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시인 박목월, 역사적 상흔 직시한 작품도 남겼다
1930∼1970년대 쓴 작품 노트 80권… 朴 시인 연구자 설득에 유족이 발표
해방의 기쁨-전쟁의 참혹함 등 다뤄
“문학사 다시 써야… 전집 발간 예정”
시인 박목월(1915∼1978)이 1970년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미발표 시 ‘슈샨보오이’의 일부다. 이 시에선 전쟁의 참혹함을 딛고 살아가는 어린 구두닦이 슈샤인 보이(shoeshine boy)를 바라보는 시인의 애처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아아 눈이 동그랗게 아름다운 그애 슈샨 보이/학교 길에 내일도 만날가 그애 슈샨보이.’라며 참혹함을 서정적인 어조로 그리기도 한다. 박목월 특유의 서정성을 담으면서도 역사적 상흔을 직시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청록파’의 대표주자였던 그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시라는 평가가 나온다.
공책은 박목월의 아내 유익순 여사(1920∼1997)가 보관했다. 유 여사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 남아 있을 때도 천장과 지붕에 남편의 공책을 숨겼다. 이후 박 교수가 보관하다 연구자들의 설득으로 시인 사후 46년 만에 공개됐다. 박 교수는 “공책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오랫동안 보자기에 싸인 채 보관돼 있었다”며 “오랜 시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후배와 제자들의 도움으로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목월은 조지훈(1920∼1968), 박두진(1916∼1998)과 더불어 청록파로 불렸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문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사회주의 문학에 반발해 한국 시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시 ‘나그네’ 중)처럼 민요가락과 아름다운 자연을 어울리는 시구로 순수 서정시를 주로 썼다.
이날 공개된 작품들 중 눈길이 가는 건 역사적 상흔을 다룬 시들이다. 박목월은 해방 직후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무제_해방’에서 ‘어두운 굴레를 쓰는 일이 없으리라/두 번 다시는/스스로 목이 메어/영원히 빛나라.’라며 해방의 기쁨을 직설적으로 표출했다. 시 ‘결의의 노래’에선 ‘절절 끓는 핏줄을 가진 자라면/이 겨레의 핏줄을 가진 자라면/바다에서 산에서 또한 들에서/일어나고야 만다.’며 해방이 우리 민족에 가져올 희망을 노래했다. 박목월의 기존 작품들과 다른 결의 작품들이다.
근대화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도 발견됐다. ‘뻐스를 기다리는/기다리는 사람으로/줄을 이루었다’(시 ‘무제’ 중)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도시에서 삶의 피로를 그렸다. 이 외에 기독교 신앙, 가족, 사랑을 다룬 시들도 있다. 우정권 단국대 자유교양대 교수는 “박 시인의 문학사를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향후 박 시인의 전집을 발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이 자신의 미공개작이 세상에 나온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짓궂은 질문에 박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뭐 하러 했노.’ 아버님이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 겁도 납니다. 하지만 평생 시를 껴안고 살아온 아버님의 인생을 보여 드리고 싶어 미발표작 공개를 결정했습니다. 잘 읽어 주세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동아일보
“저는 떨려서 못 읽겠어요”…박목월이 숨겨둔 시 166편 공개한 아들
아버지 박목월 미발표작 공개
1978년 작고후 46년 빛 못봐
400편 중 엄선해 166편 발굴
“시인생애 연구에 꼭 필요한 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시 ‘나그네’)라는 한 문장만으로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작이 대거 공개됐다. 박목월 시인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12일 서울 광화문 한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아버지의 미발표 육필 원고 166편을 공개했다. 1936년부터 1970년대까지 집필된 박목월 시인의 작품이 세상에 처음 빛을 보게 됐다.
“사실 전 가슴이 떨려서 아버지 시를 잘 못 읽습니다. 아들이라 아버지 작품을 평가할 수도 없어요. 후배와 제자들 도움을 받아 총 400편 중에서 작품의 형태를 완전히 갖춘 것만 엄선한 결과물입니다.”
박목월 시인이 작고한 건 1978년, 이달 3월 24일은 그의 46주기다. 거의 반세기 만에 공개된 그의 노트엔 세월의 흔적을 거스르는 시인의 진솔한 마음이 고스란하다. 자연과 인간이 관계를 그려 자연파(청록파의 다른 이름)로 불렸던 박목월 시인은 미발표작에서도 자연을 예찬한다.
‘파도소리에 뜰이 흔들리는/ 그 뜰에 용설란’으로 시작해 ‘안개에 반쯤 풀리고/ 안개에 반쯤 살아나는 용설란’으로 끝나는 시 ‘용설란’은 객지에서 본 새로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 용설란은 난(蘭)의 종류인데, 박목월 시인은 한라산의 용설란을 보며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 빚다’라고 표현했다.
아버지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시 166편을 공개하는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 = 연합뉴스]
또 다른 미발표작 ‘무제’에서 박목월 시인은 시 쓰기를 ‘측은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참된 시인. 참된 시인이/ 되어보리라. 이 어리고 측은한/ 소망’이라고 적힌 시 ‘무제’에서 시인은 가엾고 불쌍한 글을 쓰는 일만이 시인을 진실되게 만든다고 노래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는 “시인의 마음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시로, 그의 육필 원고를 보면 내면을 응축시켜 완성된 상태로 발표한 것이 많다”고 강조했다.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작이 출간되기까지는 굴곡이 적지 낳았다. 박목월 시인의 아내 유익순 여사는 남편이 습작하다 휴지통에 버린 메모까지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6.25전쟁 때는 천장 위에 숨겨놨고 이후 장농 밑에, 모기장 밑에 보자기로 싸서 쟁여놨던 작품들”이라고 박동규 교수는 회고했다.
누렇게 바란 페이지마다 박목월 시인 특유의 꼼꼼함이 베어나온다. 시어와 행·연을 바꿀 때마다 그는 육필로 다시 썼는데, 토씨 하나만 바꿔도 개작(改作) 과정을 모두 노트에 적어놨다. 박 교수는 “어떤 시는 발표하기 싫으셔서 안 내신 게 아닌가 싶어 이번 공개를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라며 “하지만 미발표작에 더 실험적인 작품도 많다. 한 시인의 생애를 살피는 데 아니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미발표작 공개는우정권 단국대 교수가 작년 4월 박동규 교수에게 노트 열람을 요청하면서 이뤄졌다. 이후 유성호 교수와 방민호 교수, 박덕규 단국대 명예교수, 전소영 홍익대 초빙교수 등이 ‘박목월 노트’를 디지털화한 뒤 전수 분석했다. 새롭게 발굴된 박목월의 작품들은 전집과 평전 형태로 올해 6월 전에 독자를 다시 찾을 예정이다.
매일경제 & mk.co.kr
박목월을 ‘다시 읽는다’
장남 박동규·유작품발간위
육필노트 80권 분석 끝 공개
연작시 등 실험적 시도 눈길
한국전쟁 등 시대적 고찰도
원본 유지 위해 디지털 작업
전자책·전집·평전 발간 계획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인 박목월(1915~1978)의 미발표 작품 166편이 46년 만에 공개됐다. 이번 미공개 작품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이나 해방의 기쁨 등 시대적 상황을 다룬 시들, 기존 짧은 형식이 아닌 장시(長詩)도 여러 편 발견돼 박목월의 작품세계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박목월 시인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육필시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목월 시인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와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위원장 우정권 단국대 교수)는 1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박목월 시인이 남긴 다량의 미공개 육필 노트를 공개했다. 공개된 시 166편은 총 80권의 육필 노트에 수록된 460여편 중 미발표작 290편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있고 완결된 시 형태인 작품들을 추려낸 것이다.
“절절 끓는 핏줄을 가진 자라면/ 이 겨레의 핏줄을 가진 자라면/ 바다에서 산에서 또한 들에서/ 일어나고야 만다/ 우리는 일어난다.”(결의의 노래)
“6·25 때/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 슈샨보이/ 이 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 비가 오는데 잠자리나 마련했을가 슈샨보이.”(슈샨보오이)
이번에 공개된 작품은 그동안 알려진 박목월 시인의 작품과는 시풍이 다르다. ‘무제’ ‘슈샨보오이’ ‘결의의 노래’ 등은 해방과 한국전쟁, 미래 조국의 희망 등 역사적 격동기의 감흥을 다룬 작품들이다. 우정권 교수는 “박목월 시인은 목가적·서정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번에 발굴된 작품 중에는 다른 경향의 작품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면서 “시대적 상황과 거리가 먼 작가가 절대 아니었다”고 말했다.
단형시가 아닌 장시, 연작시 등 기존과 다른 형식의 시들도 소개됐다. 육필 노트에는 ‘방문’ ‘폐문’ ‘심방’ 등이 연작시 형태로 수록돼 있다. 우정권 교수는 “‘폐문’ ‘심방’ ‘방문’은 한 권의 노트에 차례로 쓰여 있는데, 하나의 서사적 상황이 연작으로 구성돼 있다”며 “내용 또한 시적 화자의 ‘상대’가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해 극적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어 위원들이 ‘미스터리 스릴러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연구할 내용이 많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박목월 시인의 작품세계에서 한정적으로만 주목받았던 ‘생활시’도 여러 편 발굴됐다. 한겨울에 버스를 기다리는 삶의 고단함을 다룬 ‘무제’, 쉴 틈 없는 서울의 근대화를 다룬 ‘구두’ 등이 대표적이다. 전소영 홍익대 초빙교수는 “새로이 발굴된 시편들에는 근대화된 도시의 시공간 안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면서도 가난과 고단함을 벗어날 수 없었던 ‘나’의 내면적 비애와 도시민들의 풍경이 드러난다”며 “중기 시 재평가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종교시, 동시, 고향과 타향에서의 삶, 자연 풍경, 가족과 어머니 등을 다룬 작품들이 공개됐다.
육필 노트에는 시어를 수정하고 재배치한 흔적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시 ‘놋방울 열두 형제’는 같은 이미지나 스토리가 여러 차례 시도돼 동시 한 편이 완성돼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박목월 시인의 대표작 ‘나그네’는 발표된 작품과 똑같이 쓰여 있다. 박 교수는 그동안 노트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노트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버님이 왜 이 시들을 발표하지 않으셨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한 시인의 전 생애를 살펴볼 수 있으면서 시인의 창작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에 실험적인 시들도 많았기에 공개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는 “박목월 시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노트 속에는 발표를 염두에 두고 있던 작품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노트의 원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디지털 작업을 완료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자책을 발행하고 전집·평전을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인공지능(AI) 미디어 기술을 활용해 박목월 육성 시 낭송, 그림 및 동영상 미디어 등 콘텐츠 개발에도 나설 계획이다.
우 교수는 “김소월 시인과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모든 작품을 발표하고 작고했으나 박목월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된 작품들은 한국의 시인문학사를 다시 쓸 만한 문학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육필 노트는 그동안 경주시 동리목월문학관과 박 교수의 자택에 나눠서 보관돼왔다. 동리목월문학관에서 노트의 외형을 전시한 것 외에는 내용이 일절 공개되지 않다가 지난해 8월 이를 전면 공개해 새롭게 발간하려는 취지로 발간위원회가 구성됐고, 6개월간 분석 작업이 진행됐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경향신문.
박목월 시인이 방언으로 쓴 시집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18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린 개관 10주년 기념 기획특별전 '사투리는 못 참지!' 언론공개회에서 한 참석자가 박목월 시인이 방언으로 쓴 시집을 살펴보고 있다. 이 전시는 다음날부터 10월 13일까지 열린다. 2024.4.18
scap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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