가 돌발적으로 변하였다. 일이 자기의 의도대로 쉽게 되어가지 않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이었다.

"이 평양새끼 죽여버려!''

대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끼와 톱을 든 병사들이 순식간에 '평양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일이 그쯤 벌어지자 '평양사람'도 더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는지 딘호하게 대대장을 향해서 마지막 경고를 하였다.

"대대장, 병사들이 다치는데 대해서 나중에 후회를 하지 마시오, 책임은 반드시 당신이 진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바로 그때 집이 함흥 쪽인 나이 먹은 고참대원 한명이 나무를 하려고 시퍼렇게 날을 세운 낫을 들고 '평양사람' 뒤에서  달려 들어 등짝을 찍었다.

 

 

시퍼런 낫은 그대로 등에 박혔고 등가죽을 한 뼘 정도나 끔찍하게 찢어 놓았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순간 방심했던 '평양사람'이 어처구니없게 먼저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드디어 자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는지 '평양사람'은 자신에게 낫을 휘두른 고참대원을 한순간 내려보더니 순식간에 낫을 들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채면서 팔굽을 완전히 뒤로 꺾어 버렸다.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을 뿐이고 21명의 병사들이 '평양사람'에게 맞아 죽는 떼죽음이 금새 이어졌다.

팔굽이 완전히 부러진 함흥출신의 고참대원이 기절해서 나가자빠지자 흥분한 70여명의 중대원이 한사람을 향해서 일시에 도끼하며 낫과 톱을 살벌하게 휘두르는 속에서 '평양사람'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면서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를 위주로 상대방을 견제하였다.

중대장이 첫 타격에 쓰러지고 고참대원의 팔이 부러져 나간것을 본 중대병사들은 무기는 들고 있었지만 겁이나서 먼발치에서 위협만 할 뿐 섣불리 덤벼들지는 못했다.

진갑자치에 놀러왔던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은 잔치집이 싸움판으로 번지자 아우성을 쳤고 농장 간부들은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지 어디론가 급히 사방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었다.

중대장한테 맞아서 쓰러졌던 '평양사람'의 어머니는 눈물범벅이 되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잘못하면 칠순의 노인이 싸움판 한가운데서 다칠것 같아 소대장과 내가 대대장의 눈길을 피해서 어머니를 집안으로 모셔 들어갔다.

 

어머님은 우리 손을 꼭 잡고 내 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불쌍한 사람이라며 제발 싸움을 말려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소대장과 내가 어머님께 싸움을 꼭 말리겠다며 말씀을 드리고 밖에 나왔을때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이 주저 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면서 숙이고 있던 그의 머리를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부위에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부질없이 달려들어가 발길질 하던 3소대장은 끽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뼈가 부러져서 단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평양사람'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이성을 잃어버렸고 성난 한 마리의 사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정없이 날뛰었다.

그의 발과 주먹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게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간 병사들은 사방으로 나가 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성난 '평양사람'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게 순식간에 싸움판의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겁을 먹은 군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평양사람'은 소외양간 쪽으로 피해 달아나는 대대장에게 달려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대원들이 쓰러져 있는 마당 한 가운데로 잡아다가 꿇어 앉혔다.  얼굴이 까맣게 죽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대대장에게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도끼와 낫으로 등과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평양사람'의 몸도 벌써 피범벅이 되어 옷이 다 젖어 있었다. 30분도 채 안 걸리는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심각하였다.

그래도 '평양사람'이 나서서 흥분한 마을 사람들을 말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대대장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대대장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먼발치에 서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듯 눈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다. 미안한 모습으로 우리가 그에게 다가가자 '평양사람'은 피를 닦아 주던 손수건을  말없이 나의 손에 넘겨 주면서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대대장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고 옆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도와주려고 하자 그는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내가 죽어도 하지 말았어야 할 싸움이었는데  실수로  한 것 같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

급소부위를 얻어 맞아서 잠시 동안 기절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찔한 일이었다.

소대장은 풍을 맞은 사람처럼 온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용기를 내서 '평양사람'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다 죽었으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우리 잘못이 큽니다. 죽어도 우리가 죽겠습니다.''

'평양사람'은 우리 일행들을 얼마동안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대대장에게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대대장, 이번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야. 내가 누군지 처음부터 자네들이 알아보지 못한것이 실수였어. 내가 누구라고 신분을 정확히 밝히면 자네들은 반드시 놀라게 되어 있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숨기고 있었는데 대대장 당신이 판단을 잘못 했어. 숱한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제는 우리 둘 중에 한사람이 책임을 져야 될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리면서도 안타까움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평양사람'과 우리가 죽은 사람들의 처리문제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불시에 인근에 있는 교도지도국산하 특수부대 요원 수 십명이 싸움 현장에 들이 닥쳤다. 아마도 처음 싸움이 시작될 때 농장간부들이  달려가서 이미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때 예견치 못했던 돌발적인 일이 순식간에 발생하고 말았다. 싸움판을 피해서 숨어 있던 중대의 하사관인 부분대장 한사람이 특수부대 사람들이 오는것을 우리를 도와주려고 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긴장을 풀고 있는 '평양사람'에게 달려 들어 그의 등허리 척추를 도끼로 내리 찍었다.

 

말릴 새도 없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청천병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부분대장은 척추에 박힌 도끼를 뽑더니 다시 한 번 그 자리를 내리 찍었다. 도끼날에 척추가 잘린  평양사람은 괴롭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덩어리 같은 피를 토하면서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소대장과 내가 달려들어서 도끼를 빼앗고 '평양사람'을 품에 안았을 때 그는 벌써 마지막 숨을 힘들게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울면서 죽지 말라고 소리치자 '평양사람'은 간신히 눈을 뜨더니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소리와 함께 '억울해'라는 말을 비교적 똑똑하게 남기더니 맥없이 머리를 떨구어 버렸다.

아들이 숨을 거두자  맨발로 달려 나온 어머니는 굳어져 가는 아들의 시신에 얼굴을 파묻고 기절하고 말았다.

           戀人

싸움이 끝난 바로 다음날, '평양사람'과의 80대1의 싸움에서 21명의 목숨을 잃은 대대에서는 아침부터 긴장감이 나돌았다. 공병국의 검찰에서 검사들이 내려와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고 오전 11시경에는 직승기(헬리콥터)의 동음이 들려오더니 농장에서 무우를 심던 대대앞의 공터에 천천히 내려 앉았다.

직승기의 문이 열리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까만 정복차림을 한 30대 중반의 여성이 먼저 내리고 그 뒤로 역시 사복을 하고 똑같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7~8명의 남자들이 뒤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부대지휘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여단장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대대지휘부 안으로 들어갔다.

약 15분쯤 후 갑자기 전 여단의 폭풍명령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각 대대, 중대들은 전투 장구류들을 착용하고 여단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는 연병장에 집결하였다. 싸움 도중에 중상을 입고 치료중인 대대장과 다른 사람들까지 열외없이 전부 모이라는 여단장 명령이 별도로 떨어졌다.

잠시 뒤에 집결해 있는 여단대열 앞으로 조금 전에 평양에서 직승기를 타고 내려온 사복차림의 사람들과 함께 국에서 내려온 간부들, 검사들, 여단본부 지휘관들이 나타났다. 무장한 보위중대소속의 일 개 소대도 여단대열 앞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도열했다.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맨 앞에 나서서 정렬해 있는 여단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뒤에 서있는 평양에서 같이 온 일행에게 무슨 말을 몇 마디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뒤에 그 여인의 지시를 받은 일행 중 한명이 여단장에게 다가가더니 귀속말로 무엇인가를 전달했다. 여단장은 그의 말을 듣고 꽂꽂하게 차렸자세를 취하면서 여단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싸움에 참가하였던 우리 대대만 남고 다른 대대는 우리 대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백 발자국씩 이동케한 것이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인이 여단장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고개  짓을 하더니 대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제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오십보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대오가 갈라지자 그녀는 대대 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을 불러 그들에게 양쪽의 인원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지시하였다.

 

 

곧이어 공병국에서 내려온 검사에게 싸움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게 했다. 대좌의 계급을 달고 있는 공병국검사는 딸과 같은 젊은 여성에게 차렷자세를 하고 깍듯이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이제부터 호명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대대장을 포함해서 15명이 대열 앞으로 불려나가 일렬횡대로 나란히 정렬하였다.

도끼로 '평양사람'의 허리척추를 찍은 부분대장을 비롯해서 싸움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사람들 위주로 불려나갔다.  선글라스를 낀 여인은 검사가 넘겨주는 자료를 받아서 한참동안 뒤지면서 반복해서 읽어보더니  우리 소대장을 비롯해서 세 명의 이름을 직접 거명해 앞으로 나오게 했다.

선글라스 여인은 그들에게 잘못은 크지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경고하고 중대의 대열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여인이 검사에게 다시 눈짓을 하자 검사가 무장한 보위 소대원들에게 대대장을 비롯한 나머지 열두 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열두 명은 서있는 자리에서 포승줄에 온 몸을 결박당했고 여단지휘부 측면쪽에 있는 아찔한 높이의 벼랑쪽을 향해서 나란히 세워졌다.

 

별아별 생각을 다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글라스 여인의 커다랗게 격앙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있는 너희들 여단 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았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서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그 후과가 막대한지 너희 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 12명을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가 설마 하고 있는데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단박에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들더니 맨 우측에 차례로 서있는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뒤이어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나서서 나머지 열 명에게 귀가 멍하도록 총탄세례를 퍼부어 벌집으로 만들었다.

68년산 자동소총의 요란한 소리는 골짜기를 메웠고 포승줄에 결박당했던 12명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모조리 처형되었다. 사형집행시 남기는 마지막 말이라든지 모든 원칙이 무너지고 아무런 순서도 없이 그냥 서있는 자리에서 가차없이 공개처형 해버린 것이다.

사형이 끝나자마자 평양에서 내려온 선글라스를 낀 여인과 그의 일행들은 즉시 직승기를 타고 부대를 떠나는 차비를 했다. 그 여인은 직승기에 오르기전 선글라스롤 잠간 벗고 눈자위를 훔쳤다. 어깨를 들썩이며 직승기로 돌아선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알아챘을 만큼 약간 특이했다.

그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다음에도 얼마동안 부대에서의 소동은 끝나지 않았다. 대대장이 주동적으로 나섰다가 총살당한  우리 대대는 일주일 뒤에 해산되고 새로운 대대가 만들어졌으며 우리 중대 전원은 모조리 노동교양소에 가서 일년 동안 단련을 받다가 처벌제대되어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단장을 비롯한 여단지휘부의 주요 핵심간부 들도 연대적 책임을 지고 우리처럼 고향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년 후에 확인된 내용이지만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권총을 빼들어 대대장과 중대장을 직접 총살하고 평양으로 올라간 매력적인 검은 선글라스 여인이 처연한 심정으로 밝힌 '장중한'의 장례는 가족의 요청에 의해 평양으로 유해가 옮겨지지 않았고 5일장을 치룬 후

 

희천마을 아버님묘소 아래쪽에 일반사람들의 묘지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웅장한 모습으로 조성되었으며 1.5미터 높이의 묘비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 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있으라!''

        재회

1983년 11월 24일 노동교화소를 나오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같이 처벌제대된 소대장이 1분대장과 함께 찾아와 희천마을의 장중한동지 어머니에게 사죄하러 가자고 했다. 그들이 준비해온 음식에 몇가지를 더 보태어 밤시간에 출발하는 기차를  무임승차하여 자강도 희천으로 갔다.

1년 전보다 머리가 더 하얗게 희신 어머니가 우리를 한참 보시더니 그 자리에 풀석 주저앉으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시었다.

 

우리는 속죄를 받으려고 왔으니 죽여 달라고 하자 어머니는 눈물을 그치고 오히려 치마폭으로 우리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다. 우리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다음날 '평양사람'의 묘앞에 준비해간 음식들을 소박하게 차려놓고 깊숙이 머리숙여 절을 하였다.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사죄와 회한의 절이었다.

묵은지 3일째 되던 날 홀로 계신 어머니께 도움을 드리려고 겨울에 땔 장작을 하루 종일 패서 크게 단을 쌓아 놓고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께서 장롱 문을 여시더니 두툼한 책 한권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으시면서 아들이 진갑잔치 때 평양에서 가져온 공책인데 죽은 다음에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서 들여다 보긴 하지만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도무지 내용을 알 수가 없다며 한번 읽어 봐 달라고 하셨다.

첫 머리의 내용은 필자가 어릴 때 집을 나가 어느 무인도와 같은 섬에서 생활한 것부터 시작하여 희천마을에 오기전까지 모든 상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였다.

15년 동안 특수훈련을 받던 일들과 남조선에 나가서 공작하던 내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국군출신으로 포로가 되었던 아버지에 관한 내용과 공작대상자인 남조선에 남아있던 아버님 친척들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접촉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빼꼼하게 적혀있었다.

특수임무를 띤 남파공작시 북한에서는 누구나 친히 알고 있는 문익환을 만나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기록돼 있었으며,

 

 

특히 1980년 5월 달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상당히 심층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80년 5월21일 08시, 장중한은 20사단 계엄군이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통신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300명의 전사들을 진두지휘했다. 총기를 사용하면 안되었다. 철저히 대학생 등 시민군으로 위장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막대기 하나로도 얼마든지 십 수명은 제압할 수 있는 특수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짚짜 14대를 탈취하는 건 식은죽 먹기였다.

 

탈취한 사단장 1호차를 선두로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가니 그들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즉각 내 주었으며 이들은 곧바로 이 차량들을 이용해 전남도내 44개 무기고를 털었다. 장중한이 이중 영웅칭호를 받기에 충분한 전과를 거둔 것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광주 전남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5.18일 고려대 선배인 동아일보 기자의 권유로 함께 광주에 내려간 고대신문 기자였던 이병완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고향 장성에서 소식을 들은 부모들이 아들이 계엄군에 잡혀 갈까봐  데리고 가버렸다.

장중한의 기술은 계속된다.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의 재야인사들은 이미 북조선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할 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고 그들의 주위에 결집되어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많은 친북한적인 세력들도 남조선에서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충분히 장성되어 있었다.

  5.18 광주인민봉기가 차질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수집과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험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새벽 첫 닭이 울 때까지 어머니는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죽은 아들의  목소리라도 들으시는듯 주름잡힌 눈매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셨다. 戰士는 가버리고 戀人은 이후 정략결혼을 했지만 그 남편 또한 정쟁의 희생물로 동생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었다.

   2020년 10월 11일

탈북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재 구성한 '戰士와 戀人'은 실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