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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앵란嚴鶯蘭 | Uhm Aeng-ran

Jimie 2024. 5. 7. 19:58

류지미 2023. 10. 30. 06:38

 

엄앵란  嚴鶯蘭 | Uhm Aeng-ran

 

엄앵란(嚴鶯蘭, 본명엄인기, 본명 한자: 嚴仁基1936년 4월 11일(음력 3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데뷔하였다.

 

 

서울미동국민학교 (졸업,41회))
중앙여자중학교 (졸업)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가정학 / 학사)

 

 

19세의 엄인기

 

 

예술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엄재근(嚴在槿)은 색소폰 연주자, 어머니 노재신(盧載信)은 배우이며  숙부 엄토미는 재즈연주가로 유명하다.

부잣집 막내딸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중학생이던 시절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구로 피난을 떠났고 이때 시장에서 떡장사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여유가 없었던 형편 때문에 어머니 노재신은 대학진학을 반대했고 차라리 딸이 대학에 낙방하기를 빌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와는 다르게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 고대하던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진학의 기쁨도 잠시,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이던 엄앵란은 마침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던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하게 된다. 이 때 그녀를 눈여겨본 영화감독으로부터 카메라 테스트 제의를 받고 마침내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데뷔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청춘 영화의 아이콘 그 자체였다. 최초의 학사 출신 1호 배우로 풋풋하고 청순발랄한 이미지를 내세워 신성일과 콤비를 이루어 많은 청춘 영화에 출연하였다. 지금의 연륜 있는 모습만 봐온 세대에겐 상상이 잘 안 가겠지만, 엄앵란의 젊은 시절 영화를 보면 날씬한 몸매에 단아한 외모가 눈에 띈다.

 

 

청평호 키스 사건...보트에 엄앵란과 신성일 단둘이,,, 

 

신성일 말에 의하면 자신은 연기와 사랑을 혼돈하지 않는다고 한다. 

농도 짙은 멜로 연기를 해도 오케이 사인만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예외가 엄앵란이었다.

 

엄앵란은 1963 새엄마 촬영 당시 신성일 목에 찍힌 키스 마크를 본 후 알뜰살뜰 을 돌보았다. 촬영장에 나올 때는 꼭 신성일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왔다. 혹시 이 잘못된 길로 뻐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것은 연인의 감정이라기 보다 선배의 배려에 가까웠다.

 

맨발의 청춘이 상영된 64 은 출연작 33편 중 23편을 엄앵란과 함께 했다. 

가족보다 엄앵란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두 사람을 이상한 시각으로 보고 쓴 기사가 산업경제 신문 연예가십란에 처음으로 게재됐다. ‘신성일·엄앵란 열애 중이라는 추측성 기사였다.

 

신성일의 매니저가 새엄마 촬영장에 신문기사를 들고 와 모두가 웃었다. 

읽어보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넘겨짚어 쓴 것이었다. 우리는 겸연쩍게 웃어넘겼다.

 

63년 늦가을 경기도 가평군 청평호에서 배신 촬영이 있었다. 

장동휘가 조직의 보스, 엄앵란이 장동휘의 애첩, 신성일은 애첩의 수행원 역이었다. 애첩과 수행원이 보스 몰래 아슬아슬한 사랑을 하는 작품이었다.

 

라스트 신 촬영 때였다. 

정진우 감독은 호수 한가운데 멀리 보트를 띄워놓고 신성일과 엄앵란이 포옹하는 장면을 롱샷으로 잡고 싶어했다. 

당시에는 줌 렌즈가 없었다.

 

보트장은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있었다.

보트장 주인이 날 보더니 반가워 했다. 

청평으로 촬영을 자주 나갔기에 낮익은 얼굴이었다. 

보트에 오르면서 속으로 기회는 왔다고 생각했다.

보트를 조종하는 친구가 눈치도 없이 따라 올라탔다. 

원래 보트 키는 조종 경험이 없는 사람은 만질 수 없다. 

그래도 방해꾼이 없어야 기회를 잡을 게 아닌가.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 내려.”

 

그 친구는 순순히 에게 키를 넘겼다. 

은 직접 보트를 몰고 메가폰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나갔다. 

정 감독은 호수 한 가운데 떠있는 둘에게 수신호로 ‘Go’ 사인을 내면서 서로 밀착하라고 지시했다. 

키스를 하라는 주문은 없었다.

 

신성일의 눈 앞엔 엄앵란의 빨간 입술만 보였다. 

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랜만에 엄앵란을 껴안으니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앵란도 당황한 듯했다.

 

 미스 엄, 가만 있어봐.”

 

키스는 연기가 아니었다. 

둘의 키스를 방해할만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키스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정 감독은 우리 커플이 탄생하는 것을 가장 먼저 지켜본 목격자라 할 수 있다.

 

이후 서로를 바라보는 신성일과 엄앵란의 눈빛이 달라졌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손을 잡고 가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미스 엄이 신성일을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가족 영화에서는 주로 막내딸 같은 발랄한 역할이나, 액션영화에도 간간히 출연하였다. 활동 당시는 하루에도 영화를 몇 편씩 겹치기로 찍던 시절이라 그가 도대체 몇 편의 영화에 나왔는지 정확하게 모를 정도로 인기있는 배우였으나 1964년 신성일과의 세기의 결혼 이후 영화 배우로의 삶을 정리하고 전업주부가 되어 내조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11대 총선 낙선으로 가계가 곤궁해져  대구에서 비빔밥집을 운영하거나 영화사에서 일하는 등 배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다 90년대부터 아침마당에서 부부문제 상담코너 패널로 활동을 시작,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현재는 각종 프로그램 패널로, 심지어 모 결혼정보회사의 컨설턴트로도 활동 중이다.

 

 

 

2005년 신성일이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됐을 때는 직접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100명에게서 서명을 받았고, 이 때문에 신성일은 구속 2년 뒤인 2007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채널A 한 건강 관련 프로그램에서 검진을 받다가 유방암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돼 부분 절제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허나 실제로는 유선 전이 문제가 발견된 관계로 한쪽 유방을 완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정작 본인은 80살에 가까운 고령이라 암이 생길 수 있다는 발언으로 주위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 사족으로 수술 및 치료 과정을 담은 단독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는데, 남편 신성일의 정성어린 뒷바라지가 잠시나마 주목을 받았다.