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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張基杓] : 영원한 재야(在野)

Jimie 2024. 5. 8. 02:36

류지미 2023. 11. 13. 17:25

 

사단법인 신문명정책연구원장
장기표  張基杓 | Chang Ki-pyo

사단법인  신문명정책연구원장

 

 

 

1945년 12월 27일 경남 김해 출생. 김해 진영중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화공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야 노동 운동가로 오랜기간 활동했으며 현재는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은 14대부터 17대, 이어서 19대까지 계속 도전했지만 모두 낙선했으며, 다시 제21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 영원한 재야(在野)라는 별명이 있다.

 

▲ 왼쪽이 부인 조무하 여사, 가운데가 장기표 본인. 오른쪽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1960년대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꾸준히 노동운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서 싸워온 재야운동가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장이었으며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모병원으로 찾아가 어머니(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당시 이 여사는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 갖기를 바랐는데 죽고 나서야 나타나느냐”라면서 서울대 법대 복학생 신분이던 그를 두고 한탄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전태일의 학생장을 치러주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9년을 감옥에서 지냈고, 12년의 수배생활을 보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 번 복역과 가석방, 석방을 거쳤는데 위 사진도 그 당시 가석방 되며 찍힌 사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으며, 일절의 배상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다만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장기표는 애초에 신청 자격이 없었다고 한다.
 
                                                                  ▲ 2011년 이소선 여사 장례식장에서

2011년 7월 8일 이소선 여사가 쓰러지기 전 가족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가 평소에 “하원이 아버지가 좀 잘돼야 할 텐데”라고 했을 정도로 걱정과 격려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는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기억했다. #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꾸준히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동했다. 6월 항쟁 이후로는 재야 세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는데, 모든 재야세력이 결집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을 주도하는 40대 4인방(이부영, 이재오, 장기표, 김근태)의 일원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당시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전민련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으나, 독자정당 창당안이 1989년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자[7] 장기표, 이재오 등의 독자정당추진파들과 함께 민중정당[8] 창당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다.[9]

1992년엔 중부지역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다.#

 

 정치 활동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부르짖던 장기표, 이재오, 이우재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문수와 손잡고 1990년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기치로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1991년 지방선거에서 저조한 투표율로 강원도 의회에서 딱 1명만 당선시키는 데 그쳤고,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아예 1명의 당선자도 못 내며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장기표도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에 출마해서 21%를 득표했지만 3위로 1번째 낙선한다. 민중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자동해산되었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이 여당(민주자유당) 물갈이를 염두에 두고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 등을 영입하였으나, 장기표는 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여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다시 동작구 갑에 출마했지만 2번째 낙선한 후 탈당한다.

이후 재야운동, 제도권 정치와 거리를 두고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서 저술과 강연활동에 몰두한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홍사덕과 함께 인터넷 정당을 선언했지만 홍사덕이 한나라당 선대위원장으로 가면서 무산되었고, 느닷없이 김윤환, 이기택, 조순, 이수성 등 신한국당 공천탈락자들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한다. 민국당 전국구 3번으로 출마했지만, 3번째 낙선하였고, 총선 이후 민국당이 새천년민주당/자민련과 3당연대를 형성해서 공동내각을 꾸리자 반DJ를 주장하면서 탈당한다.

2002년에는 8월 재보선을 앞두고 정권말기 현상으로 집권세력인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김근태 인재영입위원장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서 서울 영등포구 을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4번째 낙선 했다. 역시나 선거 패배 직후 곧바로 탈당한다.

2004년에는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국노총 한국사회민주당[12]의 대표를 맡았다가 녹색정치를 주장하던 녹색평화당과 합당해서 녹색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녹색사회민주당 후보로 다시 동작구 갑에 출마했으나 득표율 4.8%, 5위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5번째 낙선하였다. 녹색사민당은 비례득표율 미달로 자동해산되었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권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보수이론가로 유명한 박세일 교수와 손잡고 개혁적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함께하는 국민생각 창당을 준비했지만, 국민생각을 탈당한 장기표는 녹색통일당이라는 독자 정당을 창당하고 이후 이 당이 확대 개편된  정통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역시나 6번째 낙선하였다. 정통민주당은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를 분산시켜서 새누리당에게 총선 승리를 안겨주는 역할만을 하고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채 자동 해산되었으며, 야권단일 후보였던 홍희덕, 천호선까지 낙선시켜서 한화갑. 한광옥 등 정통민주당원들과 함께 민주통합당 지지자, 당원들뿐만 아니라 통합진보당의 구 민주노동당계, 참여계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먹었다. 특히 18대 국회에서 3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 의원으로 뽑히기도 했던 홍희덕 의원의 낙선은 19대 국회에서 노동, 인권 관련 입법활동을 멈추게 하여 더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 2014년 인터뷰 모습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으나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국민의소리 시민단체를 만들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광화문집회를 주도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1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10명"이라고 하기도 했다.#

 

 

보수 정당으로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소리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등이 구성한 보수통합 논의 기구인 혁신통합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 # 나름 파격적인 결과로 미래통합당 창당준비위원장이 되었다.

미래통합당 김해을 당원협의회에서 "전략공천된 장기표 후보 사퇴하라" 라는 기자회견이 있었으나, 제21대 총선에서 그의 고향인 김해시 을 지역구에 단수공천을 받았다.

김해시 을 국회의원 후보자 토론회에서 김정호 후보의 트램 공약에 대해 토론하는 중, 트램 노선 구간을 김해시 갑 지역과 혼동하고 선고 공보에 주촌면 진례면를 아래의 사진과 같이 잘못 표시하는 등 실수를 범했다.
 

▲ 진례를 주촌으로 잘못 표기

 

           

▲ 주촌을 진례로 잘못 표기


결국 41.6%의 득표율을 거두면서 2위로 패배, 7번째 낙선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40% 득표율을 올리며 전혀 기반이 없는 지역구였던 김해 을에서 선전하긴 했지만 미래통합당으로 입당하면서 진보 진영에서 전향했다는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노린 국회의원 도전에서 결국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정계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장기표의 주요 공격대상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정의당, 민중당 등 진보정당, 한국노총, 민주노총 지지자들에게서도 조롱받았다. 실제로, 과거 녹색사회민주당과 한국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한국노총의 경우 장기표가 아닌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였다.

낙선 후엔 유튜브에서 간간히 등장하긴 하지만 조회수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공식 트위터 계정이 해킹당해 업소 광고가 달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후 2021년 7월, 대선 출마를 다시금 선언했다. #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나 9월 15일 1차 경선에서 컷오프되었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중당
1990 - 1992
창당
정계 입문
1992 - 1995
정당 해산[17]
개혁신당
1995
창당
민주당
1995 - 1997
합당[18]
1997
탈당[19]
진보정치연합
1997
창당
1997
탈당[20]
국민승리
1997 - 1999
창당
1999 - 2000
정당 해산 및 탈당
무•지•개•연합


무소속
2000
창당준비위원회
새시대개혁당


무소속
2000
창당준비위원회
2000 - 2001
창당
2001
탈당[21]
푸른 정치연합

무소속


2001 - 2002
창당준비위원회
새천년민주당
2002
입당
2002 - 2004
탈당
민주사회당
2004
입당
시민당
2004
당명 변경
녹색사민당
2004
합당[22]
2004 - 2005
정당 해산[23]
새정치연대


무소속
2005 - 2006
창당준비위원회
신문명 새정치연대

무소속
2007 - 2008
창당준비위원회
녹색복지당


무소속
2009 - 2010
창당준비위원회
녹색 사회민주당


무소속
2011 - 2012
창당준비위원회
국민생각
2012
창당
2012
탈당[24]
녹색통일당
2012
창당
정통민주당
2012
당명 변경
2012 - 2019
정당 해산[25]
국민의 소리


무소속
2019 - 2020
창당준비위원회
미래통합당
2020
창당
국민의 힘
2020 - 현재
당명 변경

창준위 포함 무려 21개의 당적 보유 경력을 가지고 있어 2012년 이후 활동한 정치인 중에서 가장 많은 당적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 활동 중 보수정당, 민주당계 정당, 진보정당을 모두 거쳐갔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당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훗날 2023년 현재 장기표와 비슷하게 진보정당-민주당계 정당-제3지대 중도정당-보수정당 당적노선을 변경한 정치인은 백현종 현 경기도의원이다.

 


장기표ㅡ
張基杓 | Chang Ki-p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