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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렴 장기표 : ‘민주화 유공자’ 신청 않고, 10억원 민주화운동 보상금 거부한 재야운동가.

Jimie 2024. 5. 8. 02:32

최 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2023. 02. 20  올린 글이다.

10억원의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단호히 거부한  장 기표  재야운동가의 이야기~

 

 

장기표 부인에게 "왜 안 헤어지고 지금껏 같이 살았나?"고 묻자...

 

 

 

 

두 달 여 전, 장기표, 이병철 형, 박태순 대표 부부와 저녁을 했다. 장기표는 외경하는 아우 이병철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당당한 '무서운 사람'이란다. 박태순은 지역 운동을 오래 해온 '갈등치유학 전문가'로 장기표가 주례를 해줬다.

나는 그때 장기표의 부인 조무하 형수를 처음 봤다.

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장선생이 우리에게 준 유일한 게 자립심"이라는 말에서 그의 내공을 느낀 바 있다. 장기표는 2000년 여성신문사가 주는 ‘평등부부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7년엔 '부부사랑 그 지혜로운 행복(도서출판 밀알 출간)'도 냈다.

장기표의 아내 조무하는 26세 때, 수배 중이던 ‘거리의 혁명가’를 만났다. 47년 째 살고 있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다닐 때 학보사 기자를 했던 조무하는 장기표와 조우했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의 구애를 받고,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수배 중인 사람과는 사귀는 게 아니다"라는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집요한 장기표의 구애로 질긴 인연은 결국 시작된다. 왕십리 다방에서 결혼을 서약한 지 석 달 만에 남편은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그후 12년 간의 도피, 10년 옥살이를 반복했다. 꽃 같던 여인은 남편 옥바라지에다 두 딸까지 키우느라 손이 거칠어졌다. 서대문경찰서에서 단식 투쟁을 시작한 남편에게 죽이라도 먹이려고 갔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수사과장이 말했다.

“이제 보니 장기표가 호랑이 등에 업혀 살았네. 부인을 보니 딱 알겠네.”

전태일 분신, 민청학련, 청계피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민주화 운동 도정에서 시련을 겪은 장기표, 그에 못지않게 조무하의 고초도 심했다.

“옛날엔 특별하게 산다고 생각했어요. 나이 드니 알겠더라구요. 누구나 다 그러하다는 걸. 우리 못지않게 제각각 산전수전 겪으며 산다는 걸...”

연금과 파병 보상금을 합쳐 월 200만원이 못 되는 돈으로 부부는 살아간다. 투옥 기간을 감안하면 10억원에 이를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단호히 거부했다.

조무하는 담담하게 말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건 남편뿐이다."

한때 ‘재야 동지’였던 고 김근태와 이부영·이재오·김문수는 순차적으로 제도권에 들어가 명성과 권력을 누렸다.

장기표는 “내가 추구하는 정치가 아니다”라며 ‘안 되는 길’로만 골라서 갔다. 창당과 출마를 거듭했다 실패한 것만 7번이다.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당적이 21번 바뀌었고, 당 대표만 4, 5차례나 맡았다. 장기표 다음으로는 이름난 정치인 중 이인제 김한길이 18번이다.

지난 총선 때 성장지 김해을에 출마해 턱걸이(득표율 41%)로 떨어졌다.

그 전에, 2012년 19대 총선 때는 두 ‘이상주의자’가 뭉쳤다. 보수 이데올로거 고(故) 박세일과 손잡고 ‘국민생각’을 창당한다.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함께 한다는 구상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의견 차로 국민생각을 탈당한 장기표는 독자 창당 후 정통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6번째 낙선하고 말았다. 직후 19대 대선 때 대통령 출마 선언도 했으나 출마는 하지 못했다.

집권 5년 간 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듯 폭주한 문재인 정권 때 '국민의소리'를 만들어 매주 수요일 토요일 광화문집회를 열어 투쟁했다.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1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10명"이라고 일갈했다.

다시 조무하에게로 돌아가자.

거덜날 살림도 없지만 논술교사로, 문화센터 강사로 뛰며 생계를 책임졌다. 그래서 아내 조무하는 선거철만 돌아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남들은 ‘영원한 재야’ ‘천연기념물’ 이러면서 존경한다는데, 제가 볼 땐 그냥 ‘바보’예요, 바보(웃음).”

2021년 장기표는 다시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비록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느닷없는 남편의 출마 선언에 “이젠 놀라지도 않는다”(조무하)며 웃었단다.

“청룡열차가 정해진 목표도 없는데 점점 끝을 향해 달리는 느낌이랄까요.”

강직한 아내 앞에만 서면 장기표는 그저 작아지는, 말 잘 듣는 온순한 양이다. 돈키호테(?)처럼 일단 지르고 보지만, 집에선 말 잘 들으니 ‘부부평등상’도 받았다.

부부가 동시에 감옥에 간, 참 웃지 못할 시련도 있었다.

“처음엔 남편이 재판받는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48시간 유치장에 갇혔다."

6~7년 뒤엔 아예 구속돼 넉 달인가 집을 비웠다고 한다.

"큰애가 6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구속돼 있을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하더라. 나중에 들으니 엄마 아빠가 힘든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공부를 잘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아픈 기억”이라고 조무하는 술회한다.

'영원한 재야' '영원한 청년'으로 불린 풍운아 애비 밑에서도 두 딸은 잘 컸다. 둘 다 과학사회학과 국제정치 전공해 박사를 받고 강의 등을 하고 있다.

"장 선생이 준 유일한 ‘선물’이 자립심이다(웃음). 제 밥벌이는 할 수 있도록, 어디 내놔도 흔들리지 않도록 허리띠 졸라매고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다.”

장기표는 1945년 12월 27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원 고향은 밀양이다. 만(滿) 나이를 기재하도록 법이 바뀌었으니 77세인 셈이다. '7땡'을 기록한 올해 뭔가 중요하고 큰 일을 도모하려는 듯한 예감이 든다.

내년 4월 10일 총선에 출마를 하려는 걸까? 그는 아직 국민의힘 당적과 지역구 김해 을 위원장 직을 보유하고 있나? '그에게 실물정치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나는 물어본 일도 없다.

대장동 비리의 이재명을 처음으로 정치권에 고발한 사람이 바로 장기표다. 부패청산의병연합 대표도 지낸 그는 이재명의 형사 처벌을 촉구하는 연합단체를 꾸려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재명 측에게 고발당해 재판을 받는 중이다.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운명적으로 만난 '불꽃의 청년' 전태일은 그를 투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런 인연으로 2008~2011년 전태일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 섰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한 이후 노동운동에 몰입한다. 그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모병원으로 찾아가 고 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이 여사는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 갖기를 바랐는데 죽고 나서야 나타나느냐”라면서 서울법대 복학생이던 그에게 한탄했다 한다. 장기표와 조영래는 힘을 합쳐 전태일의 서울대학생장을 치러주며 평생 동지가 된다.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10년 간 투옥됐고, 수배자로 12년을 보냈다. 투옥 석방 수배 투옥 가석방 구속 석방 수배를 끝없이 되풀이한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민주화 유공자’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국민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이비 운동가와 생계형 정치인이 여의도 정치판에 들끓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민주당 배지들은 운동가연(然)하며 ‘약자의 편’을 운운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약자의 편'이다.

 


장기표는 다르다. 그의 삶은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초지일관된 노력의 연속이었다. 숱한 유혹을 뿌리치고‘ 안 되는 길’만 고집해 명예도 잃고 동지들과 결별했다.

2020년 총선 때, 정연두 서울시립대 교수가 장기표를 지지하며 올린 글은 장안의 화제였다. 논지는 "이제 ‘안 되는 길’ 고집하지 말고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였다.

장기표가 '안 되는 길'만 고집한 까닭에 대해 말한 일이 있다.

하나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소시적부터 일념 때문이란다. 둘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해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민중·민주·정의·노동 같은 거창한 가치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나의 행복 때문이었다.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자기 구원이듯 민주화운동이 내겐 신앙이었다.”

조무하는 '철없는' 남편에게 “아유, 그럼 혼자 살았어야지(웃음)”라며 "자기 이념,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관철하려는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말했다.

조무하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한 뒤 “소설책이나 보며 편히 살고 싶었지만 그게 서로 안 맞았으니 참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당연히 그러면 헤어지지 왜 지금까지 참고 살았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남편이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꼭 나쁜 일은 아니니까. 많은 이가 ‘장기표는 참 이상적이다’라고 하는데, 그건 ‘저 사람 참 바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바보같이 살자'고 했다. 다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장기표가 지금까지 쓴 책은 출판된 것만 쳐도 30여 종에 이른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제목들은 신문명, 정치, 경제. 북한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나 그 비슷한 단어가 들어간 에세이 책만 6종이나 된다.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출처 : 최보식 의 언론(https://www.bos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