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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표범’ ‘타타타’ ‘열정’… 300곡 가사에 인생 철학 녹였어요

Jimie 2024. 5. 8. 03:33

[나의 현대사 보물] [32] 작사가 양인자

 

[오늘무슨일] 양인자 작사가, "앞으로도 '활화산처럼 터져오르는' 열정으로 삶을 밀고 나갈 것"

https://www.youtube.com/watch?v=SkYqc7iKi-E

양인자 작사가가 자신의 첫 가요 작사곡인 '열정'과 2023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수훈한 보관문화훈장을 자신의 보물로 소개했다. /박상훈 기자
 
입력 2023.12.12. 03:12업데이트 2023.12.1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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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경기도 용인에서 만난 작사가 양인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립스틱 짙게 바르고’ ‘열정’ 등 수많은 히트곡 가사로 많은 이의 마음을 울렸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누구보다 대중적 인기를 크게 얻은 문인이었던 셈이다. /고운호 기자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가수 조용필의 긴 읊조림으로 시작되는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한 편의 문학작품처럼 많은 이의 뇌리에 박힌 이 가사는 작사가 양인자(78)가 썼다. 서정적인 노랫말로 1980~1990년대 히트곡들에 오랜 생명력과 깊이를 입혔다. 지금까지 작사한 곡이 300여 곡. ‘그 겨울의 찻집’ ‘Q’ ‘서울 서울 서울’ ‘타타타’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열정’ ‘알고 싶어요’ 등 히트곡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지난 8일 남편 김희갑 작곡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경기도 용인에서 그를 만났다. 소녀같이 맑은 얼굴을 하고 표범과 청춘, 삶의 열정을 이야기했다. “노래하고 살았던 나날”이라고 지난날을 떠올렸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미리 쓴 신춘문예 당선 소감

작사가 양인자의 출발점은 문학이었다. 첫 직업은 소설가였다. 부산여중 3학년 재학 시절 방학 숙제로 써낸 장편소설 ‘돌아온 미소’가 이듬해 출간되며, 부산의 ‘천재 문학 소녀’로 주목받았다. 원하는 대로 풀리진 않았다. 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1965년부터 10년간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는 “은사이신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이 ‘얘는 왜 이렇게 문턱에 잘 걸리나 몰라’라고 말하곤 하셨다”고 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당시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걸 꿈꾸며 미리 끄적였던 당선 소감을 가사로 만든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는 정월 초하루 떨어진 걸 확인한 뒤, 또 1년을 어깨에 걸치고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며 소감을 미리 써봤던 거예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같은 가사가 “사는 게 참 지질했던 시절”에서 우러났다는 것이다. 양인자는 “원래 ‘표범이 굶어 죽기 전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소감 글이었죠”라며 깔깔 웃었다.

 

김동리 추천으로 1974년 등단했지만 이후 쓴 30여 권의 책에 대해선 “성형 비포(before) 사진같이 부끄러워 다시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책들을 보이는 대로 없애고, 열다섯 살 터울 오빠가 간직하던 첫 소설 ‘돌아온 미소’마저 불태워 “화형”시켰다.

 

 

◇‘Q’ 가사 속 ‘너’는 연인 아닌 ‘드라마’

두 번째 직업은 방송 드라마 작가였다. 대학 졸업 후 잡지사 ‘여학생’에서 일하던 시절, 동료였던 드라마 작가 김수현을 따라 소설에서 드라마로 전향했다. 1974년부터 드라마를 쓰기 시작해 ‘부부만세’ ‘혼자 사는 여자’ ‘제3교실’ ‘나의 어머니’ 등으로 인기도 얻었다. 그러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무리 목을 매고 써도 내가 원하는 불길이 안 보였다”고 했다. 그러던 중 작사가의 길이 남편과의 인연과 함께 찾아온다. 1985년 유명 작곡가 김희갑이 함께 가요를 만들자고 연락한 것. 드라마 주제가 가사를 직접 쓴 실력을 보고 제안해왔다. 하룻밤 만에 가사를 써 들고 나갔는데 그 곡이 혜은이의 ‘열정’이었다. “곡이 차트에 오르고 즉각적으로 뜨거운 피드백을 받으면서 ‘아, 내가 해야 할 일은 작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사가 양인자의 보물들. 직접 손글씨로 가사를 적은 300여 곡의 악보. /고운호 기자
 
 

한동안 작사 일과 병행하던 드라마를 완전히 접으며 쓴 가사가 조용필의 ‘Q’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중략)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 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 그는 “가사 속 ‘너’는 연인이 아니라 드라마였다”며 “그래도 내게는 소설과 드라마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노래 가사에도 ‘기승전결’을 넣으려 했고, 그게 다른 가사와의 차별점이 아니었나 싶다”라고 했다.

 
 

◇조용필의 욕 섞인 포효가 들어간 19분 30초 대작

이후 1993년까지 ‘양인자 작사·김희갑 작곡’ 콤비의 시절이었다. 히트곡들이 쏟아졌다. 특히 가수 조용필과의 만남은 특별했다. “가사가 많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나 길이가 거의 20분에 달하는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처럼 실험적인 곡을 가수가 받아들이고 불러주지 않으면 누가 들었겠어요.” 카세트 테이프 한 면 길이에 맞춰 만든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은 “조용필이 ‘노래로 욕을 하고 싶다’고 해 만들어진 곡”이다. “유명인이기에 당하는 억울함, 변명도 못 하는 서운함을 눈에 가득 담고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이 곡은 독백과 노래, 포효로 이뤄져 있다. “이 곡에서 욕을 했다고 하면 다들 ‘어디서?’라고 의아해해요. 악을 쓰는 부분인데, 가요 중에서 욕을 제일 많이 한 노래일걸요.”(웃음)

 

 

그는 옛 물건을 대부분 처분했지만, 작사한 300여 곡의 악보만큼은 보물처럼 보관해왔다. 1990년대 남편과 뮤지컬 ‘명성황후’ 작업을 한 이후 가요 작업은 뜸해졌다. “1980~1990년대에는 가슴으로 들어가는 노래, 인생에 충격을 주는 노래들을 좋아해주셨는데, 요즘은 철학적 얘기나 주제가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트렌드를 좇지 않고 하고 싶은 노래를 계속해왔고요.”

 

 

◇기억 잃는 남편 보며 신곡 만들어… 놓을 수 없는 ‘열정’

작사가 인생에서 남편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남은 물건은 거의 없고, 남편이 보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게 작사가의 기회를 준 사람이고, 존경하는 사람이죠. 남편을 만난 이후 제 삶은 핑크빛이 됐어요. 괴로운 것도 없었고요.” 남편은 4년 전부터 인지 장애 증상으로 기억을 잃고 있다. 최근 남편이 작곡해뒀던 곡에 가사를 붙여 낸 신곡에 심경을 담았다. ‘눈을 맞춰도 소리쳐 불러도 텅 빈 들녘처럼 우두커니….’(김혜영 ‘사랑도 쓸모없네’) 그는 “누구나 결국 한 번은 겪어야 할 이별이라고 생각하고 씩씩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휴대폰으로 직접 찍은 남편 김희갑 작곡가. /양인자 제공
 
 

그는 열정을 좇아 살았다. 가장 아끼는 노래도 ‘열정’. “지금도 내 속에 가사처럼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열정이 우러나오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쓴 가사에 소회를 덧붙인 책 ‘그 겨울의 찻집’이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고, 다음 달에 신곡도 나온다. “작사는 내가 하고 싶었고, 그래서 했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작사가는 멜로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말로 옮기는 번역가”라며 “제 번역을 좋아해주신 분들이 잘해왔다고 ‘쓰담쓰담’ 해주시는 상 같다”고 했다. 그는 “노래가 잊히지 않고 계속 불리는 것이 너무 좋다”며 활짝 웃었다.

최근 받은 보관문화훈장.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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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순반대순관심순최신순
2023.12.12 06:03:12
'그 겨울의 찻집''알고싶어요'...빼어난 가사입니다. 양인자님의 가사는 아름답고 서정적이죠..더 좋은 가사 기대합니다!!!
답글2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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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6:28:11
이분은사랑에속고 정에 운다는 식의천편일률적 인 가요 가사를 한 차원 높이신분이죠 또부군 이신김희갑 선생의 서정적인 작곡 편곡도너무 훌륭하시고 건강을되찾길기원 합니다
답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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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k
 
2023.12.12 06:04:06
부창부수 : 부인 작사 남편 작곡 ^^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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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보기
 
2023.12.12 06:40:13
좋은 글에 곡을 붙여주신 양인자님 내외분께 깊은 고마움 느낍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답글작성
25
0

2023.12.12 07:49:35
양인자님의 가사말은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 할 서정시 입니다.고운 말 고운 가사 고맙습니다
답글작성
23
0

2023.12.12 08:00:07
양인자님이 작사하시고 김희갑님이 작곡하신 노래는 단순 노래가 아니라 저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잠언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노래 가사와 곡으로 만들어 삶의 길잡이에 많은 교훈들이 되고 있어요. 어느 노래 가사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아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하나 심어 놓을께요. 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작곡가님도 건강하셔야 되는데. 두분의 만수무강 기원합니다.
답글작성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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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7:17:59
훌륭한 분이시죠...무궁화대훈장을 헌정해야죠...마른 꽃걸린 창가에 앉아...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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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7:22:27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잔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베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여 그대로 산이 된 들 또 어떠리 라~라랄라 라랄랄라. 라~ 라~ 랄랄라 랄~랄라라 라~랄랄라 라랄랄라 라랄랄 라 라랄라 랄랄라 라랄랄라 라랄랄랄라~
답글작성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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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9:19:14
작사에 그저 예쁜 단어 늘어놓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게 양인자 선생님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가슴이 찡하고 소설 한 편 읽은 것 같은 감동이 몰려오죠. 좋은 노랫말 감사합니다. ㅎ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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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8:29:15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부군 김희갑선생과 작사가 양인자여사 부부는 우리나라 가요사에 남을 주옥같은 노래를 남긴 분들이다. 건강하세요.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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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0:21:49
양인자, 김희갑. 이런 분들이 제대로된 대접을 받아야 한다. 질높은 가사로 단박에 한국 가요의 수준을 높였다. 조용필을 스타로 만든 노랫말들. 덕분에 조용필은 노래하는 가수를 넘어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가수로 등극했다. 드라마에 양인자 가사노래가 뜨면 바로 다음날 앨범이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 <립스틱 짙게 바르고> 가 그렇다. 늦은 상이지만 큰 축하드린다. 아무리 아름다운 가사라도 작곡이 세련되지 못하면 주목도가 떨어진다. 김희갑 선생님의 건강이 회복되길 기도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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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9:57:52
양인자님의 가사는 정말 좋다. 다른 말이 필요없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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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2023.12.12 08:37:53
양인자님 축하드림니다 당신은 훈장 보다 더 좋은걸 받아도 이상할게 없습니다 .
답글작성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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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0:03:52
조용필의" 바람이 전하는 말" 가사가 너무 좋아요.
답글작성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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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0:36:28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의 노래는 무조건 명품입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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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0:33:09
부산여중 선배님이시구나. 자랑스럽습니다 ^^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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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0:33:28
김희갑 작곡가와 양인자작사가 두분다 재혼인데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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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0:15:35
싯귀같은 서설같은 가사가 참 좋아요 고갯마루에서 울던 사랑이 리무진 뒷자리 사랑으로 옮겨온것 같아요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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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0:03:48
이런 작사가의 예전 가사처럼 서정적인 요즘 노래도 좀 듣고 싶다. 어차피 개취이지만 왜 이런 서정적인 노래가 더 낫다고 생각할까. 나만의 개취인가... 내가 몰라서 그런지 요즘 노래엔 보이지를 않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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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9:40:51
음악에 있어서도 부부의 궁합이 최고였죠. 오래도록 기억 될 노래와 가사들 입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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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09:22:05
곧 팔순을 맞이하는 분의 얼굴이 저토록 팽팽하고 고울까? 인상도 좋으시고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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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12:01:10
사진설명에서 '수훈한 보관문화훈장을 자신의 보물로 소개했다'(?) 훈장을 받음이 '수훈(受勳)'이다. '수훈한 보관문화훈장'에서 '공 훈(勳)'은 군말로 '받은 보관문화훈장'이라 했으면 좋겠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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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gune
 
2023.12.12 11:28:36
최고의 음악 동지~양인자와 김희갑 저런 조합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 신의 선택적 조합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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